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의 섬에 내리는 함박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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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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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사람 ⑫ 필리핀 거리의 안마사 챠리티 가족

▲ 챠리티 가족. 왼쪽으로 챠리티, 노모, 딸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말마따나 눈이라도 실컷 맞아 보았으면 좋겠어요.” 챠리티의 후덥지근한 넋두리가 숙소로 돌아가려는 이방인의 발목을 끈적끈적하게 휘감았다. 족히 백 살은 넘어 보이는 맞은편 성당에서는 사치스러운 결혼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손에 든 꽃바구니만큼이나 앙증맞게 차려입은 화동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학생들로 보이는 고적대까지 동원되어 팡파르를 울려댔다. 크리스티나는 아예 성당 앞에 진을 치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크리스티나 저녁은 먹였어요?” 챠리티는 대답하기 싫은 듯,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재울 곳도 없으면서, 어쩌자고 애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요? 한데서 재우려면 애 저녁이라도 좀 먹이든지.” 이방인의 괜한 신경질이 결혼식 축하연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불꽃놀이 속에서 초라하게 버둥거렸다.

1521년, 페르디난트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최초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에 도착했다. 그로인해 16세기 일찌감치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하에 놓였다. 그런데 이들보다 2000년 앞서 남중국해를 건너 필리핀에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말레이계의 이고로트(Igorot)족이 그들이다.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그들은 평야지대에 정착한 선주민들의 텃세에 밀려 루손(Luzon)섬 북부 코르디예라 중앙 산맥(Cordillera Central) 깊숙이 숨어들었다. 해발고도 1500여 미터를 넘나드는 산비탈에 돌을 쌓고 흙을 퍼 담아 다랑논들을 만들었다. 그들의 전설대로 천상의 신 카브냔(Kabunyan)이 지상으로 밟고 내려온 계단을 만든 것이었다. 그 다랑논들의 절정이 바타드(Batad)란 산간 마을에 있고, 그것을 쌓아올린 이들이 이고로트의 이푸가오(Ifugao) 부족이다.

챠리티는 거리의 안마사였고, 그녀의 친구 코라손은 거리의 손발톱 관리사였다. 마닐라 시내 말라테에 있는 분수 공원이 그녀들의 일터였다. 그녀들은 저녁나절 더위를 식히러 나온 관광객들을 손님으로 맞아 안마와 손발톱 관리를 해주고, 100페소(100페소는 한화 2천 원 상당)에서 200페소 정도의 돈을 받았다. 물론, 필리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녀들이 손님을 받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분수 공원 벤치가 그녀들의 직장이었고, 잠자리였다. 사실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한때 일본 오키나와의 카테나(嘉手納) 미군 기지에서 밴드로 일했다는 코라손은 영어는 물론 일본어까지 아주 그럴싸하게 구사했다.

▲ 바타드 마을 풍경.

“전 남편은 필리핀계 미군이었어요.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지요. 처음에는 좋아 죽고 못 살다가 서로의 속내를 알아가면서 차차 시들해지고…. 게다가 그 인간은 주정뱅이였어요. 그래서 걷어치웠지요.” 나이만큼이나 걸쭉한 코라손의 입심은 심심한 분수 공원 사람들의 짭짤한 안줏거리였다. 코라손과는 달리 다소 어눌하고 수더분한 챠리티였지만, 그녀 역시 만만치 않은 세상을 겪은 처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 얼굴 한 번 못 보고 자랐어요. 지지리도 없는 사람들의 삶이란,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지요.” 그녀는 짐보따리에서 작은 사진첩 하나를 꺼내 보여주며 이리저리 아픔을 뒤척였다. “2년 전에 남편을 폐암으로 잃었는데, 지금은 엄마가 또다시 유방암이에요.”

바타드의 들머리인 바나우에(Banaue)는 마닐라에서 차로 9시간 거리에 있었다. 바나우에를 출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트레킹 삼아 구름 속을 대여섯 시간 걷자 바타드가 핼쑥한 얼굴을 내밀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7개의 작은 마을들을 로마시대의 거대한 원형극장을 방불케 하는 다랑논들이 첩첩이 둘러싸고 있었다. 사실, 계단식 경작지는 세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더욱이 농경을 주로 하는 우리네에게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바타드는 그 정도가 좀 심했다. 이푸가오 사람들은 경사가 60~70도나 되는 산등성이에 3평을 쌓아야 1평을 얻는 다랑논들을 2000년 동안이나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쌓아올린 다랑논들을 지키고, 풍요와 다산을 위해 경쟁자들인 본톡(Bontoc)족, 칼링가(Kalinga)족과 머리를 걸고(Head-hunting)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 외부 사람들로부터 야만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다.

이푸가오족들의 전통가옥은 원두막 비슷한 고상 가옥으로 숙식하는 집, 쌀을 보관하는 집, 그리고 쌀 신을 섬기는 집, 이렇게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집들 십여 가구 내외가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고, 촌장이자 토속신앙 성직자격인 뭄바키(mumbaki)를 중심으로 생활이 영위되었다. 하지만 바타드의 이푸가오 공동체는 급속히 붕괴하고 있었다. 이방인과의 쌀 술 한 잔에, 늙고 병든 뭄바키의 한탄이 논두렁만큼이나 길게 이어졌다.

“한철 먹기도 부족한 논농사에 어디 젊은 것들이 붙어 있어야지. 모두가 대처로 떠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도 가이드니 뭐니 관광객들 등쳐먹을 생각이나 하지 논에 손 한번 담글 생각을 하지 않으니, 우리네 늙은이들 죽으면 머지않아 이곳도 빈껍데기만 남을 것이야.”

▲ 바타드의 전통 고상 가옥과 이푸가오 소녀.

마닐라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집이 있어 1주일에 한 번 퇴근하는 코라손과는 달리, 시내 변두리에 집이 있는 챠리티는 매일같이 저녁나절 출근하고 아침나절 퇴근했다. 챠리티의 집은 분수 공원에서 지프니(Jeepney, 지프차나 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필리핀의 대중교통 수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져 있었다. 마닐라의 여느 빈민가와 마찬가지로 코딱지만한 판잣집들이 닥지닥지 늘어서 있고, 갈 곳 없는 하수들이 좁은 골목길을 질펀하게 채운 그런 동네였다. 챠리티는 두 평 남짓한 집에서 노모와 딸 크리스티나, 그리고 정상이 아닌 오빠 한 명을 부양하고 있었다. 그들은 식구들이 한꺼번에 누울 자리가 없어 널빤지를 2층으로 매달아 잠자리로 사용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더니, 정말로 그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밥 할 쌀도, 땔감도, 푸성귀는 고사하고 양념 한 가지, 기름 한 방울도 없었다. “크리스티나, 우리 같이 시장 보러 가지 않을래? 거기 가서 쌀도 사고 고기도 사서, 오늘 우리 한 번 할머니랑 실컷 먹어 보자.” 노모는 투병에 지쳤는지 통 표정이 없었다. 이따금 꼬질꼬질한 천 쪼가리로 도려낸 젖가슴에서 흘러내리는 농을 찍어낼 뿐이었다.

“엄마 소독약도 사야하고, 마실 물도 사야 하는데….” 챠리티는 몇 푼 도와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실컷 배가 부른 후에 크리스티나에게 물었다. “크리스티나, 할머니랑 사진 찍어줄까?" 노모의 얼굴에 순간 실낱같은 미소가 지나갔고, 어린 천사 크리스티나는 이웃집 사람들마다 불러 모아 사진을 찍어 주라고 졸라댔다. “이곳 사람들에게 사진 찍는 것은 아주 특별한 행사이지요. 사진관에는 갈 엄두도 못 내고, 살 날조차 얼마 남지 않은 엄마에게는 더더구나 그렇고요.”

바타드에 다녀온 후, 분수 공원에서 챠리티를 다시 만났을 때 크리스티나도 따라와 있었다. “하도 답답해하기에 데리고 왔어요.” 저녁을 먹으며 크리스티나에게 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내밀었다. 눈물까지 핑 돈 크리스티나가 와락 목을 껴안고 볼을 비벼대며 환호성을 질렀다. “녀석, 그렇게 좋은가. 고마워요, 이렇게 현상까지 해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오늘 밤에는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흰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함박눈으로요.” 챠리티의 넋두리가 어린아이처럼 분수대에서 첨벙거렸다. 그날 밤, 밤새도록 분수 공원에 눈이 내렸고, 공원 벤치 위에 곤하게 잠들어 있는 챠리티와 크리스티나 모녀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안광태 | 40대 초반의 여행작가 안광태 씨는 돌아올 기약 없이 수년째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는 바람처럼 세계 구석구석을 다니며 유명 관광지보다는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납니다. 본지는 안광태 씨가 보내준 각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 생활양식이 녹아있는 흥미로운 인간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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