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아홉 봉지의 짜이 파우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아홉 봉지의 짜이 파우더
  • 정다솜
  • 승인 2019.09.25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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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음료 '짜이'

어느 겨울밤. 인도 기차의 ‘꼬리칸’이라 불리는 슬리퍼 2층 침대 위에서 나는 끊임없이 뒤척여대고 있었다. 야간 기차에 따라붙는 악명이 신경 쓰여서 허리에 칭칭 동여매 둔 카메라며 배낭 무게가 시간이 지날수록 배를 압박해왔고, 침대는 어찌나 차갑고 딱딱한지 등이 배겨 죽을 맛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돼서야 간신히 든 선잠마저 얼마 가지 못했는데, 기차칸 안에 웬 낮고 짧은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며 고요를 깼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음식만큼이나 갖가지 음료가 존재한다. 그리고 음료에는 그 나라와 지역의 생활상과 역사, 문화가 녹아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마시는 모든 것들을 소개하는 작가의 음료 이야기. 그 첫 번째는 인도의 짜이다. <편집자 주>

"짜아-이, 가람 짜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목소리가 이윽고 귀밑까지 다다른 순간. 침낭 속에서 고개만 쏙 빼 복도를 내려다보다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눈동자의 주인은 자기 몸통과 비슷한 크기의 보온통을 오른팔에 걸고서, 다른 손으론 비닐만큼이나 얇은 반투명 플라스틱 컵 더미를 든 마른 체구의 남자. 마침 그의 손을 막 떠난 작은 컵이 내 바로 아래층 사람에게 닿은 차였고, 가녀린 컵 속의 연갈색 액체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주변의 모든 이가 같은 컵을 쥐어 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왠지 합류해야만 할 것 같아 얼결에 1루피를 건네고 ‘가람(뜨거운) 짜이’를 받아들었다. 후후 불어 홀짝인 짜이의 첫인상은 글쎄. 불호였던 것 같다. 아주 달면서 날카롭게 쓰고 맵기까지 한 이 뜨거운 음료는 단맛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생강이나 계피류의 향신료를 즐기지 않는 내 취향을 완벽히 비켜 갔다. ‘에이, 차라리 데자와가 낫구먼 뭐하러 아침잠까지 버리고 이런 걸 마신담.’ 툴툴거리며 남은 음료를 애써 입안에 털어 넣던 그땐 몰랐다. 내가 곧 그 밀크티에 심각하게 빠져들어 하루에 너덧 잔씩 마시는 걸론 모자라 장사를 하겠답시고 짜이 파우더를 꽉꽉 채워 담은 배낭을 멘 채 귀국하게 될 줄은.

인도의 하루를 열고 닫는 음료
짜이Chai는 인도 아대륙 전반에서 주로 마시는, 향신료를 가미한 밀크티다. 밀크티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영국식이나 최근 큰 인기를 누린 대만식의 그것과는 만드는 방식과 맛이 꽤 다르다. 이름의 경우 중국어인 ‘차(茶)’가 중앙아시아를 거치는 동안 ‘차이’가 된 데서 영향을 받았다. 워낙 인도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해있는 음료라 ‘인도에선 하루를 짜이로 시작해 짜이로 마무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여행하다 보면 정말이지 어느 시간이든, 어느 장소에서든 짜이 마시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기차에서 만난 예의 검은 눈동자 사나이처럼,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짜이왈라Chai Wallah(짜이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분주한 까닭이다. 동이 트기 훨씬 전부터 부단히 짜이를 끓이고 거리를 쏘다니며 “짜이”를 외쳐대는 이들은 어쩌면 인도 사람들의 하루를 열고, 또 닫아주는 문지기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식된 문화로부터 피어난 특유물
인도인의 짜이 사랑을 볼 때 누군가 “짜이는 저 유구한 인더스 문명과 함께 태동하였네”라고 말한다면 암, 그래야 마땅하지, 하며 한 치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일 텐데. 사실 놀랍게도 짜이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도에는 애당초 차를 마시는 풍습이나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차 문화는 식민시기 영국의 필요에 의해 이식되었다. 1800년 초. 영국 내 차 소비량이 많이 늘어나자 영국은 고가의 중국산 차를 대체할 요량으로 인도 동북부 아쌈 지방을 홍차 재배지로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홍차는 영국인과 인도 귀족층만이 접근 가능한 고급 기호식품이었으나, 이후 생산량이 소비량을 압도하며 차 가격이 폭락하자 인도 대중들의 삶에도 차가 들어서게 되었다. 영국은 차 문화를 홍보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국영 공장·광산 노동자들의 일과 중에 수시로 티타임을 마련하는 등 홍차 소비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하지만 최상급 차는 여전히 값비쌌으므로 대중들은 저품질의 홍차를 마셨고 이때 하급 찻잎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도인에게 익숙하고 저렴한 향신료들을 여럿 넣어서 달이듯 오래 끓여내는 독특한 방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영국식 밀크티와 다른 이 새로운 음료를 ‘마살라 짜이’라 부르며 구분했지만, 이 형태의 짜이가 더욱 널리 퍼지면서 마살라를 빼고 그저 짜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살라라는 마법의 가루
이처럼 인도식 밀크티 특유의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존재는 단연 ‘마살라Masala’다. 마살라란 인도 음식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가루나 페이스트 형태의 혼합 향신료를 일컫는 말로, 짜이 마살라에는 보통 달큰한 향을 내는 계피와 알싸한 끝맛을 책임지는 생강을 비롯해 카다몸, 팔각, 정향 등이 쓰인다. 지역에 따라 박하나 감초를 넣기도 하며 카슈미르 지방에서 마셔본 티베탄 짜이에는 아몬드류의 견과가 띄워져 있었다. 마살라의 배합 비율이 고정돼 있진 않아서 내용물이 같더라도 얼마든지 다양한 마살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짜이 역시 원칙적인 레시피는 없으므로 가게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한편 우유를 물과 섞느냐 마느냐, 우유 대신 가당연유를 넣느냐, 지방 함량이 높은 야크 혹은 버팔로 우유를 쓰느냐 등 우유 활용 방식이 짜이 맛을 좌우하는 팁이 되기도 한다.

한국형 짜이왈라라는 어리석은 꿈
학교 후문에 리어카를 세워두고 종이컵 한가득 짜이를 담아다가 잔당 천 원씩에 팔면 용돈은 쉽게 벌겠다며 정확히 짜이 파우더 열한 봉지를 오십 리터 배낭 속에 욱여넣고 호기로이 돌아왔지만, 결국 장사 같은 건 못했다. 유사 짜이라고도 말하기 민망한 멀건 색의 뭔가를 끓여놓고서 “오 젠장, 이게 아니잖아”란 말을 열댓 번쯤 반복하고 숯불이 아닌 가스 불을 탓하다가 눈 깜짝할 새 화구 밖으로 무자비하게도 끓어 넘친 우유 얼룩을 닦으며 실은 한국의 망할 살균 우유가 맛을 다 망친 거라고, 애먼 우유나 저주하는 못난 짓을 다시 열 번쯤 더 한 뒤 결정된(포기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일이다. 남은 아홉 봉지의 파우더는 책장 한 칸을 차지한 채 육 년 정도 더 살다 갔다. 유통기한이야 진즉에 초과했음을 알았지만 어쩐지 그들을 쉽게 내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서늘해지는 계절에 짜이를 그리워하네
인도에서의 모든 날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짜이만은 늘 좋았기에 그랬던 것 같다. 매연에 그을린 목을 씻겨준 것.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깔깔해진 입을 축여준 것. 갠지스강을 가르는 보트 위에서 느꼈던 이유 모를 긴장을 풀어준 것. 무엇보다 낮과 밤의 확연한 온도차, 그 간극을 따스하게 메워주던 것이 다름 아닌 짜이였기에. 식도를 덥히며 내려가는 짜이를 홀짝임으로써 이 몸이 정녕 인도에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해내던 순간들을, 나는 좋아했다. 이렇게 사나운 비를 흩뿌리던 태풍도 다 지나가고, 무더운 낮이 있기나 했었냐는 듯 저녁엔 서늘한 얼굴로 변하는 계절이 돌아오면 문득 그립다. 침낭 바깥으로 겨우 뻗은 차가운 손가락에 감겨오던 그 뜨겁고, 입술이 저릿하도록 달고, 착 달라붙는 맵싸함마저 근사한, 한 잔의 밀크티가.

정다솜

여행과 술을 사랑하는 바텐더. 여행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마실것’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 호기심의 번위를 더 넓히기 위해 현재 런던 워킹홀리데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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