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날
걷기 좋은 날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2.09.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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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종댕이길

등산은 부담스럽지만 깊은 숲속의 아늑함이 그립다면 충주의 종댕이길이 제격이다.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 곳곳에 마련된 쉼터, 충주호의 풍광이 한눈에 담기는 조망대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기 좋은 풍경 길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호수가 전부인 줄 알았던 충주는 예상외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가득했다. 삼국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적지와 늦여름의 무더위를 날려버릴 수상레포츠,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맛깔스러운 향토 음식까지. 덕분에 여유로울 줄 알았던 2박 3일간의 일정은 쉴 틈 없이 채워졌다. 충주 여행의 마지막 날, 곧 도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빡빡한 일정에 일탈이 간절해져서 였을까. 남은 일정을 소화하는 대신 도망치듯 종댕이길을 향해 달렸다.
종댕이길은 계명산과 남산 사이 마즈막재 삼거리에서 시작해 삼항산 한 바퀴를 도는 1구간, 역시 마즈막재 삼거리에서 시작해 계명산자연휴양림을 지나는 2구간으로 나뉜다. 모두 걸어보면 좋겠지만 시간도 체력도 부족한 에디터는 아늑한 숲길과 충주호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1구간을 택했다. 마즈막재 삼거리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두고 데크로드를 따라 오르는 것이 종댕이길 트레킹의 시작이지만, 1구간과 2구간이 나누어지는 곳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한다. 오늘의 목적은 트레킹 완주가 아닌 ‘여행 속 쉼표 찍기’이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리자 아담하고 정겨운 통나무집이 반겨준다. 삼항산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안내해 주는 ‘숲해설안내소’다. 건물 앞 보기 좋게 색깔별로 길을 표시해놓은 안내도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 본격적인 종댕이길 트레킹을 시작한다.



삼항산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산 중심을 가로질러 전망대로 향하는 1.2km의 가온길, 아이들이 자유롭게 숲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민 오막살이 숲이 있는 0.9km의 체험길, 가장 짧은 0.7km의 봉수터길 등 3개의 짧은 길 중 등산길과 하산길을 선택해 오르내리는 것, 마지막으로 삼항산과 충주호가 맞닿은 곳에 마련된 호숫길을 따라 산 한 바퀴를 빙 두르는 종댕이길의 핵심 코스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종댕이 길은 숲해설 안내소를 마주 보고 오른쪽에 있는 내리막길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내리막길이라니. 발걸음은 물론 기분까지 구름처럼 둥둥 뜬다. 방금 전까지도 가랑비가 슬며시 내려 우산을 챙겨야 하나 고민했는데, 울창한 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비를 막아준다.



‘종댕이길’이라 적힌 작은 푯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으니 오솔길로 접어든다. 이곳을 찾아오기 전부터 종댕이길 숲이 울창하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기에 기대가 컸음에도 실제로 마주한 종댕이길 숲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좁은 길을 감싸 안 듯 활엽수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기분이다. 비는 고사하고 햇빛 한 줌조차 허락하지 않는 빽빽함이다. 처음에는 당혹감에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이내 포근함이 온몸에 전해진다. 흔히 말하는 ‘자연의 품’이란 게 이런걸까. 발걸음 역시 흙의 무늬를 읽어내듯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수 겹의 나뭇잎 사이에서 은빛 날개를 단 요정이 당장 튀어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에 눈은 바쁘지만 마음은 한없이 느긋하다.



사방을 훑던 눈길은 어느덧 작은 연못에 닿는다. 치유와 건강의 숲을 상징하는 의미로 조성한 인공 연못이라는데, 인간의 손은 한 번도 닿은 적 없다는 듯 우거진 야생 연못의 모습을 하고 있다. 200m쯤 걸었을까. 이번에는 독특한 나무가 눈길을 빼앗는다. 한 뿌리에서 세 줄기가 뻗어나가고 있어 ‘삼형제나무’라 이름 붙여진 참나무다. 대부분의 참나무는 하나, 또는 두 개의 줄기를 내는데 세 줄기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으니 정말 삼형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한 번의 울창한 숲길을 지나 빽빽한 나뭇잎이 걷히자 탁트인 호수뷰가 눈앞에 펼쳐진다. 홀린 듯 다가가니 호수를 향해 나무데크가 튀어나와 있는 제1조망대가 나타난다. 조망대에서는 수려한 산세로 둘러싸인 넓은 호수의 풍경과 함께 물 위에 떠 있는 별 모양의 초록빛 인공섬이 담긴다. 황홀한 풍경에 잠시 멈춰서 있자 청량한 바람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낸다. 선풍기나 에어컨의 바람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상쾌하다. 데크에 누워 명상이라도 즐기고 싶은 풍경이지만 갈길이 멀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뒤이어 나타난 종댕이 고개를 넘고 나니 ‘종댕이나무’라 불리는 모자나무와 함께 팔각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에 숨어 바라본 충주호의 웅장한 자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데, 팔각정은 더욱 압도적인 풍경을 품고 있다. 제1조망대가 호수 위에 서있는 기분이었다면, 팔각정은 신선이 되어 충주호를 굽어보는 기분. 남은 길을 가늠해 보니 지금까지 온 길의 두 배를 더 걸어야 하지만 서둘러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스폿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닌 지금 눈앞에 놓인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껏 누리는 여행을 하자며 땀도 식힐 겸 팔각정에 앉아 신선놀음을 즐겨본다.
종댕이길은 비교적 평탄하지만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나고, 울창한 숲길과 탁 트인 호수 풍경이 교차해 지루할 틈이 없다. 흔히들 등산을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힘들게 노력하면 정상에 다다를 수 있고, 이제 신나게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체력이 좋지 않은 에디터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오르는 일도 내려가는 일도 모두 힘에 부쳤다. 너무 힘든 탓에 정상에 올라서도 ‘해냈다’는 생각보다 ‘이제 반밖에 못 왔구나’하는 생각이 먼저였다. 삼항산의 종댕이길을 걸어보니 이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르막이 있다는 건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고, 온통 시야를 뒤덮은 나무 때문에 홀로 남겨진 것 같다가도 탁 트인 풍경 앞에서는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인 것. 또한 어두운 구간이 길수록 밝은 구간 역시 길어진다. 어쩐지 뿌듯해진 마음을 품고 발걸음에 힘을 실어본다. 15분 정도 걸었을까. 충주호를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제2조망대가 슬며시 자태를 드러낸다. 데크에 올라서니 너른 충주호와 그 주변을 수놓은 짙푸른 산들이 거의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동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배를 타고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있지만, 이처럼 호수가 나를 감싸 안는 건 처음이다. 낯설지만 황홀한 기분에 다시 걸음을 멈춘다.



제2조망대를 지나면 이제부터는 마무리 구간이다. 종댕이길 삼항산 코스의 마지막 스폿이자 하이라이트인 출렁다리만 남겨두고 있으니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기분이 설렌다. 소원바위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짧은 계단이 나 있는데, 이 계단을 내려가면 충주호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약 100m 정도 이어지는 출렁다리는 다른 명소의 것처럼 아찔하진 않지만 수려한 충주호의 풍광과 시원한 바람, 은근하게 흔들리는 재미가 있어 매력적이다. 다리의 한가운데 서있으니 산과 산 사이를 오가는 바람의 촉감과 냄새가 제법 진하게 느껴진다.
장장 2시간에 가까운 트레킹이었지만 막상 완주하고 나니 뿌듯함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마치 동화 속을 여행하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그래도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였던 충주 여행에서는 물론, 인생에서 가장 큰 쉼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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