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가는 종이, 전주 한지
천년을 가는 종이, 전주 한지
  • 조혜원 기자
  • 승인 2019.08.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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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한지 서정철 대표

종이는 천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옛말이 있다. 전통 한지는 내구성이 강하고 보존성이 좋으며 윤기가 난다. 고려 시대부터 외교문서와 임금에게 올리는 주요 문서는 대부분 전주 한지를 이용할 만큼 전주는 한지의 본향이다.

좋은 한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질 좋은 닥나무와 깨끗한 물, 제조 기술이다. 전주에는 크고 작은 하천이 많고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가 곳곳에 있어 한지를 만들기 좋은 여건을 갖췄다. 전주 흑석골은 조선 시대부터 한지지소가 있었으며 70~80년대까지 한지 공장이 모여있는 마을이었다. 고궁한지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 된 한지 공장으로 3대가 가업을 이어 운영해왔지만 산업화의 물결에 사업이 기울면서 문닫을 위기에 처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한지를 업으로 삼아온 서정철 대표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고궁한지를 인수했다. 전통성 있는 공장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궁한지 서정철 대표는 전통 한지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현대의 필요에 맞는 한지를 만든다. 한지 만드는 작업은 과거보다 덜 힘들어졌지만 더 어려워졌다. 부채, 미술작품, 인테리어 등 소비자가 원하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료 배합, 규격, 제작 방식을 모두 다르게 만들어내야 한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섬유를 최대한 길고 손상되지 않게 가공한 한지를 최상품으로 치며 그건 공장의 기술력이다. 김동식 선자장도 고궁한지의 제품만 사용한다. 합죽선에 사용되는 한지는 중량, 강도, 깨끗함이 생명이다. 중량이 1g만 많아져도 부채가 벌어지고 형태가 망가진다. 1g 단위로 고급 한지를 만들어내는 곳은 고궁한지뿐이다.

“모든 건 원재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닥나무를 사용해야 좋은 한지가 나오죠. 한지가 우리에게 완제품이지만 소비자에겐 원재료이기 때문에 항상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2016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문화재 복원팀에서 고궁 한지를 비롯한 대한민국 한지 업체 여러 곳에 한지 샘플을 요청했다. 고궁한지는 16종의 샘플을 제작해 보냈고 최종 선정 되어 ‘바이에른 막시밀리앙 2세 책상’을 복원하는데 사용됐다. 그동안 유럽에서 문화재를 복원할 때 일본의 전통지 화지를 주로 사용해왔는데 고려 시대의 문서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한지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최근에는 한지를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전통 한지를 만들 때 밀대, 콩대, 볏집, 나무 등을 태운 재를 뜨거운 물에 거른 잿물을 사용한다. 산성인 종이와 알카리성인 천연 잿물이 만나 중성화 된 한지는 화학반응을 쉽게 하지 않고 보존성이 좋다. 루브르 박물관 복원팀의 책임자도 고궁한지에 방문해 잿물을 사용해 만들어지는 한지 제작과정에 주목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궁한지는 파리 상늘레에Sennelier 화구전문점에 미술가, 판화가용 한지를 납품하고 있다.

고궁한지는 예술가가 작품에 사인하듯 한지에 압으로 도장을 찍는다. 예술을 하는 마음으로 한지를 만들어낸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한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견본품 주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손이 많이 가지만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살린 종이를 선호한다. 경복궁 창덕궁 문에 발라진 한지도 고궁한지의 제품이다. 한지 공장의 포트폴리오라고 할 수 있는 한지 뜨는 틀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어 전통성과 시장성을 모두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최고급 한지를 만드는 기술은 한국의 기술이자 전주의 기술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방법이지만 자부심과 전통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실행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중국산 한지가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에 있고 한지의 시장성은 작지만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명예와 자부심이 걸린 일다. 고궁한지 대표는 누군가는 해야하는 고단한 길을 예술을 한다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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