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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기어의 지리산 하이킹
마이기어의 지리산 하이킹
  • 김혜연 | 김혜연
  • 승인 2021.02.1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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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곳에서 나는 행복하다

설산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매년 겨울 눈 소식만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유난히 눈 손님의 방문이 잦은 올겨울,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남쪽, 지리산 상고대로 달려갔다.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세 개 도에 걸쳐있으며 국립공원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산체가 큰 만큼 고도 및 방향에 따라 생태환경과 인문환경이 달라 같은 지리산이라도 구간마다 전혀 다른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지리산의 거대하고 웅장한 능선은 하루 만에 모두 둘러보기 어렵다. 지리산의 주 능선을 밟으려면 대피소에서 숙박을 하며 적어도 2일 이상을 산행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대피소 숙박이 불가능한 관계로 백무동에서 장터목대피소와 세석대피소를 거쳐 다시 백무동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를 선택해야 했다.

지리산에 가려면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매일 밤 23시 58분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된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까지 바로 닿기 때문에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백무동에 새벽 3시 30분쯤 도착해 산행을 시작하면 여유롭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 백무동에서는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가 여러 차례 운행 중이다. 다만 상황에 따라 운행시간에 약간의 변동이 생길 수 있어 출발 전 미리 알아보고 산행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인적이 드문 터미널, 때마침 내리는 눈으로 찬 공기가 가득한 공간을 상고대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 채우고 지리산으로 달려갔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에 발을 딛고 나니 어두워서 주변이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에 닿는 상쾌한 공기와 밤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별들이 지리산과 가까워졌음을 느끼게 해준다. 마치 코스 요리 중 에피타이저를 맛본 후 설렘과 기대감에 부푼 마음이랄까.

겨울 산행이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정비하고 산행 길에 오른다. 나는 무박 산행을 좋아한다. 동이 트기 전 어두운 산길을 오르면 어딘가 몽롱해지지만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좋다. 오늘도 무언가에 홀린 듯 깜깜하고 부드러운 산길을 묵묵히 오른다. 고된 노동 후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채 산행을 시작한 탓에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게다가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말라 있다. 지금이라도 돌아 내려가 따뜻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숨이 차올라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착각이었겠지만 별들이 반짝이며 ‘조금 더 올라가면 오동통한 상고대와 평온한 눈밭이 펼쳐질 테니 힘내라’며 응원해 주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무엇이든 급하면 체한다. 산행도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며 끈기 있게 오르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닿는다. 그래,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지! 반달곰이 한 마리씩 매달려 있는 듯 무거운 두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산행을 이어갔다. 몽롱한 상태로 고도를 높여가던 중 순간 낯선 공기와 차가운 기온에 정신을 차리고 랜턴을 비춰 주변을 둘러봤다. ‘까꿍’ 나무에 주렁주렁 상고대가 달려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상고대는 뻥튀기하듯 커지고 많아졌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내는 아련한 상고대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주변이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 할 때 즈음 장터목대피소가 빼꼼,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겨울 지리산의 맛이다.

평일, 새벽, 코로나, 겨울의 사박자로 모처럼 한산한 장터목대피소다. 두껍게 깔린 구름이 지리산의 일출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했다. ‘흥! 그래, 나는 원래 일출보다는 일몰 파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일출도 물 건너 갔으니 차가운 몸이나 녹일 겸 휴게소의 낭만과 맞먹는 대피소 취사장을 찾았다. 등산할 때 먹는 라면과 믹스 커피의 맛은 어떤 맛있는 음식도 따라올 수 없는 것 같다. 호로록 뜨거운 라면으로 맛있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쓰레기 및 뒷정리까지 말끔하게 마무리한 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일출은 내어주지 않았지만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빛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그걸로 만족스럽다.

지금부터 우리가 걷게 될 길은 사계절 내내 나를 설레게 하는 연하선경이다. 장터목에서 세석평전까지 능선을 따라 걸으며 연하봉과 촛대봉을 지나는 3.4km의 길로, 세석철쭉, 천왕일출과 함께 지리십경 중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한 곳이다. 아마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항상 연하선경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겨울의 맛을 보기 위해 출발한다. 여기서부터는 지금까지와 다른 산행을 하게 된다. 발자국 하나 없이 새하얀 눈길 위로 나무마다 그렁그렁 맺혀있는 상고대가 서로 엉켜 ‘눈 터널’을 만들고 있다. 이따금씩 덕지덕지엉켜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시샘하듯 반짝이며 비집고 들어오는 햇볕,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풍경이다. 차가운 숨에 목이 따가웠지만, 감탄사를 뱉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다. 자연의 신비에 넋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바람이 눈가루를 미스트처럼 뿌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한다. 이내 눈앞에 나타난 탁 트인 연하선경의 자태. 지리산에 걸맞는 시원한 바람과 그 바람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구름의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 그 위를 포근하게 뒤덮은 하얀 눈까지. 마치 자연이 나를 위해 오케스트라 연주를 선보이는 듯 웅장하고 아름답다.일행들은 풍경에 홀린 듯 끝없이 감탄사를 반복한다. 나 역시 할 말은 감탄사 뿐이었다. 컨디션 난조인지 스노 볼이 붙어서 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름다운 연하선경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인지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겨울의 마법 구간을 지나 세석대피소에 가까워지자 정신이 바짝 든다.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속도를 높여 하산을 시작했다. 깎아 지른듯한 내리막에 눈까지 쌓이니 쉽지 않은 하산 길이다. 스틱, 아이젠 등 장비를 단단히 챙겨 오길 잘했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 칭찬했다. 스틱은 산행 시 항상 챙겨야 하는 필수품이고, 아이젠은 응달에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울 수 있는 3월까지 대비로 챙겨야 한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가파른 내리막을 따라 고도를 줄일수록 다른 계절로 들어가는 것 같다. 눈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따사로운 햇볕과 말끔한 흙이 시야를 채운다. 설렘과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가 정신없이 아름다운 눈과 경치에 취해 소리친 후 하산하는 것까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다. 꽁꽁 얼어붙은 폭포를 감상하며 드디어 산행을 마쳤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추고 잠든 것처럼 느껴져 무기력해진 요즘, 지리산이 겨울잠을 자고 있던 나의 모든 감각들을 깨워줬다.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어 오늘 이곳에서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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