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광 따라 걷고 또 걷는 순례길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광 따라 걷고 또 걷는 순례길
  • 글 사진·김진아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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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 下 씨주 메노르~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페르돈 고개를 넘어가는 일행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글 사진·김진아 여행가 sogreen78@hotmail.com | 취재협조·레드캡투어 www.redcaptour.com

씨주 메노르 마을을 벗어나 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풍차들이 가득한 페르돈(Perdon) 고개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혼자서 고독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 것도 좋고, 길에서 만난 여행자 친구들과 함께하는 수다스러운 여행도 좋다. 바로 코앞이 정상인 듯 했는데 출발한 지 2시간이 지나서야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순례자들의 형상을 본 딴 철제 조형물이 있었다. 사진과 엽서에서만 보던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몇몇 순례자들은 마치 산티아고에 도착한 듯 행복해하기도 했다. 정상 너머 보이는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커다란 풍차가 줄지어있는 모습은 그림 속 풍경처럼 아련했다. 아름다운 절경에 답례라도 하듯 자그만 체구의 독일인 순례자가 바이올린을 꺼내 축하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페르돈 고개의 작은 음악회,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었다.

정상에서 내려서니 길은 줄곧 자갈길이다. 두 개 마을을 지나 11세기에 지어진 중세 다리를 건너 언덕 높이 자리한 사설 알베르게에 배낭을 풀었다. 오늘 이동 시간은 6시간 정도. 어제 밤에 터트린 물집은 다시 부어올랐고 다른 발가락에도 새로운 물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페르돈 고개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이 정겹다.

다음날 새벽 6시, 여행 중 만난 친구 마르티네가 일찌감치 부지런을 떨었다. 숙소를 떠나 에스테야(Estella)로 향했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는 현지 사람들까지 낮잠에 빠져들게 했다. 보통 순례자들은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잠들어 새벽 6시면 기상을 한다. 현지인들의 생활 패턴과 완전히 반대다. 현지인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해 하루 종일 집이나 상점에 숨어 있다가 밤 8시가 넘어서야 저녁식사를 하고, 순례자들이 일어나는 새벽 즈음에 잠자리로 돌아간다.

작은 산을 여러 개 넘으니 끝없이 밀밭이 펼쳐졌다. 밀밭과 하늘, 초록과 파랑, 그리고 붉은 길. 딱 세 가지 색뿐이다. 끝없는 밀밭을 지나 에스테야에 도착했다. 산 위의 커다란 십자가가 인상적인 에스테야에서는 어린이 세례의 날 축제가 한창이었다. 오늘은 공립 알베르게가 아닌 깨끗하고 저렴한 유스호스텔에서 묵기로 했다. 밀린 빨래를 하고 마을을 둘러볼 겸 거리로 나섰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작은 강줄기가 인상적이었다. 광장에는 순례자들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시끌벅적했다. 중심가에 있는 중국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후 하루를 마쳤다.

성당의 도시 로그로뇨에서의 꿀 같은 휴식

▲ 페르돈 고개 정상에는 순례자들의 형상을 본 딴 조형물들이 있다.
에스테야를 출발해 작은 마을을 지나 포도주와 물이 무한대로 제공되는 이라체(Irache) 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에는 두 개의 수도꼭지가 마련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포도주, 오른쪽에는 수돗물이 나와 목마른 순례자들을 달랜다.

길 위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레스토랑 하나 없는 오솔길에서 점심이라야 바게트에 하몽과 치즈를 넣은 간단한 샌드위치와 과일이 전부이지만 배고픈 순례자를 달래는 소중한 식사다.

작은 마을 로스아르코스(Los Arcos)에 도착하자마자 강한 비바람이 불어 닥쳤다. 여행이 계속될수록 물집 잡힌 발이며 시큰거리는 무릎 탓에 걷기가 쉽지 않았다. 크고 작은 성당들이 가득한 도시 로그로뇨(Logrono)에 도착했다.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 째, 몸도 고단하고 마음도 지쳐 로그로뇨에서 하루를 푹 쉬기로 결정했다.

성당과 마을을 둘러보고 라우렐 골목(Calle Laurel)으로 들어섰다. 너무 작은 골목이라 하마터면 지나치기 쉬운 골목에서는 스페인 북부 지방의 대표적인 간식거리 타파스(Tapas)를 판다. 타파스는 바게트 빵 위에 야채나 해산물을 얹어 먹는 간식이다. 그 종류가 10가지도 넘는데 가장 대표적인 타파스는 바게트 위에 새우를 얹은 타파스, 야채샐러드와 절인 멸치를 얹은 타파스, 구운 양송이를 얹은 타파스가 있다. 타파스에는 토속주인 로제 와인을 곁들여야 제격이다.

다음날 버스를 탔다. 애초에 계획한 시간이 25일이라 전 구간을 걷기 힘든데다 일행의 허리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완주에 대한 미련으로 로그로뇨 이후 일부 구간은 버스를 이용해 이동하기로 했다.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서 마을과 성당을 둘러보고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걸은 지 이틀. 작은 마을 벨로라도(Belorado)와 오르테가(Ortega)를 거쳐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했다. 부르고스까지 이르는 길은 초록 밀밭의 대향연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밀밭 옆에는 새빨간 양귀비꽃이 고운 자태를 뽐냈다.

▲ 푸엔타 라 레이나의 풍경.

부르고스 도시 중심부에 들어서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큰 부르고스 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을 만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성당은 외곽만 둘러봐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만큼 거대했다.

▲ 로그로뇨 마을로 들어서는 순례자들.
부르고스 이전의 도시들이 한가로운 시골마을이라면 부르고스부터 레온을 비롯한 사리아, 산티아고는 스페인과 유럽 등 각국의 관광객이 몰리는 큰 도시들이다. 레온은 1세기 무렵, 서쪽에 위치한 금광을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이 설립한 도시로 크고 작은 광장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아름다웠다. 특히 레온에는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많았다.

우선 레온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마 이번 여행 중 본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성당을 나와 버스를 탔다. 도보로는 9일이 걸리는 구간이지만 버스를 타고 단 4시간 만에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사리아는 단거리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산티아고까지는 100여km. 100km 이상을 걸어야만 발급되는 순례자 증명서를 받기 위해 단거리 순례자들은 사리아에서 순례길을 시작하기도 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희망을 만나다

▲ 유럽에서 아름답고 웅장하기로 유명한 부르고스 대성당.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동안 참 많은 것을 버렸다. 옛날의 순례자들은 갈아입을 옷 한 벌만 가방에 넣고 돈 한 푼 없이 성지순례를 나섰다고 하지만 어디 요즘 사람들에게는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하지만 걷다 보면 알게 된다. 필요할 것 같아 챙겼지만 그것들 모두가 스스로 짊어져야 할 무게라는 것을. 어느새 많아진 삶의 곁가지들을 쳐내기 위해 떠난 길에서 또 다른 욕심을 쳐내야 함을.

드디어 ‘산티아고 100km’라고 써진 표지판을 발견했다. ‘산티아고 807km’라는 표지판을 보고 한숨을 쉬었는데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작은 마을 팔라스 데 레이(Palas del Rei)에서 하루를 묵고 서둘러 산티아고로 출발했다. 혼자 걷는 숲길은 즐겁고 상쾌했다. 시원한 새벽 공기가 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질였다.

정오가 되면서 햇살은 다시 뜨거워졌다. 옥수수밭, 밀밭,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리바디소 도 바이소(Ribadiso do Baixo) 마을이 그림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숙소로 들어갔다. 작은 강을 옆에 품고 있는 알베르게에는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덤으로 펼쳐져 있었다. 잔디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거나 물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순례자들을 보고 있자니 휴양지에 온 듯 편안했다.

갈리시안 지방에 들어섰으니 이 지역 고유의 음식을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일. 마을 레스토랑에 들어가 갈리시안 스튜(Galician Stew)를 주문하고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모처럼만에 갖는 호사스러운 저녁식사였다.

▲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100km.

마지막 남은 기운을 모아 산티아고로 가는 발걸음에 실었다. 500m 간격으로 서 있는 표지석은 산티아고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줬다. 키 큰 유칼립투스 나무는 어서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하루에 40km를 걷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인가 싶어 산티아고를 코앞에 두고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일찍 침대에 누워 순례길에서 만난 나를 돌아봤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참 많은 여행자들을 만나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이야기했다. 그리고 항상 그들에게 물었다. ‘왜 이 길을 걷고 있어요?’ 그들의 대답은 다양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혹은 ‘성지순례중이에요.’ 또는 ‘나를 시험해보고 싶어서요.’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꼭 묻고 싶다. 각자 원하던 것을 찾았냐고. 도대체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혹시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까.

▲ 피네스테레 마을.

길의 끝에 서다
이런 저런 생각에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피곤하지만 몸은 가벼웠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을까. 산티아고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을 참고 이곳까지 걸어온 스스로가 기특할 정도였다.

마지막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어갔다. 우뚝 솟은 성당을 보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종교를 떠나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일까. 잠시 성당 앞 광장에서 지나온 길들을 떠올려봤다.

순례자 협회 사무실에서 증명서를 받았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는 증명서.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성당을 나와 그동안 함께 길을 걸어오며 만났던 순례자과 감격의 인사를 나눴다. 마음을 다해 축복을 기도했다. 이제 순례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길 위에서 나눴던 땀과 눈물, 웃음을 뒤로 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 많은 것들을 길 위에 버리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면 서서히 잊히겠지만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은 내 삶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줄 것이다. 비록 몸은 힘들지만 마음만은 풍성했던 그 시간들을 말이다.

레온은 1세기 무렵, 서쪽에 위치한 금광을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이 설립한
도시로 크고 작은 광장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아름다웠다.
특히 레온에는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많았다.

▲ 웅장한 산티아고 대성당.

걷다 보면 알게 된다.
필요할 것 같아 챙겼지만 그것들 모두가 스스로 짊어져야 할
무게라는 것을. 어느새 많아진 삶의 곁가지들을 쳐내기 위해 떠난 길에서
또 다른 욕심을 쳐내야 함을. 

▲ 리바디소 도 바이소 마을에서 만난 순례자들.

발바닥이 짓무르도록 걷고 또 걸었다. ‘무엇을 위해 걷는 것일까?’
뜨거운 태양 아래 서면 잠시 목적과 의지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산티아고를 코앞에 둔 이 순간,
지나온 길들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 리바디소 도 바이소 마을의 그림 같은 새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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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익 2017-06-24 23:36:05
순례길 종주에 박수를 보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