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우다영 인터뷰
소설가 우다영 인터뷰
  • 고아라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1.09.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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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고도 낯선 삶을 그리는 예술가

책을 읽다 보면 문득 ‘그래, 내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 하며 공감하게 된다. 늘 지나온 것들에게서 오는 익숙함과 늘 함께여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에게서 오는 낯섦, 이 간극을 성실하고 소중하게 다룬 우다영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쩐지 삶이 든든해진다.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소설가 우다영입니다.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두 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나요?
어쩌다 소설가가 되었을까. 저도 매번 다른 계기와 인과를 생각해보는데요, 요즘 쓰고 있는 소설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어요. 소설의 일부 내용은 이러합니다. 한 여왕이 사랑하는 어린 딸을 위해 숨고 놀 수 있는 미궁을 지었는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딸은 미궁보다 앞서 훌쩍 자라버리고 결국 사이가 틀어진 딸이 왕위를 찬탈합니다. 딸은 미궁 안에 높은 탑을 쌓아 자신에게 반하는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탑 옆에 나란히 어머니와 그들을 기리는 위령탑을 지으라 명합니다. 위령탑의 종을 만들게 된 장인은 수십 년간 종소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종을 부수다가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병이 나 죽습니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났을 때 미궁과 두 탑은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요새가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풍요로운 시기가 왔을 때 그곳은 호화로운 성이 되고, 민심이 흔들렸을 땐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성당이 됩니다. 세월은 계속 흘러 변하고 무너지고 결국 폐허가 된 그 터를 바라보며 누군가 이곳은 무엇이 있던 자리고 누가 왜 만든 것이냐고 묻는데, 아무도 그곳에 있던 것이 무엇이고 누가 만들었으며 그것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책을 좋아하고 문예창작학과를 다녔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제가 계속 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설가’라고 하면 막연한 동경심이 생겨요. 실제로 어떤 직업인가요?
소설을 쓰는 시간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특별히 다른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때때로 사람들을 만나고,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합니다. 다만 나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무엇에 관심이 가고, 무엇에 흔들리고 있는지. 무엇이 궁금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방법인 소설쓰기를 선택합니다.

등단작인 <셋>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셋>은 각자 알고 있는 것과 숨기고 있는 것이 달라 미묘하게 진실로부터 왜곡된 채 균형을 잡고 있는 세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 내가 안다고 믿는 그 이야기가 실은 접히거나 휘거나 가려지거나 축소 혹은 확대된 상태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시작했고, 진실을 정확히 볼 수 없다는 것만이 분명한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당시에 저까지 세 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 관계의 본질을 파헤쳐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등단 후 4년 만인 2018년에 첫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을 냈어요.
그 소설들을 쓸 때 저는 무엇보다 이 세계의 이상함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놀랍고도 이상하게 움직이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이 어떤 일을 겪고 그 일을 어떻게 지나가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그 소설들을 읽으면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 일이 지나갔다는 사실 때문에요.

<밤의 징조와 연인들>은 특히 2030세대의 많은 공감을 얻었어요.
이 소설집에는 연애와 학창시절, 유년시절의 전경이 있고, 일상에서 때때로 나를 관통하는 서늘한 예감들이 있습니다. 모두 제가 보았다고 믿고 있는 장면들이어서 그것에 공감해주는 분들을 만나면 반가워요. 우리가 언젠가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이니까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삶을 살았고 그때마다 모두 다른 마음을 먹고, 그 안에 만들어진 풍경은 모두 다를 텐데 어째서 우리는 거기서 비슷한 것을 볼까요?

<밤의 징조와 연인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들이 인상적입니다. 소설 속 캐릭터는 어떻게 탄생하나요?
사실 첫 소설집의 소설들을 쓸 때 인물을 만들어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먹지 않았어요. 인물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소설가가 소설 속 인물들에게 무관심 했다는 것이 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소설이 좀처럼 거기서 시작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소설이 인물에게 도착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는데요. 소설을 쓰면서야 비로소 내가 쓴 인물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내가 그들을 언제나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던 것 같아요. 소설은 사전과 사후 양쪽에서 모두 완성된다고 자주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소설은 종이 속에만 얌전히 적혀있는 단일한 부동체가 아니라 소설 밖의 모든 것과 연결된 유기체의 작용 전반이라고 믿고 있어요. 물론 소설을 쓰는 저도 소설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고 나면 저는 그 익숙하고도 낯선 인물들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됩니다.

가장 최근에는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이 출간됐어요. 어떤 소설인가요?
<밤의 징조와 연인들>이 이상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단편적으로 도려내어 드러낸 정경이라면,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세계를 이상하게 만드는 그 모든 일들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따라간 소설들인 것 같아요. 그 먼지 같은 모든 일부가 어떤 흐름을 그리는지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무엇이 있는지 탐구해 보고 싶었고, 그래서 두 소설집은 저에게 거울에 비친 반전된 두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에서는 다양한 시공간이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의도가 궁금합니다.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는 시공간은 대개 하나라고 여겨지지만 실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고, 설령 그것이 단 하나의 시공간일지라도 우리가 믿고 있는 단순한 형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세계를 그렇게 인식하지 않거든요. 예를 들면, 우리는 일상 속에 있을 때 나를 둘러싼 실재하는 세계를 감각하면서도 머릿속으로 기억이나 상상을 떠올릴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실재와 비실재의 세계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과연 비실재라는 것은 뭘까요? 진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영향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을 비실재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침에 꾼 무서운 꿈이 그날 하루에 아무런 선택과 방향을 좌우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이 시대의 우리는 중첩된 세계들이 실체화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다가오는 차를 조심하면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먼 나라의 지진 뉴스를 보고, 전화기 너머 친구의 슬픔을 들으며, 미래에 있을 나의 슬픔을 떠올릴 수 있어요. 오래 전에 죽은 작가의 책을 읽으며 오래 전에 죽은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눈앞에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어요. 실재와 비실재의 세계를 경유한 여러 겹의 내가 갈라지고 다시 합쳐지며 살아가는 것인데 저에게 시공간이란 그런 나선 타래의 모양과 흡사하게 여겨지고 그런 인식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습니다. 그런 구조와 표현 방법이 자연스러운 세계의 모양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의 사과가 실재 사과와 다른 색의 명암을 가지고 있을 때, 또 다른 모양새의 원근법을 적용했을 때 더 진짜 같은 것처럼요.

우다영 작가의 소설들은 우리가 평소에 자각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성실하고 소중하게 묘사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건 제가 소설의 도움을 받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제가 그 순간들을 소중하게 기억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 했을 테니까요.

이쯤되니 우다영 작가의 소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궁금해지네요.
문득 이것이 소설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생각이나 장면, 목소리, 문장, 기분 같은 것들이 그렇게 되는데 하나의 입구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순간 내가 이전에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 갑자기 중요해지기도 해요. 소설이 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이미 나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것들이 많아요. 운이 좋다면 지나간 그것들을 다시 붙잡아 이어보고 섞어볼 수 있어요. 주로 소설을 쓰고 있을 때 다음 소설을 이렇게 쓰면 되겠다고 마음먹고 그것을 써보려고 노력합니다.

아무래도 창작을 하다보니 슬럼프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극복하는 편인가요?
극복은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계속 쓰는 것이 도움이 돼요. 그러다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 못 견디는 마음이 들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 있다면?
<노크>와 <해변 미로>를 좋아합니다. 가끔 그 소설들을 읽고 싶을 때가 있어요.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솔직했던 소설들이라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요?
한 편의 소설을 쓰고 나면 늘 그 소설에서 제가 해내지 못한 것들을 알게 돼요. 새로운 질문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럼 저는 다음 소설을 쓰게 되는데, 계속해서 그런 소설들을 쓰는 영원한 상태의 작가가 된다면 어떨까 가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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