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빚는 부부
행복을 빚는 부부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2.09.12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이현&도미니크 '작은 알자스' 대표

엔지니어였던 남편과 소설가 아내의 행복은 충주의 작은 와이너리에서 피어난다. 손수 농사지은 과일로 정성스레 만든 작은 알자스의 와인, 레돔에서는 이곳의 땅과 바람, 햇볕의 맛이 난다.


충주 수안보면 얕은 언덕을 오르니 유럽풍의 새하얀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은 온통 산과 나무, 밭이다. 눈앞에 펼쳐진 프랑스 알자스를 닮은 풍경에 잠시 유럽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때 쯤 작은 알자스의 신이현 대표가 활짝 웃으며 장화를 내어 준다. 우리나라 시골에서 흔한 일명 ‘K-장화’를 신자 비로소 이곳이 충 주라는 사실이 와닿는다. 신이현 대표를 따라 포도밭에 들어서니 보슬비를 맞은 포도알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투박하지만 건강하고 알찬 열매를 보니 이곳의 와인 맛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충주에 와이너리라니. <작은 알자스>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둘의 만남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네요. 남편과는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났어요. 첫 소설을 쓴 직후 파리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의 집들이에서 친해졌죠. 이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연애하다가 프랑스에서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원래 엔지니어였어요.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던 중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고 싶다며 농업학교에 들어가 포도 재배와 양조를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와이너리를 알아보러 다녔어요. 남편의 고향인 알자스부터 비교적 땅값이 저렴한 남쪽까지 둘러봤어요. 농사지을 땅과 농기구, 와인을 만들기 위한 모든 장비까지 한 번에 판매하는 형태라 마음이 갔죠. 하지만 머나먼 타지에 정착할 자신이 없었어요. 남편에게 한국에서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 안했고 남편도 받아들였어요. 저는 오랜 타지 생활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고, 남편은 농사를 짓고 와인을 양조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던 거죠. 한국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다행히 남편에겐 모험심과 도전정신이 있었어요.

처음 남편이 와이너리를 운영하겠다고 했을 때 솔직한 심정은 어땠나요?
당황스럽긴 했지만 완전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어요. 남편의 고향인 알자스는 원래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었으니까요. 남편의 외할아버지 역시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었어요. 그는 어린 시절 포도밭에서 뛰어놀며 일손을 돕기도 했죠. 그때의 기억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남아있어 언젠가는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종종 얘기했습니다. 함께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남편이 회사에 다녔는데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업무량이 많아 새벽에 퇴근하는 일도 많았죠. 그게 가장 큰 계기가 되어준 게 아닐까요. (웃음)

ⓒ작은 알자스



동의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제 나이가 좀 더 어렸다면 남편의 결정에 쉽게 따르지 못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직장생활을 20년 이상해 왔으며,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데 저에게 말릴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동의했죠. 다만 후회가 없진 않았어요. 저는 소설가이다 보니 사업도 농사도 경험해 본 적이 없거든요.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에 부딪혔어요.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웃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거죠.

소설가로서의 삶이 그립진 않나요?
농사와 양조 일만으로 1년이 꼬박 채워지니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하긴 해요. 대신 농사와 양조 스토리를 담아 에세이 <인생이 내추럴해지는 방법>이라는 책을 냈어요.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내추럴 와인에 대한 이야기죠. 지금은 만화도 그리고 있어요. 언젠가는 판타지 소설도 완성하고 싶어요.

국내의 수많은 도시 중 충주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사실 저희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뜬금없는 지역이에요. 충주에 정착하기 전에는 포도가 잘 자라기로 유명한 영천과 영동부터 사과가 잘 자라는 양구까지 거의 1년 동안 적당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아는 분의 소개로 이곳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땅을 처음 봤을 때 ‘아 이곳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눈에 반한 거죠. 정하고 보니 제가 좋아하는 온천도 있고 물이 좋더라고요. 어떤 과일이든 잘 자란다는 장점도 있어요. 북쪽은 추워서 포도가 잘 자라지 않고 남쪽은 너무 더워 사과가 잘 자라지 않아요. 충주는 모두 잘 자라니 포도 와인과 사과 와인을 함께 만들 수 있죠. 이런 게 운명 아닐까요?



<작은 알자스>에서는 어떤 와인을 선보이고 있나요?
사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인 레돔 시드르와 포도로 만든 레돔 로제, 레돔 화이트, 레돔 레드 등의 내추럴 와인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포도 와인은 흔한데, 사과 와인(시드르)은 처음이에요. 우리나라엔 많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포도가 잘 자라지 않는 지역에서 사과로 와인을 만들어요. 또한 포도 와인이 등장하기 전에는 대부분 사과 와인을 마셨습니다. 포도 와인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그 수가 줄었지만요. 프랑스 전통 재배 방식으로 사과 내추럴 와인을 만들면 포도 와인에 비해 제조 과정이 까다롭고 정성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에 비해 당도가 낮으니 알코올 도수가 6도 밖에 되지 않아 가격을 많이 받을 수 없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프랑스 전통 재배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현재는 프랑스에서도 이 전통 재배 방식으로 사과 와인을 만드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우리가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애플사이다는 사과 농축액과 향, 인공 효모 등을 넣어 발효시킵니다. 인공 효모를 사용하면 발효 속도가 빠를뿐더러 과일의 품질이 좋지 않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적거든요. 반면 저희는 가을에 과일을 착즙해 사과 껍질에 붙어있는 천연 효모만으로 겨울 내내 발효 시켜요. 이 과정에서 효모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찌꺼기가 많아지는데, 위의 맑은 즙만 발효를 시켜야 하기 때문에 찌꺼기를 걷어 내고 맑은 즙만 탱크로 옮기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늦봄이 되어서야 병 속으로 옮겨 발효시켜요. 직접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면서 우리나라에 사과 와인을 만드는 곳이 왜 적은지 처음 알게 됐어요. 노고에 비해 정말 돈이 안되는 와인이랄까요. 그래도 천연 탄산이 주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청량감은 인공의 것과 완전히 달라요.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행복을 얻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자연에게도 좋은 와인이니까요. 만드는 사람이 편한 대로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효되는 술을 만들고 싶습니다. 남편의 철학이기도 하고요.



와인을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농사입니다. 하나의 와인이 탄생하는데 농사가 70%, 제조가 30%의 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요. <작은 알자스>의 술은 오로지 열매로만 만드니까요. 좋은 열매를 위해 자연과 우주의 리듬을 따라 열매에게 좋은 날을 고르는 ‘생명역동농법’을 택했습니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록한 달력을 농사에 적극 반영하는 농사법이에요. 열매에게 좋은 기운이 있는 날을 골라 착즙하는 등 최대한 자연의 힘에 맡깁니다. 저희가 만드는 와인처럼 ‘내추럴’ 한 거죠. 또한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가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해 땅을 다지는데 집중했어요. 잡초를 뽑거나 약을 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최적의 땅을 만들기 위해 퇴비가 될 수 있는 식물들을 빼곡하게 심어 다른 잡초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길게는 5년까지 걸리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비옥한 땅이 탄생해요.



<작은 알자스>의 레돔이 충주 특산물이 됐어요.
굉장히 뿌듯했어요. 처음부터 충주의 특산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지만 지역의 특산물을 잘 활용해야겠다는 목표는 있었습니다. 모든 과일은 와인으로 빚어졌을 때 떼루아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어요.

떼루아란 지역의 특색을 말하는 건가요?
비슷해요. 와인을 만드는 땅의 특징과 그때의 기후, 농부의 철학, 와인을 빚는 방법 등 와인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말합니다. 와인을 만드는 곳엔 그 과정의 긴 스토리가 담겨있고, 그 모든 것을 와인 한 병에 봉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와인 한 잔으로 그 공간 전체를 그리게 되죠. 예를 들어 와인을 마셔보고 ‘이 와인의 떼루아는 어디에요?’라고 묻는 경우처럼요. 충주는 사과의 고장이기 때문에 레돔이 지역의 떼루아를 담을 수 있는 와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작은 알자스〉의 미래가 더욱 궁금해지네요.
지금의 새하얀 <작은 알자스>는 이번에 저희가 새로 지은 건물이에요. 이 공간을 만들면서 새로운 목표들이 생겼습니다. 건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존재감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없던 땅에 공간을 차지하고 존재하니까요.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테이스팅도 하는 공간인 만큼 이곳의 떼루아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와인을 마셨을 때 ‘이곳의 떼루아가 잘 녹아있는 와인’이라는 생각이 들도록이요.
또한 네트워킹 공간으로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각자의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 목표는 ‘문화 양조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새로 지은 건물에 붙인 이름인데, 양조장이자 문화공간이라는 뜻이에요. 술과 농사와 관련된 작품들을 전시하고, 크고 작은 행사를 개최해 문화적으로 풀어나가려 합니다. 문화와 결합하면 술과 농사를 훨씬 친근하고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문화가 도시에 집중되지 않고, 오히려 시골에서 더 아름답게 펼쳐지지 않을까요. 이 공간을 저희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쓰이는 것이 제가 원하는 사업의 방식이자 목표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