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정해진 목적지는 없지만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반짝이는 봄날. 고민 끝에 아름다운 바위와 푸른 숲이 조화롭고 봉우리를 오르면 시원한 청풍호가 조망되는 충북 제천의 금수산 자락으로 출발했다.
이른 더위로 지친 몸을 보상해주는 미인봉
산행은 절벽 위의 조용한 절인 정방사에서 시작한다. 대중교통으로도 갈 수 있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제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평일이라 한산하고 조용했지만 한창 초록의 나뭇잎을 터트리는 나무들과 눈부신 햇살의 모임은 시끌벅적했다.
부쩍 더 녹음이 짙어진 산길을 천천히 걷는다.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쌀쌀해서 산행 중에도 재킷을 입어야 했는데, 오늘은 재킷은커녕 반소매에도 땀이 흥건하다. 벌써 여름이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일까? 아기들이 자라는 속도, 아기 강아지가 자라는 속도, 계절이 바뀌는 속도는 참으로 자연스럽고 빠르다는 것을 오늘 또 깨닫게 된다.
제천의 금수산과 그 주변의 산들은 매력적이다. 숲에 포위된 포근한 흙길이 지루할 때쯤엔 덕지덕지 매끈한 바위들이 쫄깃한 전율을 안겨주고, 스릴을 극복 하면 끝에 탄성을 자아내는 경치로 보상을 해주니 지루할 틈이 없다. 딱 내 스타일이다. 역시나 조금씩 고도를 높여갈수록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청풍호의 그림 같은 경치를 빨리 보고 싶어 발걸음이 바빠졌다.
아슬아슬한 바위를 네 발로 오르고 때로는 옆으로 한없이 뾰족이 솟은 바위를 두고 걷다가 아주 좁은 바위틈을 지나게 됐다. 지나다가 바위틈에 몸이 끼어버려 배낭을 꿈틀꿈틀해서 겨우 쏙 빠져나가기도 했다. 마치 어릴 적 운동회 달리기에서 결승선을 끊은 듯한 성취감이 느껴진다.
감각을 총출동 시켜 산길을 지나고 드디어 전망 데크에 도착했다. 이르게 찾아온 더위로 살짝 힘들었던 우리에게 너무도 큰 보상이었다. 조각해 놓은 커다란 바위와 뒤로 펼쳐지는 청풍호의 부드러운 물결.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도저히 발을 뗄 수 없어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기로 한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봐도 좋다는 말을 실감하고 또 실감한다.
아무리 좋아도 같은 곳을 계속 보면 질릴 법도 하지만 해의 위치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모습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아쉽게도 빨간 일몰은 구름으로 실패했지만 해가 지고 나타난 노른자처럼 둥글고 밝은 달이 우리의 오늘을 찬란하게 마무리해준다.
스릴만점 학봉 코스
이른 시간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오늘 가야 할 길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배꼽시계가 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둘러 머문 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히 행동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오늘을 시작한다.
오늘 코스 중 손바닥바위 전망 데크에서 학봉 전망 데크로 이동하는 구간은 거리는 짧지만 아주 사납기로 유명하다. 깎아지는 듯한 울퉁불퉁 오르막을 오르고 끝없이 펼쳐진 철 계단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딛고 올라선다. 역시나 그 명성에 걸맞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스릴만점의 재미를 안겨주었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 아슬아슬 고개를 넘으니 홀로 외롭게 솟아있는 학봉 전망 데크가 나타났다. 손바닥바위 전망 데크와는 또 다른 청풍호 조망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우리가 걸어온 능선들도 함께 조망할 수 있으니 더욱 뜻깊었다. 이곳에서 한숨 돌리고 산행을 이어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탄한 흙길이 이어진다. 중간중간 피어있는 야생화가 아름다움도 더한다.
편안한 길을 따라 신선봉에 도착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하산하기로 한다. 하산 길에 개발을 위해서인지 숲의 나무들이 전부 없어져 민머리 산을 만들고 있었다. 유난히 아름다운 나무들과 숲이었는데 너무도 안타깝다. 지역의 경제 발전과 자연 훼손은 누구도 정답을 내릴 수 없는 안타까운 숙제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자연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디게 발전하더라도아름다운 우리 금수강산이 오래도록 계속 되었으면 한다. 원래는 금수산에서 산행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경치에 취해 걷다 보니 코스가 살짝 단축됐다. 산행을 경쟁하듯 즐기고 싶지 않다. 사시사철 바뀌는 자연의 모습을 오롯이 감상하자면 때로 계획한 일정보다 단축될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보다는 아름다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특별히 무언가 장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여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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