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사랑하는 어반 스케쳐
골목을 사랑하는 어반 스케쳐
  • 고아라 | 정영찬 사진기자
  • 승인 2021.03.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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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석 작가

일제강점기엔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한국전쟁 이후엔 실향민들의 터전으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지금은 아기자기한 카페거리까지. 시간이 차곡차곡 쌓은 이야기가 마을을 이룬 후암동에서 정연석 작가와 골목 여행에 나섰다.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건축을 전공한 건축가이자 도시 여행자이자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는 드로잉 작가 정연석입니다.

드로잉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그림은 만화가를 꿈꿨던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렸습니다. 건축을 전공한 대학교에서도 건축 스케치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건축물과 골목을 그렸어요. 당시에는 그림으로 업을 삼거나 돈을 벌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는 없었습니다. 설계하고 싶은 건축물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 수단에 가까웠습니다.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일한 10년간은 워낙 바쁜 업무 탓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건축을 설계하는 일도 좋아서 시작했지만 원하는 건축물을 만들기가 어려웠어요. 클라이언트의 요구, 공사비용, 상사의 컨펌 등을 거치면서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였죠. 그러다 보니 번 아웃이 오더라고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그림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면서 다시 펜을 들게 됐습니다.

명륜동 1가 골목_ 사진제공 정연석
명륜동 1가 골목_ 사진제공 정연석

글과 그림 실력이 상당해요.
그림도 글도 배운 적 없습니다. 다만 두 분야 모두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미술 학원을 다녀본 적은 없지만 꿈이 만화가였던 터라 꾸준히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스토리를 구상하고, 그림을 그리고, 대사를 짓는 일이 즐거웠거든요. 제 작품이 교내 신문에 게재되는 일도 뿌듯했습니다. 청소년 기에는 소설가라는 꿈을 품게 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좋은 그림과 책을 찾아보게 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굳이 스승을 꼽자면 훌륭한 그림과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드로잉 할 때 주로 어떤 도구를 사용하나요?
가끔 채색을 쓰긴 하지만 주로 펜을 사용합니다. 펜 그림 특유의 정교하면서도 투박한 느낌을 좋아하거든요. 대신 펜의 종류를 다양하게 가지고 다닙니다. 펜은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재료이지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해요. 드로잉을 처음 시작할 땐 어떤 펜을 써야 하는지도 몰라 ‘컴퓨터 사인펜’이라 불리는 수성펜을 썼습니다. 지금은 흔히 사용하는 모나미 펜부터 피그먼트 잉크를 사용하는 라이너 펜, 펜촉을 잉크나 먹물에 찍어 쓰는 딥펜 등을 자주 써요. 무작정 유명 브랜드의 비싼 제품을 선택하기보다 펜의 종류와 특성을 잘 파악하고 그림 체에 맞는 펜을 고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골목으로 후암동을 꼽았어요. 이유가 뭔가요?
후암동을 처음 마주했을 때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었습니다. 곧바로 펜과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후암동이 흥미로운 이유는 다양한 건물과 이야기가 숨어있기 때문이에요. 우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주거지였던 탓에 적산 가옥이 많아요. 서양식 외관과 일본식 내부 구조를 갖춘 독특한 형태죠. 한국전쟁 이후에는 실향민들이 모여 살면서 판자촌이 형성됐습니다. 내구성이 약한 탓에 조금씩 고쳐 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지금은 좁은 공간을 활용한 협소 주택이 곳곳에 알차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지어진 집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동네죠. 이런 곳을 ‘정상적으로 나이 드는 동네’라 생각합니다. 보통의 집들은 길이 나있는 곳 주변에 지어지는 반면, 집을 지은 이후 남는 공간이 자연스레 길이 되는 점도 흥미로워요. 후암동을 구석구석 걷다 보면 뜬금없이 막다른 골목을 마주하거나 전혀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좁은 골목이 나있기도 합니다.

주로 어떤 골목에서 영감을 받나요?
‘사람’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을 좋아합니다. 한마디로 토박이나 오래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입니다. 아파트 단지나 재개발 구역은 대부분 옛집을 철거하고 새로운 집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보니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이 많아 이야기가 쌓이기 힘들거든요. 그런 점에서 후암동은 제가 가장 애정 하는 동네 중 하나입니다.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었던 쌍문동도 마찬가지예요. ‘덕선’이처럼 저도 1988년에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뛰어놀던 골목이 어디에나 있었어요. 쌍문동에는 아직도 1980년대의 주택과 약국, 슈퍼 등이 남아있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게 됩니다.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서점에서 우연히 이장희 작가님의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라는 책을 발견하고부터였습니다. ‘나도 언젠가 내 글과 그림으로 책을 내야지’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거죠. 그때부터 블로그를 열어 그림과 글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감사하게도 제 블로그를 본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고 첫 번째 작품인 <기억이 머무는 풍경>을 출간하게 됐습니다. 이후 여행과 건축 잡지에 글과 그림을 연재했고 이 작품들을 모아 <서울을 걷다>를 출간했습니다. 첫 번째 책이 유년시절을 보낸 부산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서울까지의 기억이 머무는 동네를 다룬다면, 두 번째 책은 서울의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서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아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3살 무렵부터 부산에서 자랐습니다. 다시 서울을 찾은 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나선 1999년 겨울이었죠. 20여 년간 머물며 구석구석을 다녔지만 저에게 서울은 여전히 궁금한 도시에요. 다양한 얼굴이 있고 각자 다른 매력이 있죠. 어떤 곳은 첫인상과 두 번째 인상이 달라 여러 번 다시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 서울에 대해, 서울의 동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습니다. 서울의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그리기 시작한 것이 <서울을 걷다>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후암동의 오래된 집들_사진제공 정연석
후암동의 오래된 집들_사진제공 정연석

<서울을 걷다>에 소개된 골목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 됐나요?
서울의 법정동은 467개입니다. 책에 담긴 20여 개의 동네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했어요.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은평구 대조동은 제가 서울로 돌아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에요. 능숙하게 다니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로 미로 같은 골목에 있었어요. 20년 만에 다시 찾아갔을 때도 20년 전처럼 헤맸습니다.(웃음)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마곡동은 지금 살고 있는 곳입니다. 사연과 애정이 많은 동네와 우연히 발견한 좋아하는 동네를 위주로 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삶의 기록을 따라가는 여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골목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신 것 같아요.
억지로 공부하거나 외운 건 아니에요. 오래된 건축물이나 흥미로운 골목을 발견하면 그곳의 역사나 숨은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것들을 찾아보면서 자연스레 습득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인 여행에서도 그림을 그리나요?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보다 드로잉을 통해 추억을 간직하는 편이에요. 물론 사진을 찍으면 당시의 풍경을 정확하게 남길 수 있겠죠. 드로잉은 아무래도 사람이 그리기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지고 그날의 감정과 날씨, 컨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하지만 그만큼 여행의 기억이 잘 담겨요.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한 풍경을 오래 관찰하게 되는 점도 좋고요. 나중에 그림을 다시 꺼내보면 당시의 기억과 기분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림이 쉽게 그려졌는지, 주변이 시끄러웠는지, 풍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떠올렸는지 등의 부가적인 것들도 여행의 한 부분이니까요.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골목과 건물을 주로 다루다 보니 카페나 레스토랑에 앉아 여유롭게 그리기보다는 길 위에 서서 혹은 계단에 걸터앉아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정확도가 높은 그림을 그려야 할 때는 사진을 찍은 후 작업실에서 그리기도 합니다.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까요. 사진을 보고 그리는 그림은 결과물의 퀄리티에 목적을 두는 반면, 현장에서 그리는 그림은 퀄리티보다 과정에 충실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저의 경우, 좋아하는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힐링을 느끼거든요.

이쯤 되니 작가님의 여행 법이 궁금해집니다.
보통 여행을 가면 정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곳을 찾아가게 돼요. 명소나 카페, 식당이 아니면 머무는 일은 거의 없어요. ‘길’은 그저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되죠. 제 여행지는 특정한 장소가 아닌 목적지로 향하는 길 자체에요. ‘점’보다는 ‘선’에 가까운 여행이랄까요. 지도를 보면서 ‘오늘은 이 길을 걸어서 여기에 가봐야겠다’ 하는 식이에요. 그런 여행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풍경이나, 유명하지 않은 명소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발로 걸어 다니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기쁨이죠.

골목 드로잉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치기 전에는 해외 드로잉 여행이 유행하기도 했고, 재택근무로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반 스케치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드로잉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드로잉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입니다. 저를 포함해 모든 드로잉 작가가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어요. 바로 ‘다작’입니다. 많이 그릴수록 기술과 실력이 느는 것은 물론, 나만의 드로잉 스타일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손보다 눈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드로잉은 얼마나 비슷하게 재현하는가 보다 ‘나의 시선’을 통해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서 감동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화동 절벽 위의 집_사진제공 정연석
이화동 절벽 위의 집_사진제공 정연석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첫 번째 작품 <기억이 머무는 풍경> 이후 두 번째 작품 <서울을 걷다>를 출간하기까지 5년이 걸렸어요. 세 번째 작품을 2년 안에 출간하는 것이 현재 가장 가까운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멀게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종료된 후 서울을 넘어 전국의 다양한 골목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행사에 참여하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화실도 다시 오픈할 예정입니다. 드로잉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배우고 그리다 보면 온라인 수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공감이나 시너지효과를 나눌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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