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태어나는 역사
손끝에서 태어나는 역사
  • 신은정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2.10.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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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도자예술촌 물레체험기

계룡산 일대에는 도예가들이 모여 산다. 도자기를 빚으며, 500년의 역사를 이으며.



빚는 일은 어렵다. 어린 시절, 옹기종기 모여 송편을 빚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도저히 마음 가는대로 모양이 나오지 않아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완성된 따끈한 송편을 입에 넣으면 그런 불만들도 잠시 얌전해졌지만 ‘왜 이런 걸 만들어야 하지’라는 생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송편을 빚는 일이 드물어진 이제야 문득 그날들이 떠오른다. 엄마가 만들었던 송편을 나도 만들 수 있게 된 일, 두런두런 둘러앉아 같이 송편을 나눠먹으며 옛날 이야기를 듣는 일. 그게 빚어야 하는 이유라면 이유였다. 힘들어도 이어져야 하는 일이 있었고, 누군가는 알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역사를 잇는 도자예술촌
계룡산 일대에는 묵묵히 역사를 다시 빚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계룡산도자예술촌의 작가들이다. 계룡산도자예술촌은 1990년대 초반부터 도예가들이 모여 만든 곳으로, 지금까지도 작가들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계룡산 북쪽 자락 깊은 곳에 어렵게 터를 잡은 이유는 끊어진 계룡산 철화분청의 역사를 잇기 위해서다. 도자예술촌이 자리 잡고 있는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 일대는 우리나라 3대 도자기 중 하나로 꼽히는 철화분청사기가 생산된 지역으로, 500년 전부터 도자기를 구워오던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일본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이삼평이 이곳 출신일 정도. 결국 도자예술촌에 모인 도예가들의 손에서 철화분청사기와 끊어졌던 역사가 다시 태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도자예술촌에서 진행하는 물레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계룡산의 역사를 손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물레로 도자기를 빚는 일은 처음이라, 설렘 반 떨림 반으로 도자예술촌 소여도방의 문을 열었다. 소여도방에는 현재 계룡산도자예술촌의 촌장을 맡고 있는 정순자 작가가 있다.



물레 위에서 태어나는
소여도방에서 진행하는 철화분청사기 물레체험은 물레로 도자기를 빚고, 분장토를 칠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넣는 순서다. 말로 하니 간단해 보이지만, 직접 해보라고 하니 머리가 새하얘진다. “어떻게 하는...?” 작가님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물레 앞에 앉는다. 떼어둔 흙을 물레 위에 턱하고 올린다. 물레가 너무 빨리, 혹은 너무 천천히 돌아가지 않도록 발로 속도를 잘 조절하는 것도 관건. 중심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흙을 모아 올린다. 잘 빚기 위해서는 흙과 손 사이에 윤활제 역할을 하는 물을 충분히 묻혀야 한다고. 물과 흙으로 금세 흠뻑 물들어버린 작가님의 손끝에서 흙은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널따란 그릇이 되었다가, 금세 입구가 줄어들어 머그컵이 되기도 한다. 뭐든 될 수 있는 이 원석과도 같은 흙으로 나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자신감에 차올라 소매를 걷고 손에 물을 흠뻑 묻힌 뒤, 물레 위에 고고히 자리한 흙에 손을 올렸다. 작가님이 잡아준 도자기의 중심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하지만 왜 이렇게 생각처럼 되지 않을까. 손에 힘을 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힘을 주면 흙은 맥없이 고꾸라져버렸다. 손과 발의 호흡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물레를 천천히 돌리려니 세월아 네월아 흘러가고, 속도를 올리니 탈수기처럼 손도 못 대게 빨리 돌아간다.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분. 자신감 없는 손에서 풀이 죽은 마음을 읽어낸 작가님이 도자기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는다.
머그컵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적당한 두께와 입구를 만들기 위해서 흙의 중앙에 손을 넣어 모양을 잡는다. 왼손으로 흙의 형태가 망가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중심에 구멍을 만든다. 언제나 적절한 힘 조절이 생명. 이렇게 집중한 적도 오랜만이다. 입구가 너무 두꺼워지거나 모양이 흐트러지면, 얇은 실을 이용해서 흙을 떼어낸다. 그렇게 물레 위에 올라앉은 결과물은 왠지 머그컵이라기에는 너무 커져버렸지만, 직접 만든 첫 도자기라 애정이 생긴다.


다음은 분장토를 바를 차례. 하얀 분장토를 넓은 붓에 충분히 묻혀 도자기를 분장시킨다. 이 상태에서 도자기에 붓 자국이 듬성듬성 남는 것은 분청사기를 만드는 7가지 기법 중 하나인 귀얄 기법이다. 거친 듯 유려하게 남은 자국이 경쾌하다. 이렇게 도자기의 바탕을 바른 뒤에는 빨간 철화로 그림을 그려낸다. 도자기에 붓을 대는 순간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종이에 먼저 연습해 보기로 했다. 계룡산 철화분청사기에는 쏘가리를 그린다고 한다. 우악스러운 비늘과 눈, 꼬리를 차례대로 그려낸다. 펜을 내려두고 붓을 잡은 뒤, 도자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처음은 언제나 어렵다. 그림에 소질이 없던 에디터는 완성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날짜와 이름을 적어 넣으니, 나의 철화분청사기 머그컵이 완성됐다. 도자기는 구워져 완전한 모습을 갖춘 후 한 달 뒤 만든 이에게로 배송된다.
비로소 계룡산에서 도자기를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가 됐다. 500년 전 이 자리에서 도자기를 빚어냈던 사람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처럼, 먼 훗날에는 도예촌의 기억에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큰 꿈을 꾼다.


mini interview 소여도방 정순자 작가



계룡산도자예술촌에 머문지 오래됐어요.
30년이 훌쩍 넘었어요. 도예과를 졸업하고 5년 정도 다른 일을 하다가 도예촌 마을을 만들기 시작하며 왔어요. 지금은 개인 작업을 하면서, 도예를 가르치기도 하고 도자기를 팔기도 해요. 변하지 않고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작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작가들이 스스로 마을을 만들고 유지해온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지금 13가구가 있는데, 30년 전 처음 모였던 분들과 새로운 젊은 도예가들도 들어와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도예를 할 생각인가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지금은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힘든 시절도 지금 떠올려보면 행복했고요. 제가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도예촌의 도예가들은 후배를 양성하고, 대를 이어 도예가가 되는 집도 많아요. 저도 이곳에서 계속 역사를 이어갈 생각이에요.

체험문의
소여도방
충남 공주시 반포면 도예촌길 71-17
041-857-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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