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스 루피? 다스 루피!”
“띠스 루피? 다스 루피!”
  •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 승인 2011.06.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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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사람 ⑩ 남인도 벵골만 마말라푸람의 노파

▲ 전형적인 남인도 드라비다족의 얼굴인 타밀나두의 노파.

파도에 휩쓸린 노파의 무심한 시선이 저물어 가는 인도양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그날도 노파는 벵골 바다, 그 푸른 고해(苦海)를 쉽사리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나마스떼!” 꺼칠한 이방인의 인사에 노파의 시선이 잠시나마 초점을 맺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흩어졌다. “나마스떼?”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금 물었으나 노파는 여전히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백사장 여기저기를 온종일 헤집고 다니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지만 노파의 굽은 허리는 망부석처럼 쉽사리 펴질 줄을 몰랐다.

마말라푸람은 남인도 최대의 도시인 첸나이에서 불과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벵골만의 작은 어촌 마을이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중앙부를 차지하는 데칸고원을 경계로 북인도 지역과 남인도 지역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기후나 지형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북인도는 서양인 체격으로 키가 크고 콧날 오뚝한 아리아족 중심의 문화가 펼쳐지고, 남인도는 원주민에 해당하는 작고 거무스름한 드라비다족 중심의 문화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인도 대륙의 놀라운 고대문명인 인더스 문명을 꽃피웠던 사람들은 본디 드라비다족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기원전 15세기경, 철기문명을 가지고 북서쪽에서 내려온 아리아족에게 밀려 데칸고원을 넘고, 오늘날의 타밀나두(Tamil Nadu)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도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그들이 남인도 지역에 세운 여러 왕조 중에서 마말라푸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인 깐치푸람(Kanchipuram)을 수도로 4세기 초에서 9세기 말에 걸쳐 번창했던 팔라바(Pallava) 왕조가 있다. 남인도는 물론 동남아 지역까지 세력을 미쳤던 팔라바 왕조가 해양기지로 사용하던 곳이 바로 ‘위대한 전사의 도시’란 뜻을 가진 마말라푸람이다.

마말라푸람에는 7세기경, 팔라바 왕조가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된 남인도 최초의 석조 사원 양식인 다섯 개의 라타(Five Rathas)와 해변사원(Shore Temple)을 비롯하여 갖가지 석굴과 조각들이 오랜 세월 벵골 바다의 짠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마을 동쪽으로 벵골 바다가 출렁거렸고, 북쪽 해변에는 작은 어선들과 어구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그곳이 한적한 어촌임을 알리고 있었다. 마을 서편으로는 석굴 사원과 돌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전망 좋은 등대 밑으로 활동사진처럼 꿈틀거리는 부조(浮彫) 속에는 히말라야에서 흘러내리는 갠지스강도 있고, 고행하는 아르주나(Arjuna, 인도 고대 힌두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바족의 왕자. 아르주나 5형제가 사촌들과의 전쟁 후 이를 참회하기 위하여 고행한다는 내용)며 팔라바 사람들의 느긋한 하루도 있었다. 힌두교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크리슈나(Krishna, 힌두신 비슈누의 아바타. 주로 목동으로 등장)는 동굴 사원 몇 개로는 속이 차지 않았던지 동산 이 구석 저 구석을 기웃거리다가, ‘크리슈나의 버터볼’이라 불리는 집채만한 바윗덩어리 하나를 아슬아슬하게 흘려놓아 오가는 사람들을 괜스레 심란하게 만들었다.

▲ 해변사원 석굴에는 아르주나 5형제의 고행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다음날도 노파는 해변 사원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벵골 바다를 아릿하도록 바라다보고 있었다. “나마스떼?” 다시금 슬그머니 흘린 인사에 뜻밖에 노파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노파의 파리한 어깨 너머로 뭍에 오르지 못해 안달인 파도가 입안 가득 허연 거품을 물고 시퍼렇게 멍든 몸을 진저리나도록 내던지며 앙알거렸다.

난디(Nandi, 파괴를 상징하는 힌두신 시바가 타는 소) 조각들이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해변사원은 이름 그대로 바닷가에 붙어 있는 사원이다. ‘모진 풍파를 겪었다’는 말은 바로 해변사원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곳은 다른 사원들과는 다르게 첨탑 모양으로 족히 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게 벵골 바다의 풍파를 맞았지만 비슈누의 고상함과 시바의 근엄함을 잃지 않았다.

다섯 개의 라타는 마을 남쪽에 있는 돌 공방들을 지나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돌을 통째로 파내고 깎아 만든 라타(바퀴가 두개 달린 작은 사당 모양으로 ‘신의 탈 것’이란 뜻임)들 또한 해변사원 못지않게 허구한 세월 벵골 바다에 시달려 노파와 적잖이 닮아 있었다. 고푸람(gopuram, 많은 신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힌두 사원 출입문 위의 높다란 탑)과 만다팜(mandapam, 많은 돌기둥을 가진 석실 모양의 사원 양식), 비마나(vimana, 본존 성소 위에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조각 탑)로 대표되는 남인도 드라비다 힌두 사원 양식의 중요한 초기 모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 뜻하지 않게 노파를 다시 만난 곳은 쓰레기로 뒤범벅된 공터에서였다. “어! 마마 여기 살아?” 몇 번의 모른 체가 미안했는지, 노파는 마른 풀섶 같은 손을 들어 아는 표시를 했다. “여기가 마마 집이야?” 손가락질을 보고 눈치 챘는지,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 몇 개에 갈대 이엉을 대강 엮어 얹은,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민망한 움집이었다. 집안 세간이라고는 노파만큼이나 시꺼멓게 그을리고 찌그러진 그릇 몇 개와 나무와 끈으로 얼기설기 묶어 만든 고단한 잠자리가 전부였다.

“여기서, 마마 혼자 살아?” 손가락 하나를 펴보이자 노파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집안의 어둠에 차차 익숙해지자 초라한 앉은뱅이 상 하나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고, 그 위에 손때 반들반들한 빛바랜 사진 석 장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야? 마마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 무심코 던진 질문에 노파는 깡마른 볼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꺼억꺼억 아픈 소리를 토해 냈다.

▲ 마말라푸람의 해변사원.

2004년 말,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 북방에서 발생한 금세기 최대의 지진은 거대한 쓰나미를 일으켰고, 벵골만 연안 국가들의 해안에서 집과 인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쓸어갔다. 바닷가 어촌이 많은 타밀나두 지역 역시, 최악의 피해를 입은 곳 중의 하나였다. 노파는 젊어서 벵골 바다에 어부인 남편을 잃었고, 지난번 쓰나미에 유일한 피붙이였던 아들, 며느리, 손자를 또다시 잃었다.

“배고프다, 마마. 수박이나 먹자.” 큼지막한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와서 손사래 치는 노파에게 막무가내로 들이밀었다. 수박 한 조각 쪼개질 때마다 노파를 눅눅하게 적시고 있던 슬픔도 한 조각씩 사라졌고, 달짝지근한 미소가 입속에서 아삭하게 씹혔다. 그렇게 잠시나마 슬픔을 씹어 넘기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노파가 수박을 가리키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물었다. 아마도 얼마를 주었느냐 묻는가 싶어, 짐작으로 대답했다.

“띠스 루피”(tis Rupee, 30루피로 한화 700원 상당) 의기양양한 대답에 노파는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다가, 등짝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다스 루피, 다스 루피!”(das Rupee, 10루피) 우리의 대화는 바가지를 쓴 못난 아들과 이를 나무라는 어머니의 새콤한 잔소리였다. 노파와의 만남은 그렇게 서너 번 더 이어졌고, 그때마다 벵골 바다의 파도는 해변사원 앞에서 잔잔하게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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