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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가 품은 전통
전주가 품은 전통
  • 신은정 | 양계탁, 아웃도어DB
  • 승인 2022.01.28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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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부채, 한옥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 가장 어렵다. 잃어버리기도 쉽고, 잊어버리기도 쉽다. 전주는 그리도 긴 시간 동안 한국의 정체성을 품에 안고 우리를 부른다. 한국 문화를 지켜온 전주, 이곳이 간직한 우리의 전통은 뭘까.

천년을 가는 한국의 종이, 한지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 한지는 천 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전통 한지는 독보적인 질을 인정받았다. 일본의 화지와 중국의 선지에 비교해서도 우수한 품질을 자랑했다. 전통 한지는 보온성과 통풍성이 우수해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는 빨아들였다가 내뿜어 건조했을 때 찢어지지 않아 질기고 내구성도 좋다. 서예지, 공예지, 창호지, 장판지 등 쓰이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게 활용했던 한지는 우리의 역사와 함께해 온 전주의 전통문화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가공해서 손으로 만든 종이로, 정성으로 만든다. 먼저 닥나무를 채취해서 껍질을 벗기고 백피를 만든다. 이를 잿물로 삶은 뒤에 물에 씻어 평평한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긴다. 그리고 닥풀뿌리 진액을 섞어 지통에 넣고 외발틀로 떠서 말리고 도침으로 마무리한다. 한지가 우수한 품질을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전통 제조 방법에 있다. 잿물로 원료를 삶아 종이 강도를 높이고, 닥풀을 사용해서 섬유를 부드럽게 만든다. 전통 후처리 방법인 도침은 다듬이질의 한 형태로, 종이 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두드리는 것을 말한다. 도침을 거치면 광택 효과가 나고, 보풀이 없어져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다.

한지의 원재료인 닥나무가 많이 생산되고 종이의 품질을 결정하는 물, 즉 전주천의 우수한 수질 덕분에 전주의 한지는 최상품이라고 평가받았고 조선시대에 왕실로 바치는 물품 중 하나였다. <여지도서>와 <대동지지>에도 조선시대 전주의 한지가 최상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전주는 문화가 일찍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한지의 수요가 많아 더욱 발달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출판문화도 함께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한지는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 색깔, 쓰임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생산지에 따라서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데, 전주에서 생산된 한지는 선자지, 간장지, 태지, 죽청지, 화선지 등으로 불렀다

양반들의 애장품, 부채
한지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던 전주에서는 한지로 만든 공예품 또한 활발히 생산됐는데, 그중 하나가 부채였다. 때문에 전주 감영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부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선자청’이라는 기관을 설치했고, 매년 단오절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부채를 직접 하사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부채의 종류는 크게 접히냐, 접히지 않느냐로 구분된다. 접히지 않는 부채는 단선이라고 하고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는 접부채라고 칭한다. 단선에는 태극 선, 까치선, 미선, 파초선 등이 있고 접부채로는 칠접선, 합죽선, 철선 등이 있다. 전주의 전통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부채는 합죽선이 대표적이다.

합죽선은 대나무의 껍질을 얇게 깎아 두 겹으로 부챗살을 맞붙여 만든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전통 합죽선은 6개의 제작 공정을 거쳐 생산했다. 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내고, 민어의 부레를 삶아 만든 부레풀로 대껍질 두 개를 하나로 붙여 부채의 살을 만든다. 속살과 변죽에 인두로 문양을 그려 넣은 뒤 광을 내 속살을 매끄럽게 한다. 다음으로 부채에 종이를 붙인 뒤 장식용 고리인 사북으로 부채를 머리에 고정하면 완성이다. 우리 전통 기술로 만든 합죽선은 가벼운 무게로 휴대가 편하면서도 잘 찢어지지 않아 오래 쓸 수 있다.

합죽선은 양반들의 애장품이었는데, 과시욕이 살짝 담기기도 했다. 시나 그림을 그려 넣어 자신의 학식과 예술적 소양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죽선을 들지 않으면 양반 축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판소리를 할 때도 무대를 더 풍성하게 보여주는 소품으로 사용했다. 전주 부채가 아직까지도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전통 부채를 만드는 장인인 ‘선자장’들이 전주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집이자 고향, 한옥
전주에 가면 100년을 이어온 전통이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만난다. 바로 전주 한옥마을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700여 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한옥촌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어 건물 형태와 구조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 안에서도 100년이 넘은 고택에서는 전주의 역사를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 중 하나인 ‘학인당’은 조선 말기에 궁중 건축양식으로 지은 한옥이다.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재 백낙중이 장자 남혁이 태어난 기념으로 압록강과 오대산에서 최고급 목재를 구해와 경복궁 건축에 참여한 도편수와 대목장이 함께 지은 건물로, 1905년부터 2년 8개월 동안 백미 8천 가마의 공사비와 4280명의 공사 인원을 투입한 만큼 그 규모가 굉장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50억 원의 가치라고 한다. 이 집을 지은 백낙중은 남다른 효자로 알려져 있어, 고종으로부터 승훈랑 영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솟을대문에 명필 김돈회가 쓴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는 현판을 걸었다.

본채는 백낙중의 호 인재 가운데 인자를 따서 학인당으로 명명했다. 학인당을 한 바퀴 돌아보면 숨겨져 있던 역사가 보인다. 이곳은 판소리 공연을 염두에 두고 한국의 문화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에, 문화의 본거지였던 전주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본채는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극장이다. 판소리 공연을 할 수 있도록 2층 높이 천장과 100여 명의 청중이 모여 관람할 수 있게 지어진 대청을 중심으로 실내공간이 일반적인 한옥 3채 크기의 가변형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정원의 중심에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담아 국권 회복을 기원하는 연못이 있다. 조선왕조가 쇠퇴하던 당시에 나라 잃은 슬픔을 우리나라의 모양을 뒤집은 형태의 연못으로 만들어, 세상이 다시 뒤바뀌어 조선의 국권이 회복되길 기원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의 영빈관으로 사용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은 종손이 직접 거주하면서 한옥숙박체험, 전통문화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문화 정체성을 담고자 했던 학인당의 신념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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