뼈아픈 역사 어루만지는 화해의 발길
뼈아픈 역사 어루만지는 화해의 발길
  • 글 사진·진우석 출판팀장
  • 승인 2011.07.0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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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길(17) 강화 나들길

한반도의 상징적 배꼽인 강화도는 ‘역사의 땅, 눈물의 섬’이다. 육지와 섬 사이의 염하(鹽河)라는 천혜의 자연방어선과 드넓은 농토가 있었기에 전란의 시대에는 늘 피난지 역할을 했다.

또한 바다를 통해 서울에 입성할 수 있는 수로라는 지정학적 요충지인 덕분에 외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았다. 몽골 양란에 맞선 대몽항쟁의 격전지일 뿐만 아니라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침탈에 맞서 싸운 기념비적인 장소다.

거기에 한일병합의 전초인 강화도조약을 맺은 치욕의 장소이고, 북녘 땅이 코앞인 분단의 현장이다. 이러한 뼈아픈 역사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서해와 만나면서 빚어놓은 아름다운 자연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길이 강화 나들길이다.

▲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연미정. 날아갈 듯 선 정자 왼편으로 북한 개풍 땅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나들길 대표하는 ‘심도역사문화길’

‘나들’이란 이름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땅, 고인돌을 만들었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넘나들던 섬, 고구려·신라·백제인들이 드나들던 포구, 고려 왕족과 귀족들이 머무르다 떠난 도읍, 이씨 조선 왕족과 선비들이 유배를 왔다가 떠나던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따라 아름다운 강화를 나들이한다는 의미다.


강화 나들길은 2009년부터 만들어져 지금까지 1-8코스, 7-1코스, 교동도 나들길 등 총 10개의 코스가 만들어졌다. 걷기 열풍을 타고 짧은 시간에 많은 길이 생겼고, 기존 코스는 새롭게 다듬어졌다.

그중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산성과 연미정을 비롯한 문화유산과 골목길, 숲길, 마을 고샅길, 들길과 물길 등을 두루 거친다. 그래서 강화 나들길의 대표 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이름을 말한다.

1코스 출발점은 강화터미널이다. 강화산성 동문까지는 이정표가 없기에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터미널을 나와 오른쪽 강화풍물시장 앞에서 길 건너 시내로 가면 된다. 우체국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강화산성의 동문인 망한루(望漢樓)가 나온다.

▲ 꽃과 신록에 젖은 고려궁지의 외규장각.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고,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고 있다. 동문 왼쪽 전봇대에 강화 나들길 첫 이정표가 있다. 꼬리표와 화살표는 골목길로 인도하고, 거대한 느티나무 앞을 지나면 성공회 강화성당이 우뚝하다.

이곳은 1896년 김희준이 강화도에서 처음 세례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세운 한국 최초의 성공회성당이다.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던 도편수가 참여해 백두산에서 자란 1백년생 소나무를 구해서 지었다.

전체적으로 배 모양을 띠는 이 건물은 조선의 전통 한옥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 양식을 절충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영락없는 절간이지만, 내부에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예배 공간을 갖췄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세심한 배려와 토착화 노력이 엿보이는 걸작이다. 재미있는 것은 종이다. 교회당 종탑식으로 높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절집의 범종처럼 땅 위에 낮게 드리워져 있다.

강화성당을 내려오면 넓은 주차장이 있는 용흥궁 공원이다. 이 주변으로 용흥궁, 강화성당, 고려궁지 등의 내력 깊은 문화유적들이 몰려 있다. 용흥궁(龍興宮)은 조선 25대 임금 ‘강화도령’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철종 이원범은 이곳에서 18세까지 나무꾼 떠꺼머리총각으로 살았다.
 
부모도 없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원범은 양순이라는 처녀와 만나며 외로움을 달랬다. 나무꾼 원범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양에 올라가 임금이 되었다. 철종은 늘 나무꾼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서른둘의 나이로 숨을 거둔 뒤 경기 원당의 서삼릉(예릉)에 묻혔다.

강화섬 양순이도 평생 홀로 살다 죽었다. 용흥궁은 지금은 기와집이지만 원래 볼품없는 초가집이었다. 철종이 즉위한 뒤에 강화유수가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용이 승천한 궁’이라는 뜻으로 용흥궁이라 명명했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궁궐과 산성

▲ 거대한 배 모양이 일품인 성공회 강화성당. 조선의 전통한옥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절충해 지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언덕에 오르면 고려의 궁궐이 자리했던 고려궁지가 나온다.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뒤 39년 동안 사용한 궁궐과 관아가 들어섰던 공간이다.

터만 남았던 자리에 강화유수부 동헌, 외규장각, 이방청 등이 복원되어 그런대로 옛 모습을 갖추었다. 최근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이다.

외규장각 앞에 서면 남산 꼭대기에 옛 건물 같은 것이 보인다. 새로 복원한 남장대다. 고려는 항쟁을 위해 고려궁 주위로 3874자(1174m)에 해당하는 산성을 쌓은 후 사대문을 내걸고 남장대와 북장대를 설치했다.

나들길은 북문와 북장대지로 이어진다. 고려궁에서 이어진 도로를 따르면 곧바로 북문으로 이어지지만 나들길은 빙 둘러 강화향교를 구경시킨 후에 북문인 진송루(鎭松樓)에 닿는다.

북문 안으로 들어서자 호젓한 숲길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그 길을 걷고 싶지만 나들길은 북문에서 드디어 강화산성에 오른다. 복원 중인 산성길은 제법 가파르다. 15분쯤 발품을 팔아 북장대지에 오르자 통쾌한 조망이 펼쳐진다.
 
▲ 강화도령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
북쪽으로 강화의 드넓은 논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해가 흐른다. 임진강과 한강과 예성강이 어우러지는 조망이다. 그 너머로 육지가 보이니 북한 땅인 황해도 개풍군이다. 남쪽으로 강화읍과 육지와 강화 사이를 흐르는 염하가 아스라하다.

북장대지를 내려오면 오읍약수터다. 달고 시원한 약수를 들이키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약수터에서 대성리 마을로 내려오는 길은 나들길 1코스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숲길이다. 소나무·밤나무·전나무의 신록은 하늘을 푸르게 물들이고, 길섶에는 미나리아재비와 현호색이 수놓았다. 강화 읍내에서 멀지 않은 숲인데도 깊은 산 속처럼 호젓하고 한가롭다.

마을 아낙들이 수다 떨던 송학골 빨래터를 지나면 마을로 내려온다.

대월초등학교 앞에서 나들길을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1코스는 의외로 도로를 걷는 구간이 적다. 되도록 산길을 흙길을 걷게 하려는 나들길 측의 배려다. 호젓한 숲길은 월곶리까지 이어지고 드디어 연미정을 감싼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둥그런 성곽이 둘러쳐진 돈대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정자와 두 그루의 거대한 느티나무와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북녘땅 손에 잡힐 듯한 연미정

연미정(燕尾亭)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한 물이 흘러내리다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곳에 있는 정자이다. 두 강이 합쳐진 물은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 염하로 흘러든다.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아서 연미정이다. 예전에는 한강 마포나루에 갈 배들은 이곳에서 기다렸다가 만조에 맞춰 일제히 뱃머리를 움직였다고 한다. 연미정의 달맞이는 강화8경의 하나다.

정자에 서니 바람이 거세다. 코앞엔 한강 무인도 유도가 있다. 어느 여름 홍수 때 북에서 밀려온 소가 살던 곳이다. 강물과 갯벌이 뒤섞여 도도히 흐르는 한강 하구의 저편에는 북녘 땅의 산하가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이지만, 저곳은 갈 수 없는 땅이다.

바로 눈에 보이는 곳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60년을 넘게 살아왔다.

연미정을 나오면 염하 옆을 따르는 옥계방죽을 걷다가 인삼밭이 많은 용정산을 오른다. 한 농부가 삼단 같은 머리처럼 보이는 고구마 밭을 갈고 있다. “이 산은 용정리에 있어 용정산이라 이름 붙였어요.” 그는 3년 전에 귀향해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시까지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나들길 찾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조만간 휴식터를 만들어 사람들이 쉬었다가 갈 수 있도록 하겠다며 멋쩍게 웃는다. “매년 한 번만이라도 꼭 오세요. 그때마다 용정산은 조금씩 달라져 있을 겁니다.” 순박한 그의 손을 꽉 잡고 헤어졌다.

용정산을 내려오면 나들길은 염하를 따라 내려간다. 염하 앞에는 철조망이 길게 이어지고, 그 철책 안에서 군인들이 보초를 선다. 강화대교 밑을 통과하면 갑곶순교성지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자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은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면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세 분이 이곳에서 효수됐다. 성지를 나와 강화역사관에 닿으며 길고 아름다웠던 1코스 걷기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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