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주목해야 할 한국의 멋
설 연휴에 주목해야 할 한국의 멋
  • 김경선 | 아웃도어DB
  • 승인 2023.01.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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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살아 숨 쉬는 여행지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다가온다. '전통’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설 연휴. 가족과 함께 여행하기 좋은 전통 여행지 세 곳을 소개한다.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김영수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김지호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Omega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다. 산을 등지고 낙동강을 젖줄 삼은 하회마을은 명당 중의 명당처럼 보인다. 물은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렇게 물줄기가 대지를 흐르고 산줄기를 휘돌아가는 사이 굽이진 강 한쪽에는 모래가 쌓이고 너른 평지가 만들어진다. 이 평지에 들어선 마을을 물돌이마을 또는 물돌이동으로 부른다. 풍요로운 대지의 상징처럼 누렇게 익은 들판이 감싸 안은 물돌이동 하회마을. 하회河回, 강이 감싸 안고 흐른다는 이름처럼 마을은 낙동강 위에 한 떨기 연꽃처럼 활짝 피어 있다.
마을의 역사는 600년이 넘는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160여 채의 기와집과 200여 채의 초가는 이 마을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풍산 류씨의 대종가 양진당과 서애 류성룡의 종택 충효당 등 역사적인 가치가 뛰어난 고택이 마을 곳곳에 즐비하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 허씨가 터를 닦고 안씨가 살던 곳에 류씨가 잔치판을 벌인다. 하회마을을 이야기할 때 늘 회자되는 말이다. 허씨와 안씨가 마을에 먼저 살았지만 번성하지 못했고 이후 류씨 가문이 정착한 이후 번성했다는 뜻이다.
하회마을에서는 두 개의 놀이문화가 전승됐다. 선유줄불놀이와 하회별신굿 탈놀이다. 양반들의 전유물인 선유줄불놀이는 마을을 휘감는 낙동강변 부용대 절벽 아래에서 풍류와 시회詩會를 벌이 던 뱃놀이다. 그러나 정작 하회마을을 세계에 알린 것은 하회별신굿 탈놀이다. 평민들이 중심이 되어 신랄한 풍자극을 연출한 탈놀이는 세월을 초월하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하회탈은 국보로 지정 될 만큼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 가면미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까지 손꼽힌다.
하회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보고 싶다면 부용대 정상에 올라야 한다. 낙동강 건너편에서 마을을 마주 보고 있는 절벽 부용대는 단애가 병풍 같이 둘러있는 모습이다. 10분을 걸어 올라가면 부용대 정상이다. 낙동강이 크게 휘돌아가는 마을은 전형적인 S라인 을이다.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의 지맥이 마을의 주산인 화산을 이루고, 낙동정맥에서 뻗어 나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를 이루어 만난 곳. 그렇게 산과 물이 만나 연꽃을 피운 땅은 풍요의 상징처럼 안동에 남아있다.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차선자


왕곡마을
현대적인 것이 미덕이 돼버린 요즘에는 전통의 향기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좀 더 세련되고 진보된 것을 쫓는 사이에 전통문화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예스런 고택, 정겨운 초가, 장작 연기가 낮게 깔린 돌담… 곱디고운 선의 미학이 완성한 한국적 아름다움이 고성 왕곡마을에 오롯이 남아있다. 제아무리 서양문화에 익숙해진 세대라도 한갓진 전통마을에 들어서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함에 젖어 든다.
국내 최초의 전통 마을 보존지구로 지정됐을 만큼 전통의 멋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마을이 왕곡마을이다. 이 마을이 더욱 특별한 것은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화려함 대신 소박하고 담백한 한옥이 어깨를 마주한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집과 집을 잇는 좁은 골목을 걸으며 투박한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떠올릴 수 있다.
왕곡마을은 고려 말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함부열이 강원도로 내 려와 숨어 살았고, 그의 손자 함영근이 왕곡마을에 뿌리를 내리며 양근 함씨의 동족마을이 됐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강릉 최 씨가 마을에 들어와 두 축을 이뤄 전통 한옥을 지켜왔다. 두 성씨가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경주 양동마을과 유사하지만 양동 마을이 양반과 평민의 거주 공간이 명확하게 구별된다면 왕곡마을은 모든 집과 집안이 위아래 없이 마을공동체를 이룬다. 그래서 왕곡마을은 친근하고 따뜻하다.
14세기경에 형성돼 19세기 전후에 완성된 마을은 다섯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둘러싼 형태다. 강원도에 자리했으니 추운 지방 가옥의 특징인 북방식 전통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다. 북방식 전통가 옥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도록 뒷지붕이 길게 뻗어있는 것이 특징. 또 햇빛이 많이 들어오도록 마당이 넓고 담장이 없다. 이렇게 잘 보존된 마을은 영화 〈동주〉의 촬영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고만고만한 왕곡마을은 특정한 집을 보기보다는 마을 전체를 하나로 묶어 과거의 삶을 유추하며 둘러보는 편이 좋다. 과거 조상들의 삶의 방식, 그들의 애환, 거친 환경 속에 살아남기 위한 지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나기환


낙안읍성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전통 마을 낙안읍성. 조선 전기에 계획적으로 세운 마을에는 100여 채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삶을 이루고 있다. 질박한 풍경이 살아 숨 쉬는 낙안읍성에 들어서는 순간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단단한 기와집 대신 지붕 위에 지푸라기가 그득하게 얽힌 초가집은 어릴 적 방문했던 외갓집처럼 친근하다.
짚단을 엮어 만든 초가집은 바닷가 마을답게 습한 기운 탓에 일 년에 한 번씩 지붕을 갈아줘야 썩지 않는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 낙안읍성이다. 부지런한 할머니의 손으로 겨우내 엮어 만든 짚단 지붕은 그래서 품위 있는 기왓장보다 더 애틋하다.
낙안읍성은 약 1.4km의 성곽이 둘러싼 마을이다. 마을 안을 둘러 봐도 좋지만 성곽 위로 난 길을 따르면 읍성 마을의 예스러운 정취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전망은 절정에 달한다. 읍성 안의 초가집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금전산과 제석산, 오봉산 등 주변 산군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지금으로 치면 계획도시인 만큼 평지와 산을 이어 쌓은 평산성이 더 탁 트인 전망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낙안읍성은 그 시대 대부분의 읍성과 마찬가지로 동·서·남쪽에 3개의 성문을 조성했다. 형태는 시대상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지만 성문 바깥쪽에는 다른 읍성과 달리 ㄱ자형 옹성을 둘러 차별화했다. 농사가 주요 산업이었던 만큼 문루마다 사계절과 농사에 관련된 의미를 부여했다. 동문은 봄을 상징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7년 복원된 남문은 여름을 의미하며 무더운 여름철 이곳에 올라서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서문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낙안읍성이 재미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전통 마을이 같은 성씨를 가진 친인척이 모여 살며 뚜렷한 위계질서를 지닌데 반해 낙안읍성은 양반들보다는 관에 출입하는 아전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살던 곳이라는 점. 초가삼간을 지어 삶을 영위했던 민초들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나 경험할 수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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