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눈 소식이 들려오면 어른들은 미끄러운 눈길 운전 걱정, 출퇴근할 자식 걱정 등 근심이 가득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눈 소식에도 무조건적으로 신나는 셋이 있다. 눈밭의 강아지와 어린이, 그리고 나다.
소식이 뜸한 눈 소식에 열심히 기상청 일기예보를 살핀다. 며칠간 잠복 서치를 하던 중 드디어 제주도에 눈 소식이 들린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만큼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없는 제주도이지만 1950m 높이의 한라산은 제주 도심과는 다르게 항상 하얀색 털 모자를 쓰고 있다. 그곳에 눈까지 온다니, 더 망설일 틈이 없다. 서둘러 짐을 꾸려 제주도로 향한다.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 새벽하늘을 달려 이름만 들어도 언제나 설레는 제주도에 도착했다. 전날부터 내린 눈으로 공항과 시내 곳곳이 제법 겨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잔뜩 힘주고 찌푸린 하늘에 은근슬쩍 설국을 기대해 본다.
설레임 가득 안고 허기진 배를 달래고 있을 때, 날벼락 같은 소식이 한통 전해진다. 산행 후 요즘 인기가 좋은 붉은오름 야영장을 갈 예정이었으나 폭설로 야영장을 폐쇄하여 오늘 오지 말라고 한다. 그와 함께 한라산 등산 코스도 모두 입산금지가 되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설렜던 마음까지 근심 걱정으로 함께 흐려진다.
모든 여행은 계획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 갑자기 생기는 돌발 상황도 즐겁게 극복하면 그 추억은 더 커진다.
자, 가자! 한라산으로!
한라산은 여러 탐방로가 있지만 크게 성판악과 관음사를 들머리, 날머리로 잡아 한라산의 정상 백록담을 오르는 코스와 한라산의 영실과 어리목을 들머리, 날머리로 잡아 윗세 오름을 들르며 한라산의 풍만한 허리를 감싸고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한라산이 처음이라면 정상을 들르는 코스, 여유롭게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영실이나 어리목 코스를 추천한다.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도로 사정으로 인해 11시경 어리목 탐방안내소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탐방안내소부터 멀리 한라산의 희고 통통한 얼굴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겨울철 산행은 특히나 준비할 것이 많다. 미끄러운 바닥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아이젠과 스틱, 쌓인 눈과 바람이 신발과 바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스패츠(또는 게이터), 그리고 영하 온도의 추위로부터 우리 손과 발을 보호해 주는 장갑과 울양말, 얼굴 주변을 보호해주는 바라클라바가 가장 기본적인 겨울철 등산 장비이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장비,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겨울철 야간산행을 계획하지 않았더라도 돌발 상황을 대비한 헤드랜턴이다. 낮은 산, 쉬운 코스라고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항상 철저한 준비로 사고를 최소화해서 모두 건강한 산행을 즐겼으면 한다.
어리목 탐방대피소는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주차장 주변에 제설작업으로 높게 쌓인 눈 위로 눈썰매를 타고 까르르 거리는 어린이들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산행을 시작한다. 한라산 허리춤으로 발을 내딛는 즉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전날 내린 폭설로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설국이 펼쳐진다. 계곡에 놓인 돌에도 생크림을 푸욱 찍어놓은 밤톨처럼 눈이 쌓여있다. 더 깊숙한 허리 춤으로 들어가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이어 우거진 숲으로 들어섰다. 그야말로 눈꽃터널이 시작됐다. 오래도록 한라산의 품을 지켰을 신비롭고 커다란 나무들과 그 위로 나뭇가지가 꺾일 듯 켜켜이 쌓인 눈이 이국적인 경치를 자아냈다. 어떠한 감탄사를 내뱉어야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말문이 턱 막힌다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 이 환상적인 눈꽃터널은 사제비동산(1428m)까지 1시간 정도 이어진다. 구석구석 바삐 눈에 담느라 조금 더 걸린 것 같기도 하다. 사제비동산을 앞두고 고개를 들었는데, 둥그렇게 모여 작당모의를 하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하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늘로 통하는 문 같았다. 오르막길 오르느라 고생했으니 목을 축이고 가라는 의미일까? 사제비 약수가 흐르고 있다. 사제비동산부터 는 눈꽃터널이 사라지고 눈 덮인 평원과 우리가 흔히 크리스마스 나무라 부르는 구상나무들이 나타난다. 의젓하게 눈보라를 모두 감싸 안고 꿋꿋이 서있는 구상나무들의 모습 역시 가히 장관이고 감동이었다. 만세동산을 지나 윗세오름까지는 백록담 남쪽 화구벽과 주변 오름들의 모습을 감상하며 평탄하게 걸을 수 있으나, 오늘은 날씨가 흐린 탓에 온통 하얀 세상 속을 걷는다.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좋지 못한 기상 탓에 남벽분기점은 통제라 윗세오름 대피소를 끝으로 더 이상 진행할 수없어 되돌아 내려와야 했다. 남벽의 장관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윗세오름까지 오면서 만난 세계 어느 곳에 내어놓아도 손색없이 빼어난 한라산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했다. 잠시 간식타임을 즐기고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오는 길, 새하얀 눈에 함부로 던져놓은 귤껍질, 바나나 껍질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과일 껍질은 동물들이 먹고 다 썩어서 괜찮아요’라고 말 하는 사람들은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러 올 자격이 없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과일이 아닌 경우 오랜 보존을 위한 약품 처리가 껍질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잘 썩지도 않고, 동물들이 먹어서는 더더욱 안된다. 설령 아무리 이로운 것이라도 내가 가져간 것은 모두 빠짐없이 되가져 돌아와야 한다. 올해는 부디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들의 의식이 개선되어 다 같이 아름다운 자연을 아끼며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절실히 깨달으며 다시 그 하얀 순백의 터널을 지나 내려온다. 아니 이 이상한 한라산은, 분명 올라갈 때 갔던 길이었음에도 또 다른 매력으로 자꾸만 내 발길을 잡아끈다. 평소라면 빠르게 끝마쳤을 하산길이 더디기만 하다. 산행 중 만난 외국인도 감탄사를 내뱉는다.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따봉을 날려주었고 따봉 답을 받았다. 나라, 연령, 성별 관계없이 자연이 주는 이 벅찬 감동과 기쁨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산행을 마친다.
모든 삶은 타이밍이다. 보고 싶어도 못 보기도 하고, 보기 싫어도 보게 되고, 하고 싶어도 못 하기도 하고, 하기 싫지만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문밖의 활동을 즐기며 자연에서 세상의 이치를 많이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 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한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바로 짐을 꾸려 밖으로 나가자!
Sleep Outside! Have Fun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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