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일순의 산 속 이야기
배우 최일순의 산 속 이야기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1.10.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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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터 게스트하우스

덕산기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산 속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갔다. 깊숙한 곳일 수록 더욱 신비로운 풍경이 평탄치 않은 산길의 고됨을 씻어낸다. 덕산기 마을 가장 끝에 다다르자 저 멀리 정겨운 황토 산장의 주인, 최일순 씨가 말간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여행 기자에게 있어서 강원도 정선은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곳이다. 수억 년 전부터 형성된 기암절벽과 첩첩산중 속 마주하는 자연의 맨 얼굴은 계절마다 새롭고, 그것들을 이용하기보단 이웃 삼아 어우러져 사는 정 많은 사람들은 자꾸자꾸 보아도 좋다. 이미 여러 번 정선을 방문했지만 이번 정선 취재를 기다리는 마음은 사뭇 달랐다. 깊은 산속에 자리한 산장에서 오지 생활을 체험해보기로 한 것. 이미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덕산터 게스트하우스로 가기 위해 덕산기 마을로 달려갔다.

덕산터 게스트하우스는 ‘은둔의 땅’이라 불리는 덕산기 마을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사륜구동 차가 아니라면 마을 초입, 솔밭밑민박에 주차를 한 후 두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물길을 따라 난 길은 온통 자갈밭인데다 계곡물에 잠긴 구간도 꽤 많기 때문. 덕산터 게스트하우스에서 픽업 비용을 지불하면 트럭을 타고 올라갈 수 있지만 언제 또 덕산기의 속살을 샅샅이 볼 수 있을까 싶어 도보를 선택했다. 물에 잠긴 구간은 바위로 징검다리를 만들어 두었는데, 전날 비가 온 탓에 징검다리마저 잠겨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걸음을 재촉했다. 평탄한 길은 아니었으나 중간중간 때묻지 않은 신비로운 자연을 마주할 때마다 그간의 피로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30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언덕 위 황토색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숨겨진 집이라니. 설렘과 호기심이 정선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입구에 다다르자 계량 한복을 차려 입은 주인, 최일순 씨가 덕산기의 맑은 자연을 닮은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온통 풀과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앞마당에 앉아 있으니 마치 자연의 품 안에 안긴 듯 포근하다. 눈앞에는 정겨운 농가의 풍경이 펼쳐지고 이따금씩 풀벌레 소리와 계곡의 물소리가 아늑함을 더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간의 주인이라니, 궁금한 점이 끊이지 않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산장 주인의 프로필이 심상치 않다. 오지 전문 여행가이면서 여행 작가이고, 오지 산장의 호스트다. 그 이전에 연극계와 영화계를 종횡무진하는 배우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연극을 관람하게 된 후 연기의 매력에 사로잡혀 배우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30년 전 데뷔작인 <파업전야>를 시작으로 <태백산맥>,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덕혜옹주> 등 유명 영화에 등장해 인상깊은 연기를 남겼다. 최근에는 유관순과 열사들의 서대문 감옥살이를 그린 <항거>에 출연해 뼈아픈 역사 속 인물을 대변하기도 했다. 처음 배우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해준 연극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여행 작가로 활동할 만큼 글 솜씨가 좋은 그는 직접 연극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문득, 그의 연기 생활이 ‘오지 전문 여행가’라는 또 다른 직업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계획이나 목표가 있는 여행은 아니었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향하며 새로운 풍경과 낯선 상황, 예상 밖의 고난을 겪다 보니 자유와 희열이 몰려왔다. 여행의 매력에 다시 빠져버린 것이다. 이후 1년 중 반은 여행을 다니고, 나머지 반은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 동남아와 인도, 몽골, 중국, 티베트 등의 알려지지 않은 땅을 찾아 다니다가 여행사의 직원으로 일하게 되기도 했다. 주로 루트 개척과 가이드가 임무였다. 오지를 여행하다 보니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아프리카에서 국경을 넘다가 총격전을 마주하기도 하고, 몽골의 허허벌판에서 동사 위기도 간신히 넘겼다. 그래서인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요즘 말로 ‘쿨’하게 느껴진달까. 고기를 굽다가 불이 옮겨 붙어도 별일 아니라는 듯 진압하고,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벌이 콧등에 앉아도 휘휘 젓고 만다.

20년 전, 그는 연기와 여행을 하면서 만난 예술가들과 함께 할 아지트를 꾸리기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사실 이 정겨운 전통 화전민 농가는 지어진 지 70년이 넘은 친할머니의 생가다. 터는 무려 400년 가까이 됐다. 거의 버려진 채 방치돼 있던 집을 먼 친척에게서 구입해 시간이 날 때마다 손수 고치고 다듬은 것. 이젠 어머니의 품처럼 언제든 달려오고 싶은 공간이 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치기 전엔 이곳에서 뮤직 페스티벌을 열기도 했다. 깊은 산골짜기에 3박 4일간 총 450명이 몰렸으니 나름 성공적이었다. 방문객의 3분의 1이 외국인일정도로 외국인의 반응도 좋았다.

현시대를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그렇듯, 최일순 씨도 산속에서 코로나19 이후의 덕산터 산장을 상상해본다. ‘한국의 우드스탁’처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껏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페스티벌을 열고, 본채 뒤편에 세워지고 있는 작은 건물에는 전시를 개최할 생각이다. 이 전시 공간에는 그가 수년간 여행을 다니며 직접 찍은 사진과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진귀한 골동품들을 선보인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실컷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푸르스름한 땅거미가 산속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한껏 차분해진 분위기와 달리 최일순 씨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리 예약해 놓은 정선 시골 밥상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덕산터 게스트하우스는 숙박 외에도 픽업과 저녁 밥상을 필요에 따라 미리 예약해야 한다. 오지 특성상 갑자기 준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 전통 커피, 주막 체험 등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이 준비돼 있으니 원한다면 사전에 예약해 두는 것이 좋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활짝 펼쳐진 앞마당에 테이블을 놓고 랜턴을 켜니 산장의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는다. 부엌에 들어갔던 주인은 금세 갖가지 요리를 만들어 펼쳐놓는다. 얼큰한 두부찌개부터 지역 특산물인 곤드레로 지은 곤드레 밥, 직접 담근 김치와 갓 따온 배추쌈까지 푸짐한 한 상이다. 여기에 정선 옥수수 막걸리 한 되를 곁들이니 임금님 상이 따로 없다. 보통 손맛이 아니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기 전엔 맛집이 즐비한 인사동에서 유명한 주막을 운영했다고. 평소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기도 버거운 에디터가 순식간에 두 그릇을 싹싹 비웠으니 말하지 않아도 알 법 하다.

속의 밤은 유독 달콤하다.
빛이라곤 하늘에 뜬 별이 전부인 짙은 어둠, 자장가처럼 울려 퍼지는 풀벌레 소리, 향긋한 풀 내음까지 삼박자가 완벽하게 갖춰 진다. 딱딱한 나무 침대에 침낭 하나 놓고 자는 것이 은근히 걱
정스러웠는데 집에서 보다 더 오래, 숙면을 취했다. 한결 가뿐해진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오니 먼저 일어난 최일순 씨가 모닝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계곡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맞이한 여유를 마음껏 누렸다. 갓 만든 것처럼 신선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자니 도시에서의 치열한 생활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사람은 없어요”

대부분의 손님이 단골이라는 덕산터 게스트하우스. 이곳에 오기 전 미리 보았던 숙소 예약 사이트에서 후기가 5점 만점에 5점이었던 것이 떠올라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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