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부산 여행
나 홀로 부산 여행
  • 김주현 | 김주현
  • 승인 2021.10.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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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 커피 그리고 술

혼자만의 시간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온다. 행복한 공간은 특별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와봐야겠다.

광안대교 그림자 아래서 패들 보드에 몸을 밀착시킨 채 대교 위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자동차의 헤드 라이트에 불빛이 하나하나 들어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움직이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하얗고 노란 불빛들들이 눈가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불멍인가?’ 의도치 않은 불멍의 여유도 잠시, 부산에 혼자 왔다는 현실이 빛처럼 번쩍였다.

몇 시간 전까지 계획도 없이 부산에 도착해 창이 크게 난 카페에 앉아 가볍게 와인 한 잔을 들이켜고 있었는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멀지 않은 곳에 패들 보드를 빌려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마자 목구멍 안으로 와인을 쏟아붓고 근처 보드 숍으로 움직였다. 보드를 빌린 후 러닝을 하려고 가져 온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충분히 몸을 풀고 보드에 올라타 광안대교를 향해 노를 저어 가는 절차는 순식간에 진행됐다.

내가 빌린 보드는 보통 보드에 비해 특별할 건 없지만, 초 저녁이면 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선셋 보드’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해지는 건 보지 않고 적당히 어스름해질 무렵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해가 바다에 풍덩하고 빠지면 바닷물이 따뜻해진다는 어느 꼬마 아이의 믿음과 달리 어른인 나는 시월의 밤바다가 꽤나 춥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된 데에 딱히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의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 놓고 집에서 쉬려고 짧은 휴가를 썼을 뿐이었다. 그런데 휴가 첫날, 소파에 늘어져 습관적으로 이곳저곳의 항공권을 검색하다가 상식 밖으로 저렴한 부산행 티켓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여행지와 만나는 것에 있어 무엇보다도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무궁화호보다 저렴한 비행기 티켓을 어떻게 마다하겠는가. 혼자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너 무슨 일 있어?” 라거나, “여자 친구랑은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어서 누군가 만나러 간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산에 누가 살더라...?’

그러고 보니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D.P>라는 군대 드라마를 보고 생각났던 한 선임이 부산에 살고 있었다. 다른 생활관 후임인 내가 언성을 높여 감정적으로 싸운 날에도 다음 날 먼저 사과했던 멋있는 선임, 나를 꽤나 잘 챙겨줬던 동갑내기 J였다. 몇 해 전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그를 떠올리니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이왕 부산 가는 김에 J를 만나고 오자!’
김포공항으로 가는 9호선 위에서 J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고는 가고 싶은 곳을 대충 지도 위에 추가하고 보니, 내 여행의 이름이 정해진 듯했다. “서핑, 커피 그리고 술”.


비행기에서 잠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서울과 달리 화창한 부산의 날씨가 마중 나와 반겨주었다. 선임 J와의 약속은 마지막 날 밤이었는데, 그를 만나기 전까지 혼자 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걸까?

오엘이커피 하우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오엘이커피 하우스’(@olecoffeehouse)’였다. 워낙 요즘 전포역 주변이 핫하다고 들어서 SNS에 나오는 웨이팅이 긴 카페는 패스하고 찾아간 곳이었는데 예상대로 평화롭고 기분 좋아지는 공간이었다. 내가 갔을 땐, 신기하게도 한국인보다 외국인 손님이 많아서 건강한 디저트와 깔끔한 음료를 주문하고 보니, 발리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고양이와 함께 햇살을 만끽하며 무화과 요거트와 커피를 마시곤, 다음 장소로 향했다.

쟝고커피
그다음 찾아간 곳은 광안리에 위치한 ‘쟝고커피(@django__coffee)’였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가는 길 끝에 바다가 보였다. 내리쬐는 햇살에 반짝이는 타일을 따라가다 보니, 눈에 띄는 와인 바 겸 카페가 보였다. 억지스럽지 않은 느낌을 주는 목재와 큰 창, 그리고 바이닐들이 각기 제자리를 찾아 위치해있었다. 시월인데도 아직 날이 더워서 화이트 와인 한 잔 주문했는데, 평소 좋아하는 나테라 블랑이 나왔다. 힙스럽지만 억지스럽지 않은 공간에 맛있는 와인까지. 아마 새로 생긴 곳이 아니었으면 사람이 바글바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로 주변에는 광안리 해변이 있는데, 해 질 녘 선셋 보드를 즐기는 걸 추천한다.

서피서피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모닝 서핑을 위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서피서피(@surfysurfy.co.kr)’ 아래 있는 작은 토스트 가게의 테라스에서 토스트를 먹으며 기지개를 켰다. 파도 차트에는 분명 파도가 없다고 적혀있었지만, 적당한 온도에 질 좋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아침이라 그런지 유독 반짝이는 바다에서 파도를 타니 기분이 좋았다. 마치 파도보다는 윤슬 위를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행복했다.

라이프 커피 앤 티
서핑이 끝난 후, 그 기분을 이어나가고 싶어서 찾아간 곳은 와우산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라이프 커피 앤 티(@lifecoffee_and_tea)’였다. 카페는 4층이지만, 일층부터 감각적인 가구와 책, 각종 소품과 옷도 팔고 있어서 천천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4층에 위치한 카페는 들어가자마자 높은 천장이 시원했고, 큰 창 너머로 아까 만난 파도 위 윤슬이 여전히 나를 유혹하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향긋한 드립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하고는 “아 좋다!”라는 말을 몇 차례 뱉었다. 오랜 시간 이 공간에 머물다가 여자 친구에게 줄 기념품을 구매하곤 계단을 통해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타타 에스프레소바
커피를 많이 마시긴 했지만, 시간도 남았고 부산에 사는 몇몇 지인이 애정 한다며(?) 추천해 준 ‘타타 에스프레소바(@tata_espressobar)’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맛있는 커피를 먹을 때 나는 “쫄깃하다”는 표현을 자주 하곤 하는데, 쫄깃한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핫한 에스프레소바 답게 웨이팅이 조금은 있지만, 기다리는 동안 고즈넉한 시장의 모습과는 달리 구석구석 트렌디한 빵집, 카페, 와인샵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금세 자리가 생긴다.

로우 앤 스윗
돌아가는 길에, 자동차 창문 밖으로 눈에 띄는 카페를 발견했다. ‘로우 앤 스윗(@raw.and.sweet)’이었다. 입구부터 사람들이 널브러져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시원한 롱 블랙 한 잔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맛있는 롱 블랙이 있었다. 카페의 타일과 소품들은 마치 뉴욕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해 주었다. 뒷마당과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의 머리칼이 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구경하며 얼음까지 우걱우걱 부숴먹고 만족하며 오늘의 마지막 카페로 이동했다.


이렇게 혼자 서핑과 커피, 와인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가, 선임을 만나 부산의 로컬 횟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난 나머지 마지막에는 정신을 잃고 핸드폰도 잃어버렸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덕에 돌아가는 날은 그 누구와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완벽히 혼자가 된 것이다.

물론 여행지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장점이 있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서(사투리를 들으면 또 영어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스스로의 타인이 되어 그 누구의 눈치 따위 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이 좋은 공간들ㅡ위에서 소개한 공간들ㅡ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왔다면 어땠을까? 공간의 한구석에 존재하는 공허와 외로움을 우리들의 온기와 대화들로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혼자만의 시간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온다. 행복한 공간은 특별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와봐야겠다. 더 따사로운 부산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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