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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아오라키와 키쓰 : 바람처럼 떠나는 마음에 대하여
뉴질랜드 아오라키와 키쓰 : 바람처럼 떠나는 마음에 대하여
  •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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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오라키의 나들목인 테카포 호수는 믿어지지 않는 옥색 물결로 넘실거린다.
시린 빙하 물에 손을 담그며 그가 조금은 남루해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아오라키(Aoraki, 3754m)의 자태가 무척이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저도 언젠가는 저 아오라키가 그토록 닮았다는 네팔의 신산(神山)을 꼭 보고 싶습니다.

” 후커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 조각이 마치 십자가처럼 호수 위에 떠있어 묘한 신비감마저 감돌았다. “미련 없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오라키 정상 부근에서는 거센 눈보라를 일으켰던 바람이 소리 없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뉴질랜드 남섬의 서해안 타스만 바다를 따라 남북으로 뉴질랜드 자연미의 걸작인 남알프스(Southern Alps) 산맥이 뻗어 있다. 아오라키는 그 산맥의 중앙부에서 구름을 뚫고 치솟아 있다. 높이로 따지자면 대양주에서 파푸아뉴기니의 칼스텐츠(Carlstensz, 4884m) 다음이지만 웅장하기로 보나 수려하기로 보나 아오라키는 대양주의 최고봉으로 군림하고 있다.

200여 전, 세 차례에 걸쳐 태평양을 탐험했고 뉴질랜드와 호주를 탐사하여 영국령으로 만든 쿡(James Cook) 선장이 있었다. 그가 이 산을 바라보며 항해했다고 하여 백인들은 쿡 산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쿡 선장보다 천 년은 앞서 남태평양의 타이티(Tahiti) 지역에서 건너와 살았던 선주민들이 있었다.

마오리(Maori)가 그들이다. 마오리들은 조상 대대로 쿡 산을 아오라키라 부르며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아오라키는 ‘구름을 뚫고 서 있는 존재, 혹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 같은 존재’라는 뜻이며 마오리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조상이다. 우리로 치자면 단군왕검이 내려온 백두산에 해당한다. 마오리 신화에 따르면 아오라키의 탄생은 꽤나 길고도 복잡하다.

태초에 세상은 어둠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상의 처음을 알리는 빛이 생겼다. 그런 빛의 영향으로 창조의 어머니인 ‘공(空, void)’이 생겼고, 다시 ‘공’에서 ‘습기’가 나왔다. ‘습기’는 새벽에서 자라난 ‘구름’과 짝을 맺어 ‘하늘’인 라키(Raki)를 낳는다.
 
이 라키가 어둠 속에서 잉태된 ‘생명의 숨결’과 연을 맺어 마침내 라키 2세 즉, 아오라키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지금의 뉴질랜드 땅, 아오테아로아(Aotearoa)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인 아버지 라키는 다시금 아오라키의 새어머니가 되는 ‘대지’와 혼인했고, 그녀와 상견례를 위해 아오라키를 포함한 하늘의 아들 넷이 카누를 타고 타스만 바다에 내려왔다. 하지만 항해술이 부족했던지 그들은 새어머니인 대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 뉴질랜드 아오라키를 오르면서 만난 키쓰.
그들이 끝내 새어머니 찾기를 포기하고 하늘로 되돌아가려던 찰나, 실수로 카누가 뒤집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뒤집힌 카누가 지금의 뉴질랜드 남섬이다. 카누가 뒤집힐 때 모루 눕는 바람에 남섬의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 지형이 형성되었다. 아오라키와 형제들은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고 서쪽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산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마오리들에게 성스러운 조상으로 추앙받으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치솟아 있다.
 
시절은 분명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아오라키에서는 매일같이 눈이 쏟아져 내렸다. 포성처럼 들리는 눈사태 소리만이 빙하 계곡을 따라 산마루 이곳저곳으로 줄달음쳤다. 그새 사흘이 지났지만 아오라키는 짙은 눈구름 속에 얼굴을 파묻고 어렵사리 찾아온 손님들을 쌀쌀맞게 되돌려 보냈다. 아오라키 마을 뒷산 올리비에(1917m)의 등성이에 자리한 뮐러산장(1768m)에 오르면 혹시나 뭔가 보일까 싶어 무리해 올라왔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격인 DOC(Department of Conservation) 아오라키 방문자 센터에서 지루하게 일기예보를 지켜보고 있다가 눈발이 조금 가늘어진 틈을 타서 가파른 경사와 두껍게 쌓인 눈을 헤치고 어렵사리 산장에 올랐다. 하지만 날씨는 삽시간에 다시금 거칠어졌다.

손발이 얼어붙는 추위와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는 눈보라 속에서 곧바로 탈출을 시도해야만 했다. 뉴질랜드의 북섬에서 왔다는 키쓰(Keath)를 만난 것은 바로 그 탈출로에서였다. 뮐러 산장과 아래쪽에 자리한 씰리 탄(Sealy Tarns)의 중간쯤에서 키쓰는 순식간에 쏟아진 엄청난 폭설 때문에 더는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파묻히는 눈 속에서 그는 오도 가도 못하고 당황한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아니, 이 친구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 날씨에 여기까지 올라와서 이러고 앉아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죽자는 거야 살자는 거야.” 피차일반인 처지였지만 무모한 것인지 용감한 것이지 여하튼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저체온증이 시작되었는지 그는 제대로 입조차 떼지 못했다. 황급히 눈을 녹여 뜨거운 물을 끓여 먹이고 젖은 장갑과 양말을 벗기고 여분의 옷으로 감싸 체온을 높여주었다.

▲ 뮐러 산장으로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뮐러 빙하.
3000m가 넘는 고봉들을 18개나 거느린 아오라키는 남섬의 동서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타스만 바다를 마주한 서쪽은 험준한 급경사 지역이다. 공룡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특이한 온대 강우림이 만년설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프란츠 조셉과 폭스 빙하가 바다와 어울려 남반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반면에 동쪽은 다소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테카포 호수의 믿어지지 않는 옥색 물결과 아오라키 형제들의 눈부신 설산은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테카포 호수를 따라 아오라키로 들어가면 우선 오른쪽에서 대양주 최대의 타스만 빙하가 흘러 내려온다. 다시 안쪽에 자리한 아오라키 마을을 지나면 왼쪽에서는 뮐러 빙하가, 가운데에서는 후커 빙하가 흘러 내려온다. 마오리들이 성수로 여기는 물길을 따라 가장 안쪽인 후커 계곡에 들어서면 감히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장관이 펼쳐진다.




천지간은 설산의 은백에 갇히고, 시간이 멈춘 빙하는 후커 호수로 거목처럼 쓰러져 내린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쎄프톤(Sefton, 3,151m)과 풋스툴(Footstool, 2,764m)의 웅장함과 아오라키 형제들의 당당함이 하나의 거대한 떨림으로 밀려온다.

뮐러산장에서 탈출한 이틀 후, 마침내 아오라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몸을 좀 추슬렀는지 코플랜드(Copland pass) 루트의 초입을 찾아가는 산행에 키쓰도 따라나섰다.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올랐다는 힐러리도 저 아오라키를 오르면서 준비했다면서요? 그런데 나는 뮐러 산장도 오르지 못하고 죽을 뻔 했으니….”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여름 햇살을 마구 쏟아내어 계곡은 금시에 봄이 되어버렸다.
 
▲ 아오라키 마을에 자리한 힐러리 기념관.
“어쩌자고 우리는 날마다 어딘가에 오르려 하고 어딘가로 떠나려 하는 것일까요? 막상 꿈꾸듯 찾아가면 차가운 현실만이 아프게 다가오는데. 그래서 또다시 무엇인가를 찾아 어딘가를 오르고, 어디론가 떠나고….” 이틀 동안 몸조리하면서 무슨 생각을 그리도 많이 했는지 그는 혼자서 이것저것 부지런히 주워 담았다.

“이제야 조금은 어렴풋이 ‘바람처럼 떠난다’는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람처럼 몸이 떠난다는 말이 아니라, 바람처럼 마음이 떠난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키쓰의 말에 뒷귀먹은 사람이 되어 아오라키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네팔의 성산 마차푸차레(6993m)에 붙여진 물고기 꼬리(Fish tail)라는 별명은 바다를 바라보는 마오리의 성산 아오라키가 훨씬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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