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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타이완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 참가기
2019 타이완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 참가기
  • 글 사진 박신영 기자
  • 승인 2019.11.25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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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스터 먹으면서 달려봤니?

묵직한 땀방울이 티엔종(田中)을 적셨다. 여명에 기대 열기를 식히지만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2019 타이완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의 새벽은 가장 뜨거운 형광색이었다.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 이름부터 요상하다. 풀 마라톤은커녕 10km 코스를 감당할 만한 쌀 창고가 있을 리 없는데 어떻게 쌀 창고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국내 사이트에서는 도저히 정보를 찾을 수 없어 구글링을 시도했다. 겨우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대만 최대 쌀 생산지인 티엔종을 ‘쌀 창고’에 비유해 만든 말이다. 하마터면 쌀 창고를 달리는 이색 마라톤으로 오해할 뻔했다.

티엔종도 낯설다. 이곳은 타이베이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대만 중부 장화현의 소도시다. 면적 34.61㎢, 인구 4만2133명, 주요 산업이 농공업인 동네로 한국 읍(邑) 수준의 시골인 셈. 대만 사람이 가장 선호하는 은퇴 도시로 손꼽힐 만큼 도시가 조용하고 소박하다. 챙모자를 쓴 할머니들의 힘 빠진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유일한 소음일 정도. 마라톤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티엔종에 매년 수 만 명의 러너가 모인다는 사실이 놀랍다.

올해로 8회인 ‘2019 타이완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은 장화현에서 매년 11월 주최하는 지역 대회다. 타이베이 마라톤, 뉴타이베이 WJS 마라톤, 가오슝 마라톤에 이어 대만에서 네 번째로 규모가 큰 대회로 대만 4대 마라톤에 속한다. 풀(42.3km), 하프(22.38km), 펀 런(9.7Km) 등 다양한 코스가 있고 시내, 공원, 논밭과 논두렁, 동네를 가로지르는 관개수로 등이 코스에 포함된다.

올해는 26개국의 외국인 참가자 500명을 포함 총 1만6500명이 티엔종을 달렸다. 풀 마라톤엔 4500명, 하프 마라톤엔 5797명, 펀 런엔 6203명이 도전해 완주에 성공했다. 그중 한국인이 5명이다.

이렇다 할 관광지가 없는 티엔종 마라톤에 러너가 몰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에디터가 직접 2019 타이완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 펀 런에 도전했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은 그만하고 참가자의 눈으로 티엔종 마라톤의 속살을 들춰봤다.

FUN & FOOD 참가기
대만은 사계절 내내 덮다. 1월에도 평균 기온이 15도를 웃돌아 마라톤 대회는 새벽에 열린다. 티엔종 마라톤 역시 새벽 6시에 시작했다. 풀-하프-펀 런 참가자들이 삼십 분 간격으로 스타트 라인을 넘었고 에디터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출발했다.

시작부터 응원 열기가 코스를 뜨겁게 달궜다. 지역 대회인 만큼 주민들이 독특한 의상을 입고 러너들을 응원한 것. 고깔모자는 기본, 대형 뽀글이 펌 가발, 애니메이션 캐릭터 코스프레, 전 세계 전통 복상, 치어리더 무용복 등을 걸치고 지나치는 모든 러너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짜요(加油, 화이팅)!”를 외치는 응원자 대부분이 40대 이상 장·노년층인 것도 흥미롭다. 티엔종에서 노후를 보내는 노인들이 지역 행사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것.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유쾌한 응원에 발이 조금 가벼워진다.

시내를 지나자 지평선과 맞닿을 정도로 드넓은 논밭이다. 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예부터 곡창지대 노릇을 톡톡히 해 온 티엔종은 일제강점기 시절 대만 북부의 밥상을 책임졌다. 1980년대부터는 대만 최대 쌀 생산지가 됐다. 그래서 시선이 닿는 곳곳이 논밭이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11월엔 황금들녘이 인상적인데, 올해는 추수가 평균보다 1~2주 느려 푸른 논밭이 색다른 매력을 더했다.

사진제공 대만관광청
사진제공 대만관광청

7km 지점을 넘자 러닝 대열이 흐트러졌다. 빠르게 달리던 참가자들이 한두 명씩 발걸음을 늦추더니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쏜살같이 달리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에디터를 공격했다. 티엔종 식당 주인장들이 대표 메뉴를 들고 러너에게 나눠 준 것. 로브스터, 스테이크, 돼지 구이, 불고기, 대만식 볶음국수 등 기존 마라톤 대회에서 볼 수 없었던 음식들이 보급소에 가득했다. 심지어 맥주도 있었다. 기록 갱신은 뒷전, 보급소가 보일 때마다 자리를 잡고 음식을 먹어 치웠다.

신발 끈에 매단 기록 칩이 피니시 라인을 넘자 치어리더가 마이크로 “꽁시(恭喜, 축하해)!”라 외쳤다. 기록 부스에서 확인한 결과, 공식 기록 1시간 43분 34초.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뛰었다지만 재작년보다 40분이나 느려졌다. 맥주를 받아 마신 게 화근이다.

묵직한 메달을 목에 걸었다. 완주의 감격보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어쩌면 완주를 못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한 달 전, 배에 피가 차는 혈복강에 걸려 전신마취 수술을 했다. 늘 건강하다고 자부했는데, 노화를 인지하기도 전에 신체가 먼저 반응했다. ‘언제 이렇게 된 걸까. 건강을 생각한 나이가 됐다’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한창 공허함에 빠진 사이, 대만 미디어의 카메라가 한 곳에 시선 집중된 것을 발견했다. 기자 정신 발동, 사람들을 비집고 주인공 앞에 섰다. 그녀의 환한 웃음 아래로 하프 메달이 걸려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휠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쌍둥이 유모차를 끌거나 아기 포대기를 멘 채 달리는 아빠 마라토너, 80대지만 20대보다 빨리 달리는 노인 마라토너,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이 마라토너 등 핸디캡을 극복하고 달리기에 도전한 사람이 많다. 강아지, 돼지 등 동물과 함께 달리는 사람도 봤다. 도전과 열정은 언제나 위대하고 아름답다.

미지의 도시 티엔종 마라톤의 첫 감정은 의구심이었다. 대만 시골 달리기 대회라는 선입견으로 기대감도 없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느낀 타이완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은 인간미로 가득 찬 대회였다. 러너와 지역 주민이 공생하는 것은 물론 누구나 한바탕 어울려 놀 수 있는 축제. 2020 타이완 쌀 창고 티엔종 마라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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