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자드는 특수 효과, 펭귄은 관객?
블리자드는 특수 효과, 펭귄은 관객?
  • 글 사진·안병식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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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식의 극한 마라톤대회 참가기 ④ 남극

▲ 남극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혹독한 추위와 강력한 눈보라를 견디며 달리고 있다.

대회 자체가 모험이자 탐험…4대 사막마라톤 대회 완주 ‘그랜드슬램’ 달성

중국 고비사막, 칠레 아타카마사막, 이집트 사하라사막, 그리고 남극을 포함해 4대 극한 마라톤대회라고 부른다. 3개의 사막을 완주해야만 비로소 출전 기회가 주어지는 마지막 타이틀 남극. 뼈 속까지 밀려오는 추위와 휘몰아치는 블리자드 속을 달리면서 뜨거운 사막과는 또 다른 극한의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글 사진·안병식 오지 마라토너(소속·노스페이스) http://blog.naver.com/tolerance

나에게 남극은 어떤 의미일까? 며칠씩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첫사랑의 두근거림만큼 나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고, 하얀 안개 속에 가려진 세상만큼이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대륙. 빙하와 펭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지구의 끝, 아니 처음인 남극에서 4대 극한 마라톤대회를 마무리한다.

▲ 깨끗하고 소박한 항구도시인 우수아이아는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상징성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 하얀 눈으로 덮인 산들과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맑은 색을 띄고 있는 바다가 어울려 황홀한 풍경을 연출한다.

▲ 남극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 펭귄. 뒤뚱거리며 걷는 펭귄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레이스의 고통도 잠시나마 잊게 된다.

마지막 사막, 그리고 마지막 관문
대회 신청서를 작성하고, 참가비를 입금하고, 항공기 티켓을 구하고…. 대회 준비를 하는 내내 마음속에는 어릴 적 소풍 갈 때의 기분처럼 설렘으로 가득했다. 이번 대회에는 우리나라에서 나를 비롯해 김성관, 유지성, 이동욱, 이무웅 이렇게 다섯 명이 참가했다. 단일 국가로는 가장 많은 선수들이 참가한 것이다.
남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칠레의 푼타아레나스와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를 거쳐 가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우수아이아를 거쳐 가는 방법을 택하고, 인천을 출발하여 14시간의 비행시간 만에 미국의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미국 항공기를 갈아타고 마이애미를 경유해서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아메리카의 파리로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와인을 마시며 탱고를 즐길 수 있는 열정적인 도시이면서, 영화 에비타(Evita)의 주제곡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부른 에바 페론의 슬픈 영혼의 목소리에 잠길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시간을 조금 넘게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남미의 끝 우수아이아는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로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깨끗하고 소박한 항구도시였다. 바다와 접해있으면서도 시내 뒤로는 만년설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세상의 끝’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수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는 도시다.

▲ ‘마지막 사막’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번 남극대회를 완주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즐거움만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미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오는 동안 나를 비롯한 3명의 짐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수아이아로 가는 비행 탑승시간이 2시간 정도의 여유 밖에 남아있지 않아 미국 항공사로 전화를 하고 바로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국내 항공은 11월부터 2월까지는 여름 성수기라 좌석을 구하기 힘들어 이미 예약된 비행기마저 놓치면 남극으로 가는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우수아이아에 도착했지만 도시의 아름다움보다는 우리는 잃어버린 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남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하고 배가 출발하기까지의 여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항공사로 전화를 해서 남극에서 돌아 온 후 짐을 받기로 약속했다.

나는 2개의 가방 중에 하나의 가방을 잃어 버렸는데 거기에는 카메라와 대회 때 입을 옷 등 몇 가지 장비들이 들어 있었다. 극지방에서의 마라톤은 일반 마라톤과는 달리 장비의 중요성이 크기 때문에 우수아이아에서 잃어버린 장비들을 다시 구입하고 난 후에야 남극으로 향하는 ‘The Antarctic Dream’호에 탑승할 수 있었다.

▲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배에서 내리기 전에 진행 요원들이 설명하는 안전 수칙을 듣고 있다.
이번 남극대회는 중국의 고비사막과 이집트의 사하라사막, 그리고 칠레의 아타카마사막을 완주한 선수들에게만 참가 기회가 주어진다. 이 4개의 극한 마라톤대회를 완주해야만 비로소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다. 남극은 대륙 전체가 생물이 거의 자랄 수 없는 불모지로 대회 측에서는 ‘마지막 사막’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이번 남극대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동안의 사막 마라톤대회를 통해 서로 안면이 있는 얼굴들이었고,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는 이번 대회 동안 내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오랜 비행시간의 피곤함도 잊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크루즈 여행이 되길 기대하며 남극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The Antarctic Dream’호가 흔들거려 잠에서 깼지만 머리가 많이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리려고 일어나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금세 내 몸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렇게 몇 번씩 반복되는 구토와 어지러움에 누워있는 일 말고는 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음날까지도 약을 먹고 식사도 거르고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동그란 창문 사이로는 높은 파도와 회색 빛 눈보라가 휘날리는 풍경만이 보였다.

4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과 48시간 동안의 배 멀미와의 싸움. 그렇게 남극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이것은 여행이 아닌 ‘남극 원정’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케 했다. 남극을 상징하는 건 눈과 바람, 그리고 펭귄들이다. 남극에 가까워질수록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유빙 조각들과 그 위에 앉아있는 펭귄들은 며칠 동안의 고생을 잊게 할 만큼 남극의 신비로운 풍광을 맘껏 즐기며 여유를 갖게 했다.

▲ 만년설과 빙하가 만들어낸 신비로운 풍광이 시선을 멈추게 한다.

두려움과 신비함이 공존하는 곳
남극대회의 코스는 본토와 그 주변에 있는 섬들을 이동하면서 진행됐다. 처음 도착한 섬은 ‘Aitcho Island’인데 펭귄들로 유명해서 펭귄섬이라고도 했다. 11월의 남극에서의 밤은 짧았다. 밤 11시가 넘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새벽 2시가 되면 다시 해가 떴다. 첫날은 운 좋게도 아름답게 물든 일출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남극에 머무르는 10일 동안 맑은 날은 채 이틀도 되지 않았고, 회색빛 하늘과 매일 반복되는 눈보라 때문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건 그나마 행운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 우수아이아에서 남극으로 향하는 ‘The Antarctic Dream’호. 48시간이 걸려서야 남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회 첫날은 새벽 3시에 시작됐다. 아름다운 일출과 하얗게 눈이 덮인 풍경 속에서 치러지는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작이었다. 첫 번째 코스는 8시간 동안 같은 코스를 반복해서 달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금은 지루한 면도 있었지만 남극에서는 기상의 변화가 심하고 많은 스탭들이 참여한 게 아니라서 장거리 코스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남극에서 마라톤 대회를 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탐험이었다.

첫날은 8시간을 달려야 된다는 두려움보다는 처음으로 남극 땅을 밟은 두근거림과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수많은 펭귄들, 그리고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뒤덮인 멋진 풍광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동안의 피로를 잊게 할 만큼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하지만 코스 1시간 정도를 남겨놓고 맑고 화창하던 날씨가 금세 바뀌며 갑자기 블리자드(눈폭풍)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블리자드는 남극에서 강풍과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을 말하는데, 고글·마스크·방풍 재킷 등으로 몸을 보호했는데도 아주 추웠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눈보라와 함께 처음 경험해 본 블리자드의 위력은 정말 강력했다.

▲ 티 한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남극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취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레이스는 야간에 진행됐다. 하지만 하얀 눈이 반사 되면서 하늘에 달이 뜬 것처럼 밝았고 마치 새벽안개처럼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눈이 덮인 고요한 세상을 달린다는 것은 달리면서 느끼는 고통을 잊게 할 만큼 멋지고 환상적인 경험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마라톤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네 번째 레이스는 ‘Cuverville Island’의 산 위에서 대회가 진행됐다. 보트를 타고 섬으로 이동한 후 다시 1시간을 넘게 오르고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은 남극에 머무르는 동안 날씨도 가장 맑고 따뜻했으며, 산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다. 이미 순위도 어느 정도 정해졌기 때문에 선두그룹도 순위 경쟁보다는 레이스를 즐기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남극에서는 눈의 색깔도 달랐다. 하얀 눈 위에 햇빛이 비치면 마치 에메랄드빛 보석처럼 신비스러운 색으로 변했고, 햇빛에 반사되는 바다와 빙산들의 아름다움은 그 하늘 아래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황홀하게 했다. 나에게 이 순간만큼은 남극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취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레이스는 ‘Deception Island’에서 치러졌다. 새벽부터 몰아치는 강풍에 첫날의 블리자드가 떠올랐다. 날씨가 너무 추워 배 밖으로 나오기가 싫었지만 보트를 타고 높은 파도를 헤쳐 마지막 코스로 이동했다. 네 번째 코스에서 아름다운 남극의 풍경을 즐기며 달렸듯이 이날도 난 블리자드의 강풍을 즐기며(?) 마지막 레이스를 마쳤다.

▲ 이번 남극대회 코스는 본토와 그 주변에 있는 섬들을 이동하면서 진행됐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남극에서의 레이스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과 블리자드의 강풍을 제외하고는 그동안의 사막레이스와는 달리 그렇게 힘든 레이스는 아니었다. 순위에 대한 집착도 크게 없었고 오히려 다른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 없었던 남극의 신비로움을 맘껏 느낄 수 있었다. 남극은 처음이라는 단어만큼 새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 4개의 사막마라톤 대회를 무사히 완주하며 ‘그랜드 슬래머’라는 명예를 얻게 됐다.
남극에 머무르는 10일 동안 절반이 넘는 시간을 배안에서 생활하다보니 날짜와 시간 감각도 없어지고 지루하고 피곤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위에서 배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해 구조요청으로 인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하루를 소비해버려 한 개의 대회 코스가 취소되어 버렸고, 기상악화로 인해 계획했던 코스들이 일부 취소되는 등 아쉬운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남극이라는 경험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특별함으로 다가왔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마라톤은 ‘그랜드슬램’이라는 위업보다도 그저 새로운 세상,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달리고 싶은 본능에 이끌리는 순수함이다. 이것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제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마라토너의 참을 수 없는 피가 자꾸만 나를 이끌고 있다. 바로 세계 곳곳의 오지로 떠나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가득한 곳으로 다시 나의 몸을 맡길 순간이다. 
▶ 대회 협찬 : <노스페이스>, JDC(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제주특별자치도 스포츠 산업과

▲ 이번 대회에 참가한 참가국들. 기상 변화가 심하고 많은 스텝들이 참여하지 못해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대회였다.

안병식 | 1973년 생. <노스페이스> 소속이다. 중국의 고비사막, 이집트의 사하라사막, 칠레의 아타카마사막, 남극 등 세계 4대 극한 마라톤대회를 완주한 ‘그랜드슬래머’로 지난 4월에는 북극점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다. 세계 곳곳의 극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전문 오지 마라토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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