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모험가 부부] 계절 속을 천천히 거닐다
[생활모험가 부부] 계절 속을 천천히 거닐다
  • 이수현 | 최상원
  • 승인 2020.05.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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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자드락길 백패킹

가볍게 걷고 싶은 계절. 오랜만에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향한 곳은 충북 제천의 자드락길. 자드락길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이란 뜻이다. 산과 호수가 어우러져 자연을 벗 삼아 걷기 좋은 자드락길. 총 7코스까지 조성되어 있으며 우린 그중 6코스인 괴곡성벽길로 향했다.

#배낭의 무게를 생각하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쉬운 코스를 골랐지만 낮은 오르막에도 탄식이 새어 나온다. 겨우내 급격히 떨어진 체력 때문에 숨이 가빠지기 일쑤다. 불현듯 처음 배낭을 짊어지던 날이 오버랩 된다. 왠지 필요할 것 같아서 주섬주섬 챙긴 짐의 무게에 허덕였던 첫 백패킹의 기억. 걸으면 걸을수록 내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가 마치 인생의 무게처럼 느껴져 쓴웃음이 자꾸만 나왔더랬다. 그때보다 짐은 간소해졌지만 약해진 체력엔 당해낼 수가 없다. 올해는 좀 더 가볍게 다니리라 다짐해본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빨리, 더 멀리 가려고 종종거린 적이 있었다. 빠르게 발을 움직이면서 속도를 내고 싶어서 앞 사람의 머리만 쳐다보며 가다가 미끄러지기도 했다. 괜히 마음만 급해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고행처럼 걸었다. 그렇게 돌아오고 나면 주변 풍경은커녕 뒤처질까 종종거리던 마음과 며칠간의 근육통이 뻐근하게 남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기에 좀 더 느긋하게 걷곤 한다. 모두 다른 속도를 가진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속도대로 말이다. 이렇게 느긋하게 걷는 이에게 자연이 주는 자그마한 선물이 있다. 앞만 보고 걷기보단 중간중간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자칫 그냥 지나칠 뻔했던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거친 계절을 이겨내고 곱게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잎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씩씩하게 움트는 새싹 같은 봄의 전령을 만날 수 있다. 상냥한 자연의 곁에서 걷다 쉬는, 무리하지 않는 이 정도가 딱 좋다.

#아직은 쌀쌀한 계절
청풍호가 내려다보이는 데크 전망대에 앉아 주먹밥과 삶은 달걀로 점심을 대신했다. 어젯밤 부지런히 챙겨온 정성 덕분에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쉬다 보니 그새 이마에 맺힌 땀도 식어가고 뺨을 스치는 바람에 서늘함마저 느껴진다. 한낮은 햇살이 쨍쨍한데 아침저녁으론 아직 쌀쌀한 계절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예상보다 쌀쌀한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챙겨온 우모 재킷, 동계 침낭, 핫팩이 내심 든든하다.

다음 날 일찍 철수할 계획이기에 최대한 아래쪽으로 내려와 사이트를 구축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는 늦은 오후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꾸린 짐을 풀어본다. 하나하나 가져온 짐들을 펼쳐보면 다 필요한 것들인데 이상하게도 매번 과하게만 느껴진다. 사실 동계 침낭의 부피 탓이 가장 크지만 추위를 많이 타기에 보온에 늘 신경 써야만 한다.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백패킹의 살림은 미니멀 캠핑보다 단순하다. 텐트를 치고, 매트에 바람을 훅훅 불어 바닥에 깔고, 침낭을 위에 펼쳐놓으면 끝. 배낭의 등 부분에 탈부착 할 수 있는 폼을 깔고 앉으면 의자도 필요 없다. 최소한의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백패킹에서는 이렇게 한 가지 아이템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음식은 조리하지 않고 간단히 물만 끓일 수 있도록 빵, 커피, 주먹밥을 준비했다. 쓰레기는 최소화하고 남기지 않을 정도로 딱 먹을 만큼만 준비하니 음식 짐이 확 줄었다. 다음번 백패킹엔 버너, 코펠 등도 챙기지 않는 비화식으로 나가 보려고 한다. 이번처럼 주먹밥, 삶은 달걀, 모닝 빵 등의 메뉴가 괜찮을 것 같다.

#다정한 자연의 품에서 묵어가다
텐트를 치고 간단히 커피 한잔을 하니 그새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쌀쌀해졌다. 작게 접어 온 우모 재킷을 꺼내 입었다. 익숙한 손길로 핫팩을 꺼내 착착 흔들어 주머니에 넣으니 금세 몸이 나른해진다. 푹신한 동계 침낭을 펼쳐놓은 자그마한 텐트에 몸을 뉘었다. 두툼한 핫팩을 손에 꼭 쥐고 침낭 안으로 쏙 들어갔다. 유난히 길었던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침낭 속으로 녹아드는 기분.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밀려오는 노곤함에 푹 잠들었던 밤이었다.

이른 아침, 아니 온 듯 깨끗하게 짐을 정리해 하산했다. 새벽녘의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조금씩 선명한 아침으로 피어오른다. 어제 올라올 때 보았던 꽃들과 새싹들이 어쩐지 조금 더 활짝 피어난 것만 같다. 다정하게 품을 내어준 자연에게 마음의 인사를 보내며 자박자박 다시 길을 나섰다.

생활모험가 부부
사진가 빅초이와 작가 블리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생활모험가 부부입니다.
일상과 여행, 삶의 다양한 순간을 남편 빅초이가 찍고 부인 블리가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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