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판 것은 장비가 아니라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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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웃도어뉴스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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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등산장비점 집중탐구|남대문 VS 동대문- ① 역사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은 한국 등산장비점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1950년대 군용장비를 취급하던 난전시대부터 현재 춘추전국시대까지. 반세기 동안 두 시장은 등산 용품을 만들고 팔면서 국내 등산 장비를 발전시켰다. 최근 전국 곳곳에 등산장비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두 시장의 명성은 예전만 못하지만, 우리는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두 시장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며 한국 등산장비점이 걸어 온 길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1970~80년대 전성기…90년대 들어서 주춤

조선시대부터 서민들의 생계를 책임진 서울의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지금이야 대형마트나 온갖 편의시설이 넘쳐나면서 재래시장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은 여전히 온갖 생필품이 넘쳐나는 만물장터다. 등산용품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등산문화와 역사를 함께하는 두 시장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은 대한민국 등산장비점의 메카다. 한때는 지방의 산꾼들이 등산장비 사겠다고 돈을 모아 상경해 이곳을 들렀다.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만큼 다양한 등산용품을 거래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에서는 미군들이 사용하던 군수물품이 많이 거래됐다. 텐트며 배낭, 버너, 코펠…. 등산장비가 변변치 않던 그 시절에 군수물품은 훌륭한 장비였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났다. 지금은 지방 어딜 가나 등산장비점이 널려있고, 인터넷에서도 최고급 수입 제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은 여전히 대한민국 등산장비점의 메카로 남아있다. 오랜 세월 동안 두 시장은 한국 등산장비점의 역사를 이끌어온 것이다.

400년 역사를 간직한 남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의 역사는 17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동미나 포·전의 출납을 맡아보던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 자리에 생기면서 지방의 특산물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그 후 시장은 일제강점기 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친일파 송병준이 1911년 남창동 일대에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정식으로 시장이 열린다.

시장이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시기는 6·25전쟁 이후부터다. 당시 이북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이곳에 터를 잡고 각종 물품과 미군의 군용 원조물자를 거래하면서 시장은 활성화됐다. 남대문 시장에서 등산용품이 거래되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 즈음이다. 변변한 등산 장비가 없었던 시기에 미군이 사용하던 텐트며 침낭·버너 등은 산을 좋아하는 산꾼들이 탐내는 물건이었다.

남대문 시장 골목 안, 남창동 30번지에서 군수물품을 팔던 상인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1965년 황보현 씨가 최초로 <신진산악센터>를 열었고, 이후 <남문산악> <백운산장> <한영사> 등이 앞 다투어 생겨났다.

남창동 30번지 일대 등산장비점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군수물품을 그대로 내놓거나 약간 개조만 해서 판매했다. 전국에서 몰려든 산꾼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던 군수물품이 동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다. 이때부터 장비점들은 기존의 버너나 코펠 등의 제품을 모방해 판매하거나 외국에서 보따리로 들여온 소량의 장비들을 취급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캠핑용품 대세
남대문 시장의 등산장비점 골목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남창동 30번지 일대에만 형성되었던 장비점들이 300m 정도 떨어진 퇴계로에도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코오롱스포츠>가 1977년 자리를 잡았고, 이후 <알프스산악> <유명레저> <동양산악> <삼성레저> 등이 퇴계로에 터를 잡았다. 남대문 시장 최초로 등산장비점을 연 <신진산악센터>도 이 시기에 남창동 30번지에서 퇴계로로 매장을 이전하면서 <아리랑산맥>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 시기에 남대문 시장의 등산장비점은 남창동 30번지 일대 10여 개, 퇴계로에 10여 개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전성기는 19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이어진다. 당시 주거래 품목은 캠핌용품. 1986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 이후 캠핑문화가 확산되고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가족단위의 캠퍼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당연히 캠핑용품이 날개 달린 듯 판매됐고 등산장비점의 매출은 급상승했다.

1980년대 남창동 30번지에는 등산장비점 10여 개가 성업중이었다. <남문산악> <새마을> <금강> <마운틴스포츠> <영진산악> <한영사> 등 1세대 등산장비점들이 자체 브랜드를 판매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90년 대 이후 이들 매장수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캠핑야영 금지가 본격화 되고 외곽에 등산장비점들이 생기면서 남대문 시장의 메리트가 사라진 것이다.

남창동 30번지 일대의 상권은 퇴계로와 남대문로로 옮겨갔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남대문로에 등산장비점이 서너 곳 들어서면서 새로운 등산장비점 골목이 탄생한다. 또한 회현역 지하상가에도 수입 브랜드를 취급하는 장비점들이 들어선다. 당시만 해도 고가의 수입 제품을 구하기 힘들어 회현역 지하상가의 등산장비점들은 전국에서 찾아드는 산꾼들로 늘 북적였다. 그러나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남대문 시장의 호황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춤해졌다.

<유명레저>의 김태서 사장은 당시의 악화된 시장 상황이 많은 장비점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1990년대부터 산에서 취사가 금지되고 IMF가 터지면서 등산장비점들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더 이상 캠핑용품이 팔리지 않았죠. 이 시기에 국내 브랜드들이 속속 생기고 수입 브랜드들이 많이 거래되면서 등산용품의 인기가 의류로 옮겨갔습니다. 더군다나 2000년대부터는 변두리나 산 아래에 등산장비점들이 많이 생겨 남대문 시장이 불황기로 접어들었죠..”

현재 남대문 시장 인근의 등산장비점은 총 18개다.
회현역 인근 퇴계로의 <유명레저> <몽벨> <코오롱스포츠> <에코로바> <아리랑산맥> <마운틴> <네파> <네파> 상설매장, <알프스산악> <동양산악>, 한국은행 옆 남대문로의 <블랙야크> <밀레> <에코로바> <맥킨리>, 회현역 지하상가에 있는 <산수산장> <에픽마운틴> <사가르마타> <창가방>이 그것이다.

군용장비로 시작한 동대문 등산장비점
서울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은 누가 뭐래도 동대문 시장이다. 18세기부터 동대문에 큰 시장이 있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 배우개장으로 불리다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광장시장으로 개장했다. 이후 광장시장 주변으로 상가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동대문 시장은 종로5가에서 6가에 이르는 넓은 시장을 형성한다.

동대문 시장에 장비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전부터 서울 상권의 중심이었던 동대문에는 평화시장이나 광장시장 등이 있었는데 당시 활성화됐던 이들 시장은 임대료가 비쌌다. 등산장비점들은 상권이 활성화된 동대문 시장 중심지에서 벗어나 임대료가 저렴한 종로5가와 청계5가 사이에 터를 잡는다. 현재 동대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장비점은 1969년에 생긴 <종로산악>이다. 지금도 이수강(69) 여사가 아들 이홍건 점장을 도와 일을 하고 있다. 당시 <종로산악>은 남대문의 여느 장비점과 마찬가지로 군용장비로 시작해 점차 텐트·침낭 등 캠핑 용품을 판매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문 등산장비를 취급하는 매장으로 변화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장비점들이 도매와 소매를 같이 했어요. <동진레저> <청산산방>은 자체 브랜드를 가지고 크게 성공했죠. 당시 <동진레저>의 사장이던 강태선 씨가 그 때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지금의 <블랙야크>라는 브랜드를 탄생시켰으니까요. <청산산방>도 <다나>라는 우모 장비 브랜드를 만들었고, <코베아>의 김동숙 사장도 사실 동대문 시장과 노량진 부근에서 일을 배워서 지금 최고의 캠핑 전문 브랜드를 만든 거고요.”

당시 <러셀산장>은 <러셀>, <대영레저스포츠>는 <마스타>, <에베레스트스포츠>는 <에베레스트>, <한국레저스포츠>는 <캠프맨>이란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배낭·침낭·코펠 등을 제작했다.
이후 동대문 시장의 등산장비점들은 1970년대부터 전성기에 접어든다. 그 무렵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계속해서 국내로 유입되고 운동기구와 유니폼 등을 파는 장비점들이 생겨나면서 등산장비점 골목은 1980년대까지 큰 호황을 누린다.

34개 신구 장비점의 조화
동대문 시장의 등산장비점이 남대문 시장 등산장비점 보다 출발이 조금 늦었지만, 규모면에서 앞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현재 동대문종합상가 자리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도봉산으로 가는 버스가 동대문에서 출발해 산꾼들의 약속 장소가 되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이 덕분에 장비점들도 우후죽순 생겨나 오히려 남대문보다 훨씬 큰 상권을 형성하게 됐고, 현재에도 30개가 넘는 매장수를 자랑하고 있다.

현재 동대문에는 신구(新舊) 등산장비점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60년대부터 1989년 사이에 문을 연 <종로산악> <동진레저> <승희산악> <동방레저스포츠> 등 1세대를 비롯해, <동대문산악> <청산산방> <설악스포츠> <디딤돌> <캠프1> 등 2세대, <러셀> <밀레> <네파> <안나푸르나> <아크테릭스> <쉐펠> 등 3세대까지, 신구의 조화가 이루어져 다양한 등산용품들을 판매하는 시장이 형성됐다.

동대문 시장의 종로5가와 청계5가 사이에 밀집된 등산장비점 외에도 토종 등산 의류의 원조격인 <설우산장>도 빼놓을 수 없다. <설우산장>은 <동진레저>와 <청산산방>과 함께 국내 토종 등산 브랜드의 명맥을 유지해온 장비점이다. 현재 이화여대부속병원 인근에 있는 설우상사 본사 1층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남대문 시장의 등산장비점은 1950년대부터, 동대문 시장의 등산장비점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정식으로 매장을 내고 손님을 받기 시작한 것은 1년 차이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누가 먼저다’를 논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초기에 남대문 시장은 군용장비와 함께 지하상가에서 고가의 수입 브랜드를 판매했고, 동대문 시장은 대부분 군용장비만을 취급했다. 이후 남대문 시장은 캠핑 용품 위주의 판매가 이루어졌으나 동대문 시장은 캠핑 용품과 함께 전문등산장비도 취급하면서 각자 조금은 다른 색깔로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두 시장도 결국 같은 길을 걸은 셈이다. 산꾼들에게 장비와 함께 꿈을 팔았으니 말이다.

| 남대문 역사 |
1965 <신진산악센터(아리랑산맥)> <남문산악> <백운산장> <한영사> <설악산장> <K2>
1975 <코오롱스포츠> <맥킨리> <동양산악> <알프스산악> <유명레져> <마운틴스포츠>
1985 <산수산장> <에코로바(메아리산악)>
1995 <몽벨> <블랙야크>
2000 <에픽마운틴> <에코로바> <네파>
2008 <네파> <네파> 상설매장

| 동대문 역사 |
1965 <종로산악>
1970 <블랙야크(종로점)> <스노우프랜드>
1980 <승희산악> <현대산악>
1985 <동방레저스포츠> <동대문산악>
1990 <청산산방>
1995 <디딤돌> <밀레(설악스포츠)> <양지레포츠> <고도코리아> <스위스레저> <캠프1> <에코로바> <러셀(1호점)>
2000 <솔밭길> <밀레> <케이투> <한국산악>
2005 <마운틴기어> <산친구> <레프페이스> <로키캠프> <사레와> <네파>
2007 <현대레포츠> <마운틴이킵먼트> <러셀(2호점)> <쉐펠> <아크테릭스> <안나푸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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