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모험가 부부] 겨울산의 나긋한 위로
[생활모험가 부부] 겨울산의 나긋한 위로
  • 이수현 작가 | 최상원 사진가
  • 승인 2019.12.3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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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와 빅초이의 소백산 하이킹

1월의 소백을 가장 좋아합니다. 소백의 흰 눈을 소복소복 밟는 건 새해를 맞이하는 일련의 의식이지요. 정상에 오르겠다는 욕심 없이, 오를 수 있을 만큼만 걷다 오는 우리의 산행. 한해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는 힘을 오롯이 받고 돌아왔습니다. 새해맞이 생활모험가 부부가 다녀온 겨울 소백산 하이킹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어떤 식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다
시끌벅적한 연말과 새해에 휩쓸리다가 정신을 차리면 나만 멀찌감치 떨어진 기분. 새해의 들뜸이나 유난스러운 다짐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사로잡혀 작년 이맘때의 지키지 못한 약속을 끄적인다.

매일매일 바쁘게 지내다가 불현듯 ‘잘살고 있는 걸까’ 자문하고 싶어지는 순간. 멈출 수 없는 감정의 화살이 나에게로 향할 때, 그 순간만은 이곳이 아닌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엔 그럴 때마다 울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 지금은 엉엉 소리 내어 울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타박타박 걷는다. 울고 나서 퉁퉁 부어버린 나를 마주하는 것보다 실컷 걷고 나서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는 게 더 마음이 후련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렇게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는 쭉 뻗은 편한 길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산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다른 계절보다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서 걸어야 하는 눈 쌓인 산이 가장 좋다. 새하얀 솜이불을 덮은 겨울 산의 폭신폭신한 눈을 맘껏 밟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개운해지리라.

#아이젠, 스패츠, 등산 스틱을 갖추고 겨울의 소백으로 향했다
겨울이면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어 붙여진 이름처럼 소백산은 아름다운 눈꽃으로 유명하다. 머릿속까지 쨍하게 차오르는 차가운 공기는 도시에서의 겨울보다 좀 더 혹독한 자연의 기후를 실감 나게 한다. 1월의 산에선 딴생각할 틈도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기가 몰려온다. 잔뜩 겹쳐 입은 옷을 단단히 여미고 겨울의 소백에 올랐다.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 때문인지 껴입은 옷은 이내 뜨거운 열기로 차올랐다. 등줄기엔 땀이 흐르고 털모자를 꾹 눌러쓴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겨우내 약해진 체력 탓에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한 줄로 나란히 걸어 올라가는 길에선 빨리 가려는 이들에게 길을 비켜주고 나만의 속도로 타박타박 길을 오른다. 힘들면 조금 쉬어가도 좋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우리만의 속도로 걷는 산행이라 다행이다.

#정직한 움직임이 가득한 산에서는 금세 허기가 진다
집에선 잘 먹지 않는 삶은 달걀이 이곳에선 다디달고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커피는 발끝까지 따스함을 전해준다. 주먹밥 한 개, 삶은 달걀 한 알, 커피 한 잔이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소박한 정찬과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어린아이처럼 양 볼이 발그레해진다.

옆자리에 있던 산악회 아주머니가 소박한 우리의 밥상을 힐끗 보시곤 초콜릿 두 개를 건넸다. 도시에서는 낯선 친절이지만 자연에선 선뜻 마음을 놓게 된다. 마침 달달함이 필요했던 절묘한 타이밍이기도 했고. 사이좋게 작은 초콜릿 한 알을 입에 넣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 행복 참 별거 아니네.’ 위에서 내려다보니 참 별거 아닌 것들. 그동안 참으로 별거 아닌 것들에 연연하고 있었구나 싶다. 산에 오르니 산처럼 마음이 깊고 넓어진다.

#새해마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한 살 더 먹었으니 무언가 더 대단한 것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발자국을 느리게 내딛는 지금은 거창한 새해 다짐을 세우기보다 매일 매일의 충실함으로 대신한다. 큰 계획을 세워놓고 지키지 못했을 때의 그 헛헛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높은 장벽보다 내가 맘만 먹으면 폴짝 뛰어넘을 수 있는 만만한 허들을 넘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한다. 낮은 허들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면서 말이다. 하루하루가 다르고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 내려놓으니 비로소 가뿐해진다.

이번 산행도 마찬가지다. 정상에 오르겠다는 욕심을 버리니 무거웠던 발걸음이 조금씩 가뿐해졌다. 매서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머리카락은 톡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듯, 한 올 한 올 얼어버렸지만 그조차도 즐거워 웃음이 새어 나온다. 겨울산 구석구석 살뜰히도 내려앉은 눈꽃의 성실함과 하얀 눈에도 지지 않은 초록 잎사귀가 뿜어내는 생명력까지. 이렇게 매번 자연에선 작은 풀꽃에도 이야기가 있고 배울 것이 있다. 여기에 다 두고 가기로 한다. 도시에서의 고민, 침잠된 감정 모두.

이상하게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르다. 내리막의 가뿐함은 아마도 산에 두고 온 고민의 무게가 덜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행복해지는 방법은 겨울산에 있었다.

생활모험가 부부
사진가 빅초이와 작가 블리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생활모험가 부부입니다.
일상과 여행, 삶의 다양한 순간을 남편 빅초이가 찍고, 부인 블리가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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