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자연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늘 달콤하다. 오랜 역사를 품은 유적지와 우리네 삶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시장과 빼곡하게 모여든 아파트 사이, 맑고 푸른 자연의 품을 내어주는 도심 속 숲, 안산 자락길을 걸었다.
어느 여름날의 아침,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불쑥 해가 솟았다. 연이은 비 소식에 여름휴가도 미뤄둔 장마철이었다. 알람이 아닌 눈부신 햇살에 눈을 뜬 게 얼마 만이던가. 오랜만에 맞이하는 맑은 하늘에 아침부터 기분이 설렜다. 일기예보를 보니 역시나 내일도 비 소식. 단비처럼 소중하게 주어진 하루니 어디든 나가야만 했다. 며칠 내내 비에 젖은 산길은 위험하고, 도심 속에 있자니 영 기분이 나지 않는다. 도심에서도 쉽게 다녀올 수 있는 맑은 숲을 생각하던 중 독립문 근처에 위치한 안산이 떠올랐다.
서울이 품은 명품 숲길
안산 자락길은 국내 최초의 순환형 무장애 길로 7km, 약 2시간 거리다. 평탄한 나무 데크길과 코르크 길, 흙길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등도 쉽게 오갈 수 있다. 심지어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니기에도 어려움이 없어 누구나 도심 속 힐링을 즐길 수 있다. 길이 잘 닦인 곳은 그만큼 사람의 손이 많이 닿아있기 때문에 때 묻지 않 은 자연을 누리긴 어려운데, 안산 자락길은 다르다. 길만 편할 뿐이지 주변은 온통 천혜의 자연으로 뒤덮여 있는 것. 구간별로 아까시 숲, 잣나무 숲, 메타세쿼이아 숲, 가문비나무 숲이 연달아 이어져 다양한 자연의 맨얼굴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전망 또한 훌륭하다. 곳곳에 숨은 전망대에 오르면 방향에 따라 한강, 인왕산, 북한산, 청와대 등 다양한 서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더불어 조선시대 세종 때 지어진 봉수대와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창건된 봉원사 등 역사적인 명소도 가득하다. 안산 자락길 주변으로는 독립문, 서대문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등 관광지가 모여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도심 속에 있으니 접근성도 훌륭하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과 3호선 홍제역, 무악재역, 독립문역에서 진입할 수 있다.
하나의 산, 여러 가지 매력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지도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걸으니 한성과학고등학교가 나타났다. 수업이 한창일 평일 오전의 교정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운동장은 바다의 윤슬처럼 햇볕에 반짝이고 한바탕 시원하게 물을 들이켠 나무들은 울창한 잎을 드리웠다. 온 세상이 오랜만에 맞이하는 눈부신 날씨에 한껏 설레고 있다.
안산 자락길 입구로 가려면 한성과학고등학교 옆 작은 샛길을 지나야 한다. ‘이곳이 맞나’싶은 학교 담장 옆 좁다란 골목길이 보이면, 그 곳이 맞다. 5분쯤 오르자 〈안산 자락길 입구〉라 적힌 푯말과 함께 초록 잎이 무성한 곳으로 난 나무 계단이 등장한다. 워낙 울창하다 보니 계단 너머의 모습은 가려져 있다.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 속으로 안내하는 듯 계단을 오르자 말간 숲이 꽁꽁 숨겨뒀던 얼굴을 드러낸다. 안산 자락길은 무장애 길답게 걷는 길이 매우 편안하다. 천혜의 숲 사이로 말끔한 나무 데크길이 이어지는데, 자연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지형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다. 덕분에 때 묻지 않은 자연을 여유롭게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평탄한 길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데크를 벗어나 산길을 이용해도 좋다. 안산 자락길은 안산을 한 바퀴 빙 두르는 나무 데크길로 이뤄져 있지만 중간중간 다양한 길이 마련돼 있어 정해진 코스는 딱히 없다. 걸으면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산길, 코르크길, 흙길, 데크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 등산 코스를 이용하고 싶다면 〈봉수대〉라고 적힌 화살표 방향을 따라가면 된다. 봉수대는 안산 정상에 위치하며, 계단과 산길, 바위까지 올라야 닿을 수 있어 등산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숨어있는 재미를 찾아
안산 자락길이 그저 평탄하기만 한 숲이라면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망설임 없이 트레킹에 나섰던 건 안산이 품은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 때문. 입구에 들어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인물 사진 여럿이 줄지어 서있는 구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업적이다. 교과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윤봉 길, 안창호 의사부터 낯선 이름의 희생자까지 안내되어 있다. 숲길에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안산의 위치를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서대문구는 독립운동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다. 안산 주변만 해도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안산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 외에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까지 만날 수 있으니 한 번씩 이름과 얼굴을 익혀두면 좋을 듯하다.
어쩐지 경건해진 마음으로 산책을 이어나가던 중 아늑한 공간이 펼쳐진다. 숲속에서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북 카페 쉼터다. 안쪽에는 너른 정자가, 왼편으로는 다양한 책이 진열된 책장이, 그 앞에는 책을 읽기 좋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돼 있다. 잠시 쉬어갈 겸 마땅한 책을 골라 그늘이 드리운 나무 의자에 앉아본다. 싱그러운 향이 벤 숲의 바람과 종이를 넘길 때마다 나는 사각사각 소리, 촉촉하게 물든 여름 햇살. 그야말로 힐링이 따로 없다. 주말 이른 아침 독서를 위해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이다.
안산 자락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 황홀한 도시 전망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전망대에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는데, 내려다보이는 서울과 북한산, 인왕산이 어우러진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귀한 풍경이다.
힐링 모멘트
안산 자락길을 걷다 보면 중간에서 숲길이 끊기고 다시 숲으로 들어가는 ‘이음길’로 가야 한다. 이음길을 찾던 중 독특한 풍경을 목격했다. 동네 뒷산을 찾은 주민들이 신발과 양말을 벗어들고 맨발로 줄지어 걷는 것. 자세히 보니 내리막길 한편에 마련된 황톳길이 있었다. 붉은 흙길을 맨발로 딛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캬~’하는 감탄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음길 대신 황톳길로 향했다. 동네 주민처럼 신발과 양말을 손에 들고 황토에 발을 딛는 순간, ‘캬~’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늘 아래 자리한 황톳길은 냉장고처럼 시원하고, 점토처럼 되어있어 푹신했다. 아무래도 계절이 여름인지라 시원한 숲길에도 걷는 동안 열기가 올랐는데, 단숨에 식히는 한기였다. 중간중간에는 황토 볼, 황토 족욕탕이 있어 맨발로 다양한 황토 힐링을 즐길 수 있다. 세족대까지 갖춰 황톳길을 벗어나고 싶을 때 언제든 발을 깨끗하게 씻고 다시 신발을 신을 수 있다.
황톳길이 끝나고 다시 이음길을 찾아들어가자 이번엔 메타세쿼이아 숲이 우리를 반겼다. 하늘 높이 솟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빽빽하게 이어져있어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오로지 숲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편안하게 데크 위를 걷던 우리는 매일 안산 자락길을 찾는다는 서대문구 주민의 추천으로 산길로 들어섰다. 메타세쿼이아 숲에 온전히 던져지자 향긋한 피톤치드 향과 쌉싸름한 흙 냄새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듯한 기분. 코스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부터 아쉽다.
마지막 코스는 안산 자락길에서 홍제천 방향으로 나오면 만날 수 있는 홍제폭포다. 인공 폭포인데도 불구하고 규모가 크고 잘 만들어져 감탄을 자아낸다. 거대한 절벽 사이로 거센 물줄기가 쏟아져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 진다. 폭포 맞은편에는 통유리창을 통해 폭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카페가 자리하고 있어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를 마시며 트레킹을 마무리하기 좋다.
▶안산 자락길 매력 포인트 4
1 안산 자락길 전망대
인왕산과 북한산, 서대문구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담기는 전망대. 전망대 앞에 세워진 사진에 봉우리의 이름을 표시해 두어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울창한 나무 덕에 넉넉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산책 중 잠시 쉬어가기 좋다.
2 봉원사
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된 고 사찰.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전통사찰로 등록되어 많은 신도가 찾는다. 규모가 제법 커 삼천 불전 내에 삼천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고풍스러운 외관과 색색의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꼭 신도가 아니더라도 들러볼만하다.
3 메타세쿼이아 숲
‘서울 속 사색의 공간’이라 불릴 만큼 청량하고 아늑한 숲길이다. 하늘 높이 자란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하게 이어져있어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무더운 날씨에도 메타세쿼이아 숲길은 서늘하고 향긋한 바람이 불어와 시원하다.
4 홍제폭포
안산 자락길에서 홍제천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만날 수 있다. 백련교 하류 안산 경사지에 위치한 인공폭포로 주변에 폭포마당, 카페 등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폭포를 마주하고 자리한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트레킹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