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湖歌道, 신선의 숲
江湖歌道, 신선의 숲
  • 박신영 기자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20.06.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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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산막이옛길 트레킹

물안개가 자취를 감추자 잠잠했던 호수에 햇살이 반짝거린다. 그 아래로 잠에서 깬 민물가마우지 한 마리가 호수를 유영한다. 사방을 에워싼 군자산은 호수를 도화지 삼아 한 폭의 수채화를 내어줬다.

인공이 만든 자연
괴산 산막이옛길이 아름답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한국관광 100선이요, 아름다운 우리 강 탐방로 100선에 꼽힐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다는 말에 언제고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회는 쉽게 찾아왔다. 숙박으로 들린 캠핑장에서 고작 10km 거리에 산막이옛길이 위치했던 것.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즉흥적으로 산막이옛길로 향했다.

평일 오전의 산막이옛길은 한산했다. 등산로 입구 주막의 주인장들과 특산물 판매원들이 호객할 뿐이었다. 괴산 사과와 표고버섯이 가지런히 노점상에 진열됐고 맛깔난 음식 간판이 입맛을 다시게 했다.

등산이 시작되자마자 열매 맺기에 한창인 어린 사과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사과의 제철은 가을, 부지런히 성장해 곧 많은 사과가 열릴 거다. 한편엔 선착장이 자리했다. 산막이 마을에서 주차장까지 승객을 실어 나르는 유람선이다. 얼마 전까지 코로나19로 중단됐는데 4월 말부터 재개했다. 이른 오전이었지만 벌써 열 명에 이르는 승객이 트래킹을 마치고 하선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 참 부지런하다.

산막이 마을은 군자산 자락에 안긴 산골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로 사용될 만큼 외진 부락. 그러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선비가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곤 했다. 그중 조선 후기 노성도 선비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산막이 마을로 유배 왔던 조상, 노수신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수월정을 짓고 <연하구곡가>를 완성했다. 그러면서 노성도는 “가히 신선이 별장으로 삼을 만하다”라고 산막이 마을을 예찬했다.

그러나 1957년 초 괴산댐이 생기면서 연하구곡의 대부분이 잠겼고 산막이 마을의 유일한 외부 통로인 달천 섶다리도 사라졌다. 산이 장막처럼 둘러싸였다 하여 이름 붙여진 산막이 마을. 오지 중의 오지인지라 섶다리 없이는 생활이 어려웠다. 마을 주민들은 살기 위해 호수를 따라 산길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 길이 산막이옛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투박했던 옛길이 보수와 개발을 거듭했고 비로소 2011년 지금의 등산로가 완성됐다.

괴산의 백미로 꼽히는 산막이옛길. 자연과 사람, 인공이 만든 풍경 속에서 역사와 이야기가 살아 숨 쉰다.

심심하지 않은 산행길
평탄한 데크길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앙스트블뤼테Angstblüte, 불안 속에 피는 꽃이라는 말처럼 솔방울이 가지마다 달렸다. 생존이 위태로울 때 사력을 다해 꽃을 피워내는 소나무를 보자 마음이 울렁거린다. 그 마음을 닮은 출렁다리가 소나무 사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나무를 연결해 만든 기다란 출렁다리. 소나무 군락지 사이사이 위태로운 80m 와이어가 등산객을 반긴다. 다행히도 그리 높지 않지만 흔들거림이 웬만한 출렁다리 못지않다. 아슬아슬 외줄 타기 하듯 조금만 움직여도 바닥이 일렁인다. 어린아이에겐 제법 무서울 거 같지만 어른에겐 의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출렁다리에서 너머로 보이는 경치 역시 수려하다, 잔잔한 괴산호수와 호수를 에워싼 군자산, 그 위를 유유히 지나는 유람선이 장관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귀여운 동물 조각의 향연이다. 등산로 바로 옆 무서운 인상의 호랑이 조각이 입을 벌리고 서 있다. 호랑이가 드나들던 것은 물론 겨울마다 눈 속에 짐승 발자국이 남겨져 시골 청년들의 사냥터가 된 호랑이굴이다. 머뭇거리며 굴 안으로 들어서자 날카로운 굉음이 들린다. “호랑이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뒤 안 가리고 도망쳤다. 요즘에 호랑이가 어디 있겠냐만 호랑이굴의 전설, 호랑이 조각상, 굉음을 들으니 생명의 위협이 느껴진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멋쩍어한다. “되게 잘 만들어 놨구먼.”

한숨을 돌리자 이번엔 여우비 바위굴이다. 산막이옛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여우비를 피하거나 한낮 더위를 식히기 위해 쉬어가던 바위굴이다. 거대한 바위의 좁은 틈은 에어컨을 켜 놓은 것처럼 시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큼 비좁다.

목이 마를 때쯤 앉은뱅이 약수터가 나타난다. 통나무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흐르는데 고로쇠는 아니다. 그저 고로쇠 물처럼 보이게 한 페이크. 앉은뱅이가 지나가다 물을 마시고 효험을 봤다는 뻔한 전설도 내려온다. 약수터 뒤로 아기자기한 다람쥐 집이 몇 동이다. 야생 다람쥐를 위한 보호소랄까. 목을 축이는데 다람쥐가 약수터 근처까지 와서 아양을 떤다. 슬며시 손바닥을 내밀어 보지만 도토리만 주워갈 뿐이다.

20세기는 현재 진행 중
허름한 물레방앗간이 산막이 마을 입성을 알렸다. 이끼가 무성해 물레방아인지 고물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낡은 방앗간이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폭포수를 에너지 삼아 돌아가는 모양인데 근래 비 소식이 없어 방치된 듯하다.

물레방아는 옆 절구통까지 정겹다. 굳센 소를 형상화한 방아는 세월의 풍파에 갈라지고 빛바랬다. 물레를 돌려도 방아가 찢어질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손으로 슬쩍 물레를 돌리자 방아머리가 흔들거린다. 아직은 쓸 만한가 보다.

마을 초입엔 200년 된 산막이 당산나무도 있다. 이 밤나무는 조선 시대 산막이 마을 주민에 의해 심어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하지만 나뭇잎 하나 없이 벌거벗은 걸 보니 이미 목숨을 다한 거 같았다.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멋들어지게 솟은 걸 보아 전성기 때 얼마나 웅장한 나무였는지 알 법하다.

안쓰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다시 호수를 따라 걷는다. 산막이 마을부터는 데크 길이 아닌 진짜 옛길이다. 아름다움보다 실용성을 위해 길을 낸 만큼 흙과 바위가 무심히 놓여있다. 그런데 데크 길보다 훨씬 고상하다. 마을 주민이 직접 바위를 놓아 만든 탓에 인간미가 느껴진 달까. 21세기 화려함보다 20세기 손길이 애틋하다.

그러나 21세기의 화려함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호수 옆에 레인보우 느린 우체통을 설치한 것. 한숨 돌리 겸 엄마에게 편지를 보낸다. 엽서와 우표도 무료로 제공되니 잔돈을 찾아 머뭇거릴 리 없다.

에메랄드빛 호수와 깎아지른 비경,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와 드문드문 놓인 벤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야생 다람쥐와 활짝 핀 야생화로 향하는 길목이 신비롭다.

연하협곡으로 빨려 들어가다
산막이옛길의 끝에 연하협구름다리가 있다. 2016년 9월 개통한 연하협구름다리는 167m 길이의 현수교로 산막이옛길 굴바위와 충청도 양반길 갈론나루를 연결한다.

연하협구름다리에 입장하는 순간 연하협곡으로 빨려 들어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군자산이 내 품에 들어오는 듯했다. 영화처럼 푸른 산이 활짝 곁을 내어줬고 슬며시 부는 바람에 다리가 흔들거리는 것도 기분 좋았다.

연하협구름다리를 기준으로 원점 회귀했다. 이번엔 호수 위쪽 아스팔트 도로로 걸었다. 호숫길보다 훨씬 빨리 산막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사가 완만해 힘이 덜 든다. 산막이 마을을 가로질렀다. 아까와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산막이 마을을 주름잡는 건 식당이다. 전통 음식점이나 막걸릿집 등 예전 식당들이 즐비해 등산객의 맛집으로 소문났다. 그러나 많은 식당이 폐점 또는 휴점 상태였다. 아마도 코로나19의 여파 일 듯하다.

그 때문인지 괴산군 칠성면 주민자치위원회 회원들이 몰려와 산막이옛길과 마을 환경 정화 활동을 펼쳤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생활 방역체계로 전화되면서 산막이옛길에 방문객이 크게 몰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마스크로 중무장한 20명의 회원이 마을을 샅샅이 청소하고 있었다.

산막이 마을을 나가는 유람선도 코로나19 생활 방역에 적극 동참했다. 매표소 앞에 “마스크 미착용 시 승선 불가”라는 푯말을 걸어 놓았다. 마스크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매표소에서 500원에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승선을 알리는 방송이 울린다. 사람이 모였을 때만 운행하는 비정기적 유람선이기 때문에 한 번 놓치면 언제 다시 배가 올지 모른다.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선장이 배 앞에서 체온계를 내민다. 승객 일일이 체온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유람선이 출발한다.

5분의 짧은 뱃놀이지만 풍경은 100점이다. 노르웨이 송네 피오르드 축소판인 양 굽이친 호수를 가로지른다. 걸어왔던 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점점 아득해진다.

산막이옛길 트래킹
코스: 5km(2시간)→주차장→소나무 출렁다리→앉은뱅이 약수터→호수 전망대→산막이 마을→연하협구름다리

산막이옛길 하이킹
1코스: 4.4km(3시간)→노루샘→등잔봉→한반도 전망대→천장봉→산막이 마을
2코스: 2.9km(3시간)→노루샘→등잔봉→한반도 전망대→진달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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