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중단됐던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가 2년 만에 재개됐다. 전 세계에서 온 450여 명의 참가자들은 가을색이 완연한 신비로운 화산섬 제주를 3일간 걸으며 트레킹의 진수를 만끽했다. 힘들지만 황홀했고, 버겁지만 뿌듯했던 2박3일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주의 가을’, 듣기만 해도 설레는 두 단어의 마법에 이끌려 제주로 향했다. 제주도 여행은 여러 번 해 봤지만 드라이브를 하며 보는 제주와 직접 두 발로 걸으며 만나는 제주는 다르다. 제주도가 가장 아름다워지는 10월에, 한라산부터 해안까지 두 발로 꼭꼭 밟으며 걷는 화산섬은 얼마나 황홀할까. 다만 56.6km라는 긴 거리가 다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아웃도어 에디터라지만 백패킹 배낭을 둘러메고 이렇게 긴 거리를 걸어본 적은 없었기에 출발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트레킹 시작 하루 전, 피엘라벤 클래식의 베이스캠프인 빌라드 애월에 도착했다. 에디터가 속한 그룹은 2그룹. 트레킹 전날 밤,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코스 소개와 주의사항 등을 전달받은 후 참가자들은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대장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1일 차, 한라산의 가을을 만나다
오전 7시, 빌라드 애월에서 어리목 탐방로 입구까지 이동하는 셔틀을 타기 위해 2그룹 참가자들이 모였다. 그룹당 150여 명의 참가자들이 참석하는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해외 참가자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헝가리 등에서 일부러 제주까지 날아온 해외 참가자들은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셔틀에 탑승했다.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 도착하자 맹렬한 추위가 밀려왔다. 아침 기온 5℃. 포근한 제주 날씨를 예상하고 옷가지를 챙긴 에디터도, 한라산의 추위를 처음 맛보는 해외 참가자들도 모두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출발선에서 참가자들은 배낭의 무게를 재보며 각오를 다졌다. 추위에 취약한 에디터의 배낭은 묵직한 침낭으로 인해 13.7kg으로 출발. 저울 앞에 선 참가자들의 배낭 무게 역시 10~14kg을 넘나들었다.
오전 8시,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가 드디어 출발 신호를 울렸다. 1일 차에는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서 윗세오름 대피소~영실 탐방로~하원수로길을 거쳐 하원마을 캠핑장까지 약 16km를 걷는다. 3일 중 한라산 트레킹이 포함돼 고도차가 가장 큰 만큼 상당한 체력 소모가 예고되는 날이기도 하다. 출발 신호에 따라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 피켓을 배낭에 부착한 참가자 150여 명이 한라산의 품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묵직한 배낭에 익숙해지기도 전, 길은 벌써 가팔라지며 만만치 않은 하루를 예고했다.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4.7km. 고도가 높아질수록 길은 더욱 가팔라졌고, 줄지어 걷던 참가자들의 간격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이 차곡차곡 쌓여 드디어 사제비동산에 다다르자 시야가 확 트이며 가을이 완연한 한라산의 풍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물든 동산 너머 백록담 남벽이 위용을 드러내니 꼴딱거리며 힘겹게 오른 수고가 무색하게 감탄만 흘러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한라에서 해안까지 이어지는 제주의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길은 다시 만세동산으로 이어지고 풍경은 이제 절정이다.
첫날 체크 포인트인 윗세오름 대피소. 참가자들의 간격이 더 벌어졌다. 초코바로 에너지를 채우고 다시 나선 길. 고도가 높아지자 서늘한 한기에 손이 시릴 정도다. 다행히 길은 완만해지고, 하산 코스인 영실 탐방로로 접어들었다. 영실 코스는 완연한 가을의 모습이다. 산 사면을 메운 울긋불긋한 단풍은 ‘내가 가을이다’라고 외치는 듯 가던 길을 계속 멈추고 카메라를 들게 만들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가 느껴질수록 하산하는 발걸음은 더욱 신중해졌다. 잠시 잠깐 중심을 잃으면 배낭으로 인해 무게중심이 순식간에 깨져 크게 다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스틱을 짚어가며 네 발로 하산하니 영실휴게소. 휴게소에서 도로를 따라 2km 정도 더 내려가면 마지막 구간인 하원수로길 들머리다.
하원마을에 논을 만들어 주민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원수로길은 1950년대 후반, 전쟁 후 빈곤에 허덕이던 마을 주민들의 생명줄이기도 했다. 현재 약 4.2km의 수로길이 남아있는데, 물이 흐르지는 않지만 야트막한 수로 양 둑을 살금살금 걸으며 울창한 숲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구간이다. 수로길을 빠져나와 잠시 도로를 따랐다. 어느새 고단했던 첫날의 루트도 끝이 보였다. 1일 차 숙영지인 하원마을 캠핑장에 들어서자 스태프들이 한마음으로 축하의 박수를 건넸다.
2일 차,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환상의 숲
700고지에 자리한 캠핑장의 밤은 무척이나 추웠다. 동계용 침낭과 핫팩으로 무장한 에디터는 다행히 추위에 떨진 않았지만 캠핑에 익숙하지 않은 참가자들은 부실한 야영장비로 인해 밤새 추위에 시달린 듯했다. 둘째 날은 무려 26km를 걸어야 하는 날이기에 오전 6시에 기상해 서둘러 사이트를 정리하고 건조식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이동하며 먹을 물과 행동식, 점심을 챙겨 캠핑장을 나선 시간은 오전 7시 45분. 어두워지기 전에 두 번째 캠핑장에 도착하려면 서두르는 것이 상책이다.
2일 차 코스는 서귀포자연휴양림을 지나 돌오름길과 천아숲길, 평야지대를 지나는 26km의 대장정이다. 맨몸으로 걷기도 힘든 거리를 14kg의 배낭을 메고 숲길을 걸어야 하니 잔뜩 긴장되는 게 사실이다. 서귀포자연휴양림으로 들어서자 푹신한 짚으로 엮은 카펫이 깔려 있어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휴양림이 얼마나 큰지 내부에서도 한참 숲길을 걸어 도착한 휴양림 입구. 길은 이제 돌오름길로 이어졌다.
널찍한 진입로를 통해 돌오름길로 들어서자 울창한 숲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햇빛조차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한 숲은 배낭의 무게를 잊게 할 만큼 울창했다. 어느새 길은 다시 좁아지고 잔잔하게 고도를 넘나들었다. 숲의 향기에 취한 지 한 시간. 5.6km의 돌오름길은 아직 반이나 남았다. 돌오름길이 끝나갈 무렵, 포장도로가 등장하더니 제법 된오르막이 등장했다. 어제부터 쌓인 피로와 배낭의 무게가 쌓여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표고버섯재배단지에 다다르자 드디어 2일 차 체크 포인트. 트레킹 패스에 도장을 ‘쾅’ 찍고 식수를 보충한 뒤 차가운 빵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길은 천아숲길로 접어들었다. 경사는 완만했지만 제주의 특성상 크고 작은 현무암들이 곳곳에 널려 있어 자칫 발목이 꺾일 위험이 도사렸다. 스틱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해발 1000m 고지를 통과하는 길, 서서히 피로와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피엘라벤 클래식 참가 전부터 좋지 않았던 오른쪽 발목 인대가 통증을 호소했고, 발가락에도 물집이 잡힌 듯 한 걸음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에디터와 내내 동행하던 사진기자도 발바닥에 큼지막한 물집이 잡혀 “마치 후라이팬 위를 걷는 듯하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천아숲길도 끝이 났다. 숲길을 나오자 피엘라벤 클래식 스태프들이 참가자들에게 시원한 오미자차를 선물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약 5km. 숲에서 벗어나 길은 광활한 들판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5km는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에서 직접 개발한 루트로 참가자가 아니면 걸을 수 없는 구간. 내내 시야가 갇혀있던 숲 대신 너른 들판이 주는 광활함은 마지막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드디어 2일 차 숙영지인 녹고뫼 휴양펜션에 들어서자 스태프들의 환호가 그 어느 때보다 반갑다. 첫날과 달리 온수가 나오는 샤워장에서 뜨끈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매점에서 산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자 고단했던 하루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3일 차, 제주의 마을과 해안을 걷다
추위가 한풀 꺾인 제주의 날씨 덕에 숙면을 취한 참가자들은 마지막 날 아침을 맞이했다. 3일 차에는 마을과 해안을 걷는 약 16km 구간으로 3일 중 난이도가 가장 쉬워 참가자들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사이트를 정리하며 여유를 부렸다. 에디터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해본다.
캠핑장을 나선 시간 오전 9시. 제주올레길 16코스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차도를 걸어야 했지만 스태프들이 곳곳에서 안전지킴이로 나선 덕에 참가자들은 어려움 없이 16코스로 접어들었다. 배낭의 무게는 여전했지만 길이 완만하고 편안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3일 차 체크 포인트인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에서 도장을 찍은 후 계속 북서쪽 해안을 향해 걷는다. 아기자기한 예원동 마을을 지나고 수산리를 지나는 사이, 감귤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귤밭과 제주 특유의 돌담길이 번갈아 등장하며 지루할 틈 없는 풍경을 선물했다.
수산봉을 에둘러 구엄리를 통과하니 드디어 애월 해안이다. 3일 중 처음으로 제주의 바다를 만나자 탁 트인 전망과 광활한 풍경에 그간의 고생이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이다. 멀어졌던 문명이 성큼 다가왔다. 제일 처음 보이는 편의점에서 콜라 한 캔을 사 구엄포구를 바라보며 목을 축였다. 남은 거리는 이제 약 4km. ‘이제 정말 다왔다’는 뿌듯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건조식도 행동식도 질린 터. 뜨끈한 고기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마지막 길을 나섰다.
애월해안을 따르는 올레길 16코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발목은 시큰거리고 발바닥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지만 눈 앞에 펼쳐진 제주의 해안은 동해와 서해에서 느낄 수 없는 화산섬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올레길 옆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차들이 쌩쌩 달렸지만 부럽지 않다. 차에서 보는 풍광과 두 발로 땅을 밟으며 보는 풍경은 천지 차이다.
드디어 빌라드 애월 이정표가 보인다. 리조트에 들어서 마지막 피니시 구간이 코 앞이다. 먼저 들어간 참가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에디터도 피니시를 통과했다. 함께 고생한 참가자들, 스태프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3일간의 대장정을 축하했다. 걱정도 많고 기대도 많았던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를 결국 완주했다.
저녁 6시 30분, 애프터 파티가 시작됐다. 퓨전국악 밴드와 조문근 밴드의 공연으로 파티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밴드의 공연에 열광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참가자들의 표정에서 대견함과 뿌듯함, 후련함과 행복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파티가 끝이 나고,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는 내년을 기약하며 성공적인 재출발을 마무리했다. 제주의 품에 온전히 안겼던 3일간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이다.
mini interview
조인국 알펜인터내셔널 대표
코로나19로 잠시 멈췄던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가 3년 만에 다시 재개됐습니다. 전 세계 6개국에서 열리는 피엘라벤 클래식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열릴 수 있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참가자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알리고 걸으며 피엘라벤의 정신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가 전 세계 아웃도어인들에게 꼭 한 번 와보고 싶은 행사가 되길 희망합니다.
김문기 알펜인터내셔널 팀장
많은 준비 끝에 다시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를 시작할 수 있게 돼 무척 행복합니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19 이후 첫 행사라 더 많은 준비와 기대를 가졌는데요. 여전한 코로나19의 여파로 해외 참가자들이 전에 비해 많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각지에서 제주를 찾아온 해외 참가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두 번째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를 준비하면서 1회에 미흡했던 부분이나 아쉬웠던 코스를 보완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참가자 전원이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즐기고 여유를 만끽하며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길 바랍니다.
팀 어센더(안익수‧최혜미‧정영일‧강도연‧정윤서)
경남 울산의 백패킹 크루 팀 어센더. 또래의 친구들이 백패킹이라는 취미를 공유하며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에 참석했다. 쉽지 않은, 짧지 않은 길이었지만 3일간의 대장정 동안 자연을 느끼고, 한계를 넘어서며, 우정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팀 어센더는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 이후에도 여전히 산과 자연을 찾으며 백패킹을 하고 산행을 즐기겠다는 포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