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여행] 역사 기행
[나주여행] 역사 기행
  • 고아라 | 정영찬 사진기자
  • 승인 2020.11.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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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역사를 담은 여행지

조선 말까지만 해도 한양 도성처럼 사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고루 갖춘 전라도의 중심 도시였다. 도시 한가운데를 영산강이 가로질러 수많은 물자와 세곡이 오가고 자원도 풍부해 번영을 누렸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과거에 누렸던 영화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들, 때묻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품고 있어 도시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 역할을 한다.

#나주향교
나주는 전주에 이어 호남 지역에서 두 번째로 발달된 고을이었다. 향교 역시 다른 지역의 것보다 규모가 크고 위엄 있게 지어졌다. 현재까지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향교의 살림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머문 부속사 등이 건재해 볼거리가 다양하다. 긴 돌담으로 둘러싸인 향교 입구로 들어서면 위풍당당한 모습의 대성전이 가장 먼저 반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제례에 적합하도록 앞쪽 한 칸이 틔워져 있다. 유교 건물로서는 이례적으로 주춧돌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뒤편의 샛문을 통해 나가면 당시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기숙사로 쓰던 동재, 서재를 볼 수 있다.

#구 나주역
1913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세워진 역사. 옛 간이역 특유의 정감 넘치는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2001년 7월 10일 나주역을 나주 시청 앞으로 이전하면서 폐 건물이 됐지만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구 나주역은 설립 이후 1923년 화물 창고를 증축하고 1970년 일본 기와를 슬레이트로 바꿨지만 기본 구조나 목재 기둥 등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내부에 들어서면 당시 운영하던 열차 시간표가 걸려 있고, 역무원을 사람 모형으로 재현해 마치 1910년 대에 와있는 듯하다. 1929년 일본과 한국 학생들의 싸움을 계기로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발단지이기도 하다.

#일본인지주가옥
나주는 예로부터 자원이 풍부하고 영산강을 통해 교류가 많아 일제 시대 유독 큰 침략을 겪었다. 영산강 근처에 자리한 일본인지주가옥에 가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나주 지역에서 가장 큰 농토를 소유했던 일본인 ‘구로즈미 이타로’의 가옥. 1935년 모든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들여와 건립했으며 일본식 농촌 주택과 서양식 건축 양식이 혼합돼 있다. 현재는 나주 여행자를 위한 역사 교육장이자 주민들을 위한 쉼터로 운영되고 있다. 내부에는 19~20세기 영산포 일대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어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나주 목사내아
나주 구도심을 여행한다면 꼭 들러야 할 한옥이 있다. 나주목에 파견된 목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나주 목사내아다. 이곳을 거쳐간 목사들의 손 때가 묻은 대문을 열자 녹슨 나무 이음새가 얕은 신음을 낸다. 내부는 단출하다. ㄷ자 모양의 본채, 문간채 등과 500년 묵은 팽나무 한 그루가 작은 마당을 감싸고 있다. 목사내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팽나무. 벼락을 맞고 두 쪽으로 쪼개졌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나무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면 묘안을 내려준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속내를 털어놓는다. 한옥에는 총 6개 객실이 있으며 관아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

#금성관
구도심의 또 다른 필수 코스. 과거 외국에서 온 사신이나 고위 관료가 머물던 객사다. 정문을 포함해 총 3개의 문을 거쳐야 본관에 닿을 수 있는데, 중앙으로 돌길이 이어져 있어 이 길만 곧장 따라가면 된다. 금성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정문인 망화루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앞쪽으로는 구도심의 풍경이, 뒤쪽으로는 금성관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건물을 차례로 지나 본채 뒤편으로 가면 600년이 넘은 우람한 은행나무가 금성관을 든든하게 지키고 선 모습을 볼 수 있다. 금성관은 나주인들의 항일정신을 고조시킨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출병식을 가졌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됐을 때 빈소가 마련된 곳이다.

#황포돛배
조선시대 나주 최고의 번화가였던 영산 포구는 무수히 많은 돛배가 영산강의 물길을 따라 오가며 물자와 사람을 날랐다. 육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당시 영산 포구 마을의 번영과 북적거림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가을의 끝자락에 만난 영산강은 과거의 모습과 정반대였다. 한때 누렸던 영화는 온데간데없이 한적하고 고요했다. 이곳이 포구였음을 알리는 등대로 걸음을 옮기니 선착장 앞에 나무 배가 줄지어 서있다. 돛배가 마지막 출항을 마친 지 30여 년 만인 2008년, 웅장한 옛 모습 그대로 황포돛배를 부활시킨 것. 지금의 황포돛배는 물자 대신 여행자들을 싣고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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