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뻔한 일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고난과 답답함의 연속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빛나는 구간들이 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로맨틱 코미디가 싫었던 것 같다. 단지 영화 장르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좋아한다고 생각해온 많은 것들이 멀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정확한 원인을 끄집어낼 수 없지만,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단어와 내 상태가 비슷한 것 같았다.
‘삶태기’
정확한 단어의 뜻이 생각나지 않아 인터넷을 켜고 자음과 모음을 이리저리 조립해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양양에 잠시 머물렀던 K였다.
“K 오랜만이다. 무슨 일이야?”
“양양 놀러 온다며 너 언제 놀러 올래? 이 집 조만간 팔려.”
K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남겨놓으신 양양 시골집을 판매 목적으로 개조해 관리하며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매매가 빨리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고 했다. 나는 찰나의 고민도 없이 얘기했다.
“그럼, 금요일에 퇴근하고 바로 출발할게!”
K와의 전화로 검색창 위의 단어를 완성시키는 일은 잊어버린 채 노트북을 닫았지만, 그 단어는 이미 나를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만들고 있었다.
금요일, 사무실에 앉아있다 컴퓨터가 종료되기도 전에 양양을 향해 잽싸게 퇴근했다.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저녁 시간에 맞춰 K를 만날 수 있었다. 큰 덩치와 달리 맥주 한 잔만 마셔도 힘들어하는 K와 맥주 한 캔을 사놓고 늦게까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양양 현지인이 된 K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양양의 시골길을 달리기로 했다. 양양의 북쪽 끝에 붙어있는 물치항에서 서핑을 하고 나서 해안가를 따라 가지런히 놓여있는 자전거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정암해수욕장 주변을 지날 때쯤, 문득 K와 내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위치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주선에서 튕겨져 나와 행성을 탐사하는 선원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그렇게 느낀 건 선선한 공기와 탁 트인 경치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자 진짜 원인은 지난주 강원도를 강타한 태풍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태풍은 부서진 나무 기둥을 해안가 이곳저곳에 자비 없이 꽂아 두었고, 바다도 평소와는 다른 색을 내며 성나게 불어난 몸 덩이를 마치 태양 경계면에 위치한 불꽃처럼 일으키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힘을 들이지 않고 관성에 몸을 맡겨 앞으로 나아가니, 미지의 행성에서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내던져진 것 같아 마음이 이상하게 상쾌했다.
'야- 시원하다!’
조금 더 페달을 밟자 저 멀리 네모 모양의 소형 우주선이 보였다. 뭔가 하고 다가가 보니 큐브 모양의 민트색 캠핑카였다. 그 차 앞에는 민트색이 어울릴만한 나이의 커플이 행성의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며, 컵라면을 후루룩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나도 지금 막 처음 발견한 행성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로맨틱 코미디가 좋아지는 순간이 오면 다시 이 장소를 방문하리라고 다짐하곤, 여행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돌아왔다. 그 사이에 H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늘 같은 일상도 반짝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소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취향도 나와 꽤나 비슷했다. H 덕분인지 다시 로맨틱 코미디가 좋아졌고, 어느 날 어디론가 떠나자고 H가 말을 건넸을 때 문득 민트색 캠핑카가 떠올랐다. 우리 둘 다 캠핑의 ‘캠’ 자도 모르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들 ― 텐트 대신 가벼운 파라솔, 물건이 담긴 접이식 탁자, 편한 의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기였다.― 을 챙겨 가벼운 몸으로 떠났다.
우리의 계획은 간단했다. 일찍 정암 해수욕장 도착해서 고기를 먹고 자다가, 수영을 하다가, 시원한 와인을 마시는 것.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침부터 오후까지 늘어지는 것’이었다. H와 나는 새벽 4시에 서쪽에서 만나 출발했고 세 시간 반쯤 후에 동쪽, 정암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정암 해수욕장은 모래사장과 자갈, 잔디밭이 함께 공존해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쯤 그 땅 위로 비가 촉촉이 내리며 여전히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아우라를 풍겨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비가 내려서인지 노지에 차량 입장이 제한되어 있었다. 차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에겐 파라솔이 있으니까. 활짝 펼쳐진 하얀색 파라솔 아래에서 대충 고기 구울 준비를 하고 보니, 등 뒤에 차가 없으면 사방에서 비바람이 몰아쳐 물에 젖은 고기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H와 나는 라멘에 들어간 챠슈처럼 물에 빠진 고기를 선호하지 않아서, 이미 맞춰 본 사람처럼 파라솔을 해체하고 바로 자리를 이동했다.
자리를 옮긴 곳은 회사 동기와 차박을 했던 경험이 있는 송지호 해수욕장이었다. 사람 이름 같은 이 해수욕장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송지호라는 호수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차박을 좀 해봤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훌륭한 차박 명소다. 그래서 그런지, 정암 해수욕장과는 다르게 오전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이미 많은 SUV와 텐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 빨리 자리를 펴고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에, 하이에나처럼 남는 자리를 물색했고 마침내 저 멀리 빈자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미 미국산 대형 SUV가 주차되어 있는 공간 옆으로 꽤나 많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H, 우리 저기 가면 되겠다!"
H에게 신이 나서 말하며 엑셀을 거칠게 밟자, H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우리 4륜 구동이야?”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량의 앞바퀴는 헛돌고 있었고, 내가 모래사장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 미국산 SUV는 이미 타이어가 반쯤 모래에 잠겨 포기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차는 결국 트랙터가 들어와야 구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오전 8:30분,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내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성인 남성 5명이 때마침 지나가다가 도움을 주었다. 다행히도 두 개의 앞바퀴가 최선을 다해 무의미한 회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나, 둘, 셋, 미세요!”
여러 차례 힘을 내어 밀기도 하고 땅을 파기도 했지만, 앞바퀴는 쉽사리 빠져나오지 않았다. 평화를 찾아 떠나고 싶다던 H에게 긴박한 상황을 만들어 준 것 같아 미안함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반복해서 밀려왔고, 보험사에 전화를 하기 위해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H는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모래에 빠진 자동차를 구해내는 방법’
“오빠, 차 안에 발판 꺼내서, 바퀴 주변에 깔면 되는 경우가 있대. 한 번 해보자!”
흰색 원피스를 입고 돕겠다며, 비를 맞아가며 모래를 퍼내는 H를 보고 이번에는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되었다. 나라 잃은 것 같은 내 표정을 멀리서 지켜보며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가 다가와 여러 가지 민간요법(앞바퀴 주변에 얼음을 붓기, 삽질하기 등)을 해주셨지만 여전히 두 바퀴는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9:30분. 2차례의 도전에 실패하고, 이제 보험사에 통화 버튼까지 눌렀는데, 저 멀리서 아주머니들의 환호를 받으며 검은 실루엣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영화 속에서 꼭 간절한 상황이면 구세주가 슬로 모션으로 등장하듯, 그 아저씨의 등장도 꽤나 임팩트가 있었다. 입을 벌리고 아저씨를 바라보자, 뭘 쳐다보고 서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구해줄게, 이거 차에 묶어봐”
아저씨가 쥐여준 것은 끊어지지 않는 소방 호수였고, 본인의 차에 묶어 네 번 정도 퉁퉁 튕겼더니 모래에 처박혀 있던 우리 차가 날아오르며 탈출할 수 있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에 젖은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시끄럽게 한 것도 주변 분들께 사과를 드렸다. 도와주신 분께 사례를 하려고 하자, 다들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됐어요. 됐어! 나도 처음 차박할 때 다 겪은 일이에요.”
차를 빼고 나니 축하라도 하듯 비는 그쳤고, 원래 가기로 했던 정암 해수욕장으로 돌아가 자리를 세팅했다. 예상했던 것보단 늦은 시간이었지만 고기를 먹고 수영을 하고 잠도 자고, 우리가 계획한 대로의 나른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짠- 건배!”
H와 함께 고생을 했다며 건배를 했다. 투명한 칠링 팩 안에서 각 얼음과 함께 구겨져 있던 시원한 와인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긴장이 풀어졌다. 옷에 묻은 흙 얼룩만이 오전의 기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H와 나는 그저 하하 호호 웃으며 오전의 기분을 털어냈고, 대신 애틋한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워 나갔다.
로맨틱 코미디가 다시 좋아진 내가 이곳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찍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뻔한 일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고난과 답답함의 연속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빛나는 구간들이 있다. 없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모래에 차를 빠트리는 흔한(?) 일을 단순히 ‘모래가 차에 빠져서 꺼냈다.’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보다는 도움을 주었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온기, 그 사이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위로해 주었던 H, 그리고 그녀와 좀 더 애틋해진 감정. 이런 것들에 집중한다면 삶이 조금 더 다채로운 로맨틱 코미디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