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커피와 나라는 서로 쏙 빼닮았더군요
그 커피와 나라는 서로 쏙 빼닮았더군요
  • 정다솜
  • 승인 2019.11.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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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커피

아무리 그래도 9월 하순인데, 하노이가 이렇게나 무더울 줄이야. 차라리 비라도 쏴아-하고 시원하게 내리면 낫겠다만, 우기 끝 무렵에 접어들어 비는 적게 오고 습도만 높아서 가만히 숨만 쉬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빗줄기처럼 흘러내렸다. 호텔로 향하는 내내 시원한 음료 생각이 절실했다. 프론트 직원 써니가 웰컴드링크로 내어온 냉차가 아니었다면 아마 리셉션에 놓인 냉장고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든지 차가운 타일 바닥에 드러 누웠을지 모른다.

끊임없이 마시는 사람들의 도시
동남아시아권역의 나라 대부분은 아열대성 기후와 수질 문제로 인해 음료 문화가 꽤 발달한 편인데, 베트남도 그렇다. 냉차 ‘쩨다(Chè Đá)’는 하노이의 식당과 카페, 숙박시설 어딜 가나 구비돼 있고 ‘비아 허이Bia Hơi’라는 현수막을 내건 생맥줏집들은 오전 댓바람부터 손님을 받는다. 커다란 얼음을 띄운 맥주를 마시는 이들을 아침부터 볼 수 있는 풍경이 예삿일인 이 나라엔 유난히 마실 게 넘쳐흐른다. 갈증 해소에 탁월한 사탕수수즙, 코코넛과 생과일 주스 따위를 파는 노점들이 어디든 즐비하며 눈을 두는 곳마다 무언가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로 붐빈다.

세계 2위에 빛나는 커피의 나라
그렇대도 베트남의 대표 음료를 하나만 꼽자면 역시 커피다. 역사는 차나 맥주보다 짧을지 언정 이 나라에서 커피의 위력은 곱절로 세다.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은 브라질에 이은 2대 커피 생산국인 데다 2016년 말 기준으로 농장 면적이 제주도의 3.5배에 이른다. 여기서 연평균 170만 톤, 그러니까 전 세계 생산량 5분의 1에 달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커피가 자라고 있다는 말씀.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가 보통 그러하듯 베트남 커피사(史)의 출발점도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기에 있다. 1857년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에 의해 처음 이 땅을 밟은 커피콩은 곧 플랜테이션 경작물이 되어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물론 초기에는 프랑스 이민자나 응우옌 왕족 등 소수 특권층만이 전유하는 사치품이었다. 뙤약볕 아래서 병충과 싸워가며 커피나무를 돌보건만 정작 커피를 한 방울도 마실 수 없었던 농부들이 원두를 먹은 족제비의 배설물을 관리자 몰래 체에 걸러 마실 정도였으니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잉여 생산량이 누적된 후에야 서민들 품까지 닿게 된 커피는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의 경제 성장 과정에서 주요 품목으로 등극하며 생산량과 소비량 모두 큰 폭으로 증가해왔다.

모든 거리가 사랑방인 나라
이제 커피가 일상품인 베트남에선 좁은 골목 안쪽이든 넓은 대로든 어디에나 크고 작은 카페들이 널렸다. 정형화된 모습은 따로 없다. 그저 거리에 작은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가 좍 깔려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면, 그곳이 바로 카페다. 심지어는 온갖 탈 것과 사람이 아수라를 이루는 도로 위에서 커피를 내려주는 리어카도 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베트남인들은 엉덩이를 겨우 걸칠 수 있는 그 의자 위에 몇 번씩이나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눈다. 도시의 온 거리가 하루 내내 이들의 사랑방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베트남 커피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드는 세 가지

1. 아라비카 말고 로부스타
베트남에서 중심적으로 생산하는 원두는 널리 알려진 아라비카Arabica가 아닌 로부스타Robusta 품종이다. 산도가 적고 카페인 함유율이 높아 ‘극단적으로 쓰다’란 평을 들을 정도로 거칠고 두터운 맛을 가졌다. 아라비카보다 품질이 낮은 대신 병충해에 강해 기르기 쉽고 면적당 수확량이 월등히 많아 경제적 효율성까지 톡톡하니 플랜테이션형 농작물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조건이었을 터. 재배가 본격화된 20세기 초반 이래 베트남이 생산해 내는 로부스타 양은 여전히 전 세계 동품종 생산량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2. 베트남식 드리퍼, 핀
로부스타는 대개 인스턴트 커피 믹스의 원료로 쓰이지만 외려 베트남 사람들은 인스턴트 커피가 아니라 드립 커피를 즐긴다. 대신 우리가 아는 핸드드립과는 좀 다르다. 커피를 주문하면 핀Phin이라 불리는 드리퍼가 커피잔 위에 올려져 나오는데, 언뜻 이탈리아의 모카포트와 닮았어도 원리와 구조에 차이가 있다. 뚜껑을 열면 뜨거운 물을 담는 본체 ‘챔버’ 내부에 탬퍼 역할을 하는 ‘프레스’가 끼워져 있고 프레스 아래에 원두 가루가 놓여있으며 드리퍼 바닥이 필터 역할을 한다. 종이나 융 같은 여과지를 따로 사용하지 않고 원두 에센스까지 커피 안에 녹여내는 점도 베트남 스타일 드립 커피의 특색이다. 커피 가루를 담은 핀을 잔 위에 얹은 뒤 챔버 안에 물을 붓고 뚜껑을 닫으면 사람이 할 일은 끝. 나머지는 기다림이 만든다.

3. 현지식으로 갈아입은 맛
음악, 음식, 음료 등의 어느 문화 요소가 지리적으로나 문화권으로나 판이한 지역에 다소 인공적으로 전파될 때, 해당 요소가 이식된 지역에 토착화되어 종내에는 원류와 전혀 다른 독자적 모양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을 톺아보는 일은 흥미롭다. 베트남 커피도 마찬가지. 커피가 막 들어왔을 무렵엔 프렌치 로스팅이 일반적인 방식이었으나 점차 하노이의 카페 몇몇이 선두에 서서 현지 입맛에 맞춘 로스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원두를 아보카도 오일로 볶아 맛을 부드럽게 한다거나 로부스타 원두와 아라비카, 견과류를 배합해 풍미를 배가하는 식이다. 한편 연유와 코코넛, 요거트와 버터, 옥수수 등 특산 부재료를 백분 활용한 시도들은 로부스타의 쓴맛을 잡을 뿐 아니라 오늘날 베트남 커피가 자랑하는 독창적인 맛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의, 베트남에 의한, 베트남을 위한 커피

1. 카페 쓰어(Cà Phê Sữa)
커피에 관해선 일자무식인 나조차 ‘베트남 커피 하면 연유 커피’라고 단번에 말할 수 있을 만큼 대표적이거니와 실제로 현지 내 소비량도 가장 큰 커피이다. 냉장 설비 기술이 미흡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못했던 시절, 쉽게 상하지 않는 연유로 우유를 대체한 데서 기원했다고. 잔 바닥에 깔린 연유 위에 드립 커피를 띄우고 목이 긴 티스푼과 함께 내어주는데, 휘휘 잘 저어 마시면 된다. 로부스타의 강렬한 쓴맛을 연유의 단맛이 상쇄하며 이루는 균형감이 놀랍다.

2. 카페 쯩(Cà Phê Trứng)
‘에그 커피’라 불리며, 주로 하노이에서 맛볼 수 있다. 신선한 달걀노른자와 연유, 설탕과 원두 가루를 섞어 만든 에그 크림이 핵심이다. 단순해 보여도 만드는 이의 손맛이 매우 중요하단다. 어릴 적 가끔 동생 몫을 뺏어 먹던 달걀 쿠키와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을 연상케 하는 에그 크림 맛이 은근히 녹진하고 중독적이다. 다만 식으면 달걀 비린내가 슬그머니 올라오므로 뜨겁게 주문해 빨리 마시는 걸 추천한다. 크림부터 충분히 즐긴 뒤 커피와 섞을 것.

3. 카페 꼿뚜아(Cà phê cốt dừa)
카페 쓰어에 코코넛 밀크를 첨가한 커피. 최근 국내에도 베트남 커피의 바람이 거센데 개중 가장 인기가 많은 유형이다. 현지에선 스무디 형태로 많이 마시는 것 같다. 달고 고소한 코코넛과 묵직한 커피가 생각보다 무척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더위 사냥에 적격이다. 한국에도 지점을 여럿 둔 ‘콩 카페’의 스무디가 현지에서도 유명한 편이다.

단맛과 쓴맛이 공존하는 그들의 커피처럼
본래 커피를 많이 마시는 타입이 아님에도 하노이에 머문 닷새간은 하루 한두 잔씩 꼬박 챙겨 마셨다. 국수 먹기 전 공복엔 든든한 에그 커피를, 호수 산책 중 더위를 식히려 코코넛 커피 스무디를, 걷다가 맘에 든 카페에 주저앉아 연유 커피를, 갑자기 요란스레 쏟아지는 스콜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뜨거운 블랙커피를 다시 한 잔. 모두 다른 유형의 커피였지만, 마실수록 왠지 이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단 느낌을 받았다. 농밀한 단맛과 짙고 빽빽한 쓴맛의 양극이 공존하며 묘히 조화를 이루는 게 이 나라의 인상과도 닮았고.
쌀국수며 샌드위치, 각양각색의 디저트까지 1일 10식으로도 부족한 미식의 세계. 가끔은 송구스럽기까지 한 물가. 전통 모자 농(Nòn)을 쓰고 빛바랜 식민지풍 건물 사이를 누비는 상인들이 그리는 묘하게 슬프고 로맨틱한 장면. 베트남은 아주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행지이지만, 한편으론 정신을 온통 빼놓는 소란한 여행지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비좁고 복잡한 거리를 무법자처럼 돌격하는 오토바이 무리와 요란한 경적을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며 빠르게 지나는 자동차로도 모자라 그 틈바구니를 위태로이 가로지르는 자전거와 사람까지 뒤얽힌 북새통 속을 더위까지 업고서 헤매다 보면 어느새 신경질적인 녹초가 되기 일쑤다.

Đi uống cà phê, 그렇다면 커피 마시러 갑시다
그럴 땐 어쨌든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에 띄는 카페 아무 곳에나 털썩 앉아 연유 커피를 주문해 보자. 방울방울 내려지는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더위가 한 김 가시고 진득한 커피 맛에 마음마저 조금 눅고 나면, 그때부턴 아까 도로 위에서 본 난폭한 무법자와 같은 이들이 맞나 싶게 사뭇 다른 얼굴들이 서서히 보이게 될 것이다. 커피와 함께 미소를 머금은 얼굴들, 여유와 느림을 향유할 줄 아는 얼굴들. 달지만 쓰고, 쓰지만 또 달콤한 그 커피와 쏙 닮은, 이 나라의 얼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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