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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잭 스패로우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단 하나
캡틴 잭 스패로우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단 하나
  • 정다솜
  • 승인 2019.10.22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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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음료 '럼'

페이스북에 접속했더니 ‘4년 전 오늘’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종 모양 아이콘을 클릭하자 ‘궁상맞게도 다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긴 글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바나를 막 떠난 날, 환승을 위해 들른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타코를 우물거리며 끼적였던 ‘한 달간의 쿠바 여행’ 감상문이다. 피식거리며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4년 전 가을의 기억이 더듬더듬 잡혔다.

#Dasom Jung 님이 La Havana, Cuba에 있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아바나 공항에 내렸을 땐 이미 저물녘. 콜롬비아 보고타 공항 노숙 후 날아간 멕시코 칸쿤의 클럽에서 새벽 네 시까지 방방 뛰다 겨우 비행기를 타고 마침내 당도한, 실로 긴 여정이었다. 허기만 채운 뒤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으로 거리에 나섰다가 우연히 한국사람을 만났다. 자신을 뉴욕에 사는 의사라 소개한 A 뒤를 졸졸 따라 차이나타운으로 향했고 우리는 어느 허름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에겐 송구스러우나 아주 지루한 식사였다. 주문을 마치자마자 A는 지난 열흘 동안 본인이 쿠바에서 지내며 느낀 점을 줄줄 읊었는데 대체로 험담에 가까웠다. “자그마치 백만 원을 썼어요. 여기서 외국인은 호구예요. 비싼데 저질이고 친절하지도 않은 데다 툭하면 중국인이냐고 묻죠. 아주 무례해요.”
그러니 늘 의심하고 확인하며 조심해야 한다는 그녀의 당부를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입에 닿기도 전에 뚝뚝 끊어져 버리는 싱거운 스파게티를 허겁지겁 퍼먹었다. 묵은 땀과 먼지에 둘러싸인 몸과, 쿠바 여행 선배님이 쏟아내는 불평불만을 깨끗이 씻어내고 이불 속에 파묻혀 드르렁 코 골고 그르릉 이 갈며 자고 싶었다. 마지막 밤만을 남겨둔 여행자들이 여행지에의 만족도완 상관없이 으레 그러하듯 의사 양반은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녹초였으므로 A의 다음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고 아쉬움이 그렁그렁할 눈빛을 매몰차게 외면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좋아, 이이가 뭘 말하든지 간에 여길 나가면 곧장 방으로 돌아가는 거야. 홈-스윗홈으로. 슬픈 예감은 역시 빗나가는 일이 없어서 식당을 나옴과 동시에 A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밤이니 재즈바에 갈까 하는데 어때요. 재즈, 좋아해요?”

날카로운 첫 다이키리의 추억
삼십여 분 후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숙소 앞은 아니고 ‘여우와 까마귀(La Zorra y El Cuervo)’ 재즈바 앞에. 재즈를 잘 알진 못하지만 음악을 좋아한다고, 나야 좋다고 대답해 버린 것이다. 밀가루 냄새가 진동하는 면 덩어리를 씹어 삼키며 굳힌 결심은 사라졌고 나는 미끼를 물었고 물은 엎질러졌다. 수트를 빼입은 노신사가 열어준 빨간 전화 부스 모양 출입문을 통과해 계단을 내려가자 소극장 만한 크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우리는 무대가 잘 보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며칠 전엔 서서 겨우 봤는데 오늘은 운이 좋다고 의사 양반이 말을 보탰다. 하얀 블라우스 차림의 중년 여성이 다가와 공연 관람료 안에 음료 두 잔이 포함돼 있다고 안내했다. 칵테일을 마셔본 경험이 별로 없는 내가 메뉴판을 한량없이 느리게 읽으며 우물쭈물하자 A는 ‘다이키리’를 추천했다. 헤밍웨이가 매일 마신 칵테일이란 부연을 덧붙이면서. “아휴, 세계적인 대문호가 사랑하던 술이라니 그럼 그걸로 할게요.”

잠시 뒤 흡사 슬러시처럼 생긴 칵테일이 평범한 하이볼 글래스에 담겨 나왔다. 한 모금 마셔 보니 달고 상큼하다. 잘게 부수어진 얼음이 시원함과 적당한 식감을 더한다. 맛있네, 맛있어. 꼴딱꼴딱 삼키며 악기를 조율하는 연주자들을 구경하자니 잔이 금세 비었다. 빈 잔을 들고 바에 가서 같은 술을 추가로 주문하자 나이 지긋한 바텐더가 싱긋 웃으며 새 잔에 술을 콸콸 쏟아부었다. “지금 그게 무슨 술이죠?” “럼, 럼이에요.” 한층 짙어진 맛의 두 번째 다이키리를 받아든 채 테이블로 돌아오자 무대의 막이 올랐다. 피아노와 드럼, 베이스로 이뤄진 그날의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나는 아마 다이키리를 두 잔쯤 더 마셨던 것 같고 이튿날 아침의 숙취는 공연 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카리브해를 적신 피, 땀, 눈물
쿠바의 상징 중 하나로 꼽히는 럼은 사탕수수즙에서 설탕을 만들고 남는 부산물인 당밀(Molasses), 즉 찌꺼기에 물을 섞어 발효하고 증류해 만드는 술이다.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소동, 난동이란 뜻의 ‘Rumbullion’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는 설이 있고 아주 센 술을 뜻하는 ‘Rombostion’ , 혹은 당류 전반을 일컫는 라틴어 ‘Sacarrum’에서 비롯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모두 정확하진 않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탕수수라 할 때 흔히 떠올려지는 달콤한 이미지와 달리 럼은 400여 년 전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와 땀, 애잔한 눈물이 녹아있는 술이라는 점이다. 설탕 제조업이 최고의 부가가치 산업으로 주목받던 16세기 중반, 사탕수수 재배에 알맞은 기후와 조건을 가진 쿠바에서도 본격적으로 농장이 확대되었다. 럼은 바로 이 시절 농장으로 팔려 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당밀을 모아 발효시킨 다음 대충 걸러 마시던 노동주로서 탄생했다. 사실 당밀이란 게 이미 대부분의 당분이 빠져나간 잔여물인 데다 그마저 남은 당분도 발효 과정에서 알코올로 바뀌기 때문에 술맛은 매우 거칠었으나, 그럼에도 럼은 참혹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살아내던 노예들의 고단함과 시름을 덜어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술이 노예뿐 아니라 군인과 선원, 그리고 해적 집단에서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유행했다는 것이다.

뱃사람들의 생명수
때는 바야흐로 대항해시대. 수많은 군함과 상선이 유럽 본토와 식민지 신대륙을 오가며 물자를 실어날랐다. 여로가 워낙 길다 보니 쉽게 썩는 물 대신에 마실 것을 실어야 했고, 험난한 바다 위 외롭고 괴로운 항해를 견디기 위해선 그게 술이어야 했다. 와인과 맥주의 경우 도수가 낮은 발효주라 금세 변질하고, 보관성이 좋은 위스키나 브랜디는 대량으로 구매하기엔 고가였던 바. 저렴하면서도 강렬한 고도수를 지닌 럼의 등장은 모두를 열광케 했다. 게다가 이 술은 해열제 겸 소독약, 중화제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며 함선의 필수 상비품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으니, 오죽하면 영국 해군의 공식 보급품 리스트에 선두로 올랐을 정도. 같은 맥락에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주인공인 ‘잭 스패로우’의 유별난 럼 사랑을 잠시 훑어보자. 다섯 편에 달하는 시리즈 내내 우리의 잭 선장님은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손에서 럼을 놓치지 않는다. 가진 것을 몽땅 잃고 무인도에 갇혔으면서도 귀신 같이 럼을 찾아내 마시는가 하면 무인도에서 탈출하기 위해 엘리자베스가 럼을 태워 불을 내자 나라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고 분노한다. 부하도, 사랑하는 이도, 그리고 목숨 같이 여기는 배를 버릴 때도 잭이 럼만은 포기하지 않고 챙기려 든 까닭은 늘 손에 꼭 쥐고 있는 병 속의 술이 그를 위시한 뱃사람들의 생명수였기 때문 아닐까. 물론 잭은 허구 속 인물이고 과장된 묘사도 일면 있지만, 어쨌든 해적을 포함한 뱃사람들이 럼을 소중히 여겼던 당시 시대상의 반영물임은 틀림없다. 한편 럼 수요가 급증하자 식민국들은 쿠바에서 당밀을 사다가 럼을 만들어 아프리카로 수출했고, 그 돈으로 더 많은 흑인 노예를 구입해 싣고서 카리브로 돌아왔다. 럼이 당초와 다르게 소위 ‘삼각 무역’이라 불리는 노예무역의 주요 물품이 돼버리고 만 것이니 씁쓸한 대목이다. 노예의 애환을 달래고자 만든 위로주가 또 다른 노예를 계속해 끌어들이는 뜻밖의 악순환을 낳았단 사실을, 농장의 그들은 알았으려나.

비바, 럼 리브레
럼은 숙성 기간과 색상에 따라 크게 화이트 럼, 골드 럼, 다크 럼으로 나뉘며, 이외 과일이나 향신료를 첨가해 만든 플레이버드 럼, 스파이스드 럼이 있다. 숙성을 거치지 않거나 아주 단기간만 숙성한 화이트 럼은 향과 맛이 가벼운 편이어서 다양한 칵테일의 베이스Base(기주)가 된다. 헤밍웨이의 페이보릿 ‘다이키리’를 비롯해 청량한 민트와 싱그러운 라임이 조화로운 ‘모히토’ , 쿠바 사람들이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 전쟁을 치르며 마신 쿠바식 럼콕 ‘쿠바 리브레’ , 파인애플과 코코넛 향이 팡팡 터지는 트로피컬 칵테일의 정석 ‘피냐 콜라다’ 등이 화이트 럼에 기반한 칵테일이다. 골드 럼과 다크 럼은 향과 맛이 비교적 중후한 칵테일의 재료로 쓰이고 밀가루와 달걀 비린내 제거에도 효과적이라 요리와 제빵에 두루 사용된다. 흥미롭게도 요새는 럼 양조장들이 모험적 양조를 시도하는 추세이다. 당밀이 아닌 사탕수수즙을 재료로 하거나 발효, 숙성 기간을 달리하거나 오크통에 독특한 처리를 감행하는 식인데, 그 결과 선보여지는 프리미엄 럼들은 맛이 농밀하고 고급스러워서 다른 술이나 재료와 굳이 섞을 필요 없이 스트레이트로 즐기기 좋다. 마셔본 중 가장 좋았던 럼은 버번 캐스크에서 20년 동안 숙성시킨 럼을 프렌치 오크로 옮겨 재숙성한 ‘플랜테이션 XO 20주년’. 캐러멜 시럽을 발라 불에 살짝 구운 바나나향 뒤로 부드럽게 퍼지는 질감이 아주 매력적이다. 저렴한 술로 인식돼 온 과거를 털고 자유로이 변모할 럼의 행보가 기대된다. 럼 만세, 자유 럼 만만세.

궁상맞아도 잭 스패로우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감상문에 쓴 대로 쿠바에 머문 내내 참 궁상맞게도 다녔으나 럼만큼은 정말 다양하게, 잭 선장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이 마셨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라데로 해변에 누워 무제한으로 퍼다 마셨던 피냐 콜라다. 바다 모기에게 등짝을 뜯겨가면서도 꿋꿋이 입속으로 날랐던 까요 후띠아스의 모히토. 트리니다드 살사바에서 마신 칸찬차라와 라 플로리디따의 오리지널 프로즌 다이키리까지. 럼과 관련해 곧장 떠오르는 기억만도 여럿이지만, 특히 각별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아무래도 아바나의 말레꼰에서 끈적한 바닷바람을 안주 삼아 마신 럼 같다. 그저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럼에 가장 싼 음료인 콜라를 말아 마신 것에 불과했지만 뭐 사실 그게 중요한가. 노을에 물든 파도가 칠흑빛이 될 때까지 방파제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불던 병나발과 우리가 술 마시고 했던 말들이 중요하지. 언제 어디서든 음악이 흐르고 누구나 춤을 추는 게 자연스럽던 쿠바의 가을. 그곳에 안부를 띄워 보내고 싶은 밤이다. 아바나의 밤바다는, 그리고 말레꼰은 여전히 안녕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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