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의 혼이 깃들어 있는 거처
신라인의 혼이 깃들어 있는 거처
  • 글·김성중 기자 | 사진·염동우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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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PARK TRAVEL 01 남산 문화유산 트레킹

▲ 상선암 위에 위치한 마애석가여래좌상에서 신라의 혼이 가슴 속까지 느껴진다. 남산은 문화유적으로 가득한 서라벌의 진산이다.

산 전체가 노천 박물관…트레킹과 문화유적 탐방 코스로 인기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는 남산은 금오산(金鰲山, 468m)과 고위산(高位山, 494m)을 비롯하여 창산, 앞산 등으로 이루어진 산인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 부른다. 유독 태양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일 수 있는 남쪽에 살기 좋아하던 선조들이 북산도 서산도 아닌 남산이라 부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신라인의 신앙이 이러하니 알에서 태어난 아이를 시조로 삼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혁거세(赫居世)라 부른 것은 아닐까.

남산은 동서로 약 4km, 남북으로 약 8km로 산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절은 하늘에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 떼처럼 솟아 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될 정도로 수많은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여러 전설들과 설화들이 깃들어 있다. 무엇보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어 많은 사찰과 탑이 건립되었고 현재에도 그 흔적들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에 남산지구가 포함된 것이다.

남산의 참맛은 바로 그 흔적들을 따라 걸으며 감상하는 것이다. 코스도 다양해서 서울의 북한산, 관악산에 버금갈 정도다. 대표적 문화유적 트레킹 코스인 포석정~금오산~삼릉 코스를 따라 신라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가봤다.

▲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오늘날까지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선조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 천년의 끝을 장식한 포석정에서 산행 시작
남산은 신라 천년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유적지가 함께 있는 상징적인 산이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이 발견되었다는 나정(蘿井)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죽었다는 포석정(鮑石亭)이 그것이다. 둘의 거리는 불과 1km. 천년의 시간이 찰나의 거리에 있다니. 해가 뜨고 지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우주에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부처의 깨달음을 닮은 듯 하다. 천년의 역사가 끝난 곳, 포석정을 이번 트레킹의 들머리로 잡았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포석정(사적 제1호)은 학창시절 경주에 수학여행 왔을 때 구경한 이후로 처음이다. 포석정은 역대 왕들이 수로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 읊고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하지만 제사에 쓰이는 제기류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현재는 사당이나 제사장의 기능을 하던 곳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그런 점에 미루어 볼 때 경애왕이 이곳에서 단지 여흥을 즐기다가 견훤의 군대에 습격을 받고 죽었다는 전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역사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패자에 대한 기록은 왜곡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 있는 것은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게 만든다.

▲ 자연 그대로의 돌에 섬세하게 새겨진 마애불좌상.
남산. 그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산이지만, 저 속에 천년의 세월이 숨쉬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일찍이 평생을 경주와 남산에 대해 연구했던 ‘살아있는 신라인’ 고(故) 윤경렬 선생은 “경주 남산은 큰 산도 아니요, 그렇게 경치 좋은 산도 아니지만, 우리 겨레가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산”이라 말했다. 남산에 신라인의 혼이, 불교의 역사가, 그리고 예술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포석정에서 우측으로 등산로가 나있었다. 경주의 대표적인 산인 만큼 남산에는 등산로가 수십 갈래다. 남산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지도 지참은 필수고, 산에 오르기 전에 남산에 대한 사전지식도 갖추면 금상첨화다. 그래도 포석정에서 금오산에 오르는 길은 차 한대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잘 나있어 어렵지 않았다.

길을 따라 500m 정도 오르자 왼쪽으로 소로가 보였다. 길을 따라 올라가자 조그만 바위에 마애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95호)이 새겨져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이 불상은 비록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로 조각된 것이지만, 그저 바위에 이름이나 새기는 차원이 아닌, 구도자의 마음을 예술로 승화시켜 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불상 앞에서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잠시 참선의 세계로 빠져보았다.

▲ 수십 그루의 벚꽃으로 둘러싸인 부흥사.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두릅나무에 가린 신라의 영광
마애불좌상에서 큰 길로 나와 지도를 펴보았다. 위치상으론 500m만 더 가면 상실사가 있던 터가 나온다. 불교 성지인 남산에서도 ‘제일 큰집’이라는 뜻의 ‘윗 상(上)’자에 ‘집 실(室)’자를 썼을 정도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안됐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내판이 없었다. 보이는 것은 싹이 난 두릅나무와 복숭아나무가 빼곡한 밭만 보일 뿐이었다. 마침 그곳에서 밭을 일구던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 상실사지가 어딘가요?”

“무슨 일 때문에 오신거요? 이제 그만 좀 오시오.”

냉정한 할아버지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만 남산을 찾은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나니 할아버지의 인상이 조금은 풀렸다.

“비록 남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긴 했으나 사유지인 곳이 대부분이지요. 여기도 마찬가지로 사유지에요. 저도 태어날 적부터 이곳에서 밭을 일구고 농사일 하는 농사꾼인데, 유물이 발견되기만 하면 제대로 밭을 일굴 수도 없지요. 저기 보이는 돌들이 예전에 상실사가 있던 곳입니다. 왜적이 침입했을 때 스님들이 이곳에서 장창지로 식량과 사적들을 옮겼다고 하더군요. 왜적들이 불태워서 지금은 이렇게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여기가 주춧돌로 추정되는 곳이고, 여기는 절 주위의 담장 부근이고….”

▲ 조망이 빼어난 늠비봉 5층석탑. 두 팔 벌려 숨을 들이마시노라니 옛 신라인들의 혼이 가슴 깊이 들어오는 듯 하다.

할아버지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남산은 어디든 땅 파면 유적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남산 대부분이 사유지라 하니 그들의 삶의 터전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유적만 파해 쳐서 휑하니 그냥 둘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복원이나 보관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살 수 있게 터전이라도 마련해 주는 것이라오. 그저 이곳에 유적이 있다고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등산객들이 어찌나 밭을 훼손하는지 수확량의 반도 거두질 못하고 있어요.”

화려하게 꽃을 피운 복숭아나무도 싹을 틔운 두릅나무도 할아버지의 한탄 섞인 넋두리에 빛이 바래는 듯 했다.

경주 남산은 500m도 채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문화유산들이 구석구석 보석처럼 박혀 있다. 신라의 역사는 천년으로 끝났어도 이런 흔적은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당시의 온기를 느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늠비봉에 올라 신라인의 혼을 느끼고 벚꽃 향기에 젖어든 아늑한 부흥사에서 천년 역사를 되짚어 본다.

가슴 깊이 밀려오는 구도자의 혼

▲ 문화유산 답사와 트레킹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남산. 운치도 아주 뛰어나다.
상실사지에서 다시 200m 정도 내려와 솔향기 깊게 밴 오솔길을 따라 부흥사로 향했다. 부흥사에 가기 전 넓은 연꽃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않아 있는 마애불좌상을 볼 수 있었다.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들과 불상을 만들던 구도자의 모습이 연상되어서일까. 이상하게도 불상을 볼 때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들을 위해 단상에 놓여 있던 향을 하나 피워 올렸다.

산기슭으로 들어가니 등산로가 여기저기 수십 갈래로 나뉘어졌다. 길이 좋아 가다보면 이름모를 묘지가 불쑥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국립공원을 다니면서 가장 많이 보는 것 같았다. 가히 공동묘지 수준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부흥사는 너무나 고요했다. 그저 산 속에 자리한 아담한 정취를 가진 정자 같았다. 수십 그루의 벚꽃에 둘러싸인 부흥사에서 고개를 들어 늠비봉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뾰족하게 솟아 있는 늠비봉5층석탑이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저기서 바라보는 서라벌의 들판은 또 얼마나 멋있겠는가.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늠비봉에 다다르니 부흥사에서 보았던 5층석탑이 코앞이다. 늠비봉에 올라서서 서라벌의 너른 들판을 감상하는 것이 일품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특히 늠름하게 솟아 있는 석탑을 뒤로 하고 경주시내를 바라보니 막힌 가슴까지 확 트이는 듯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달맞이가 아주 일품이라 한다. 언제고 다음에 남산을 찾을 때는 달빛 가득한 밤에 오르리라.

늠비봉5층석탑은 2002년에 복원한 것으로 주위에는 원래 석탑의 유적들을 그대로 진열해 놓고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곳이 옛 부흥사의 터였다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경주 문화재연구소에 물어보니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석탑 주위에는 이름 모를 봉분 몇 개가 있었는데, 경주시청 문화예술과에서 설치한 ‘묘의 주인을 찾는다’는 푯말이 꽂혀 있었다. 석탑과 관련된 유물이 더 있을 것으로 짐작해 묘를 이전시킬 계획인 것이다.

▲ 7m 높이의 마애석가여래좌상 아래에 자리 잡은 아담한 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에 시주하러 온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늠비봉에서 금오산까지는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중간에 전망 좋은 곳에 금오정이란 정자가 나왔다. 이곳에서 경주 시민 몇 명은 술 한 잔씩 기울이고 있었고, 부부가 함께 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남산은 경주 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기도 하고 쉼터가 되기도 하는 그런 산이었다. 느긋하게 걸어서 그런지 포석정에서 두 시간이 걸려서야 금오산에 올랐다.

금오산 정상은 나무에 가려 전망이 썩 좋지는 않았다. 금오산은 높이도 고위산보다 조금 낮다. 하지만 남산에서 가장 높다는 고위산보다도 황금빛 거북이 등 모양이라는 금오산이 더 정상에 어울리는 것은 이곳이 지도상에서 보면 남산의 중심이고 등산객들에게는 산행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남산 용장사에 머물며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 역시 금오산에서 이름을 빌려왔다고 한다. 이러한데 굳이 정상을 높이로만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산의 정상이란 높이가 아닌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 빼곡히 자라고 있는 소나무 숲 한가운데에 자리한 삼릉. 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그리고 제54대 경명왕이 잠들어 있다.

문화유적으로 가득한 삼릉계곡
▲ 석조여래좌상은 비록 머리와 팔이 없지만,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해서 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산 코스 중 가장 많은 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는 삼릉계곡으로 내려갔다. 삼릉계곡은 골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이라고도 부른다. 등산로 양 옆으로 빼곡히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멋진 그늘이 되어 더위를 식혀줬다.

옛날 신라인들은 남산을 불국의 산, 신성한 영산이라 여기며 살았다. 삼릉계곡으로 내려가며 볼 수 있는 불상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상선암 위에 위치한 마애석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은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준 불상이었다.

사진 속에서나 보았던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직접 보니 높이가 7m에 달할 정도로 웅장하고 바위 절벽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상선암에서 가까워서인지 산행이나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시주한 쌀, 사과, 배 등이 불전함에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불상 앞에서 합장하며 가족들과 그리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주 배리의 들판 풍경에 가슴이 확 트였다.

상선암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석불좌상(보물 제666호)은 아쉽게도 보수 중이라 볼 수 없었다. 대신 보수하기 전의 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불상의 코가 훼손되어 있었다. 불상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이 불상도 코가 크게 손상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불상들이 이 속설 때문에 크게 훼손됐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을 새긴 선각육존불.
머리와 팔이 없는 불상인 석조여래좌상도 특이했다.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발견된 이 불상은 비록 머리와 팔이 없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 주름이 유려하여 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석가삼존과 아미타삼존을 새긴 선각육존불(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21호)도 놓칠 수 없는 유적이었다.

길 끝에는 삼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그리고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는 삼릉은 무엇보다 빽빽하게 둘러싼 소나무 숲과의 조화가 으뜸이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주는 아늑함과 청량함, 그리고 간간히 불어오는 솔향기 가득한 내음에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삼릉 숲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안개가 자주 끼는 봄과 가을에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귀띔해주었다. 안개가 자욱한 솔숲이라….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산수화 한 폭이 저절로 그려졌다.

신라의 역사는 천년으로 끝이 났지만, 남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은 여전히 신라인의 혼이 살아 숨쉬는 듯 느껴졌다. 남산을 떠나온 지금도 귓가에는 불상을 새기던 구도자의 망치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하다. 그대여, 신라를 알고 싶으면 경주로, 신라인의 혼을 느끼려면 남산으로 가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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