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갈매기
이스탄불의 갈매기
  • 글 사진 백종민
  • 승인 2019.06.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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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만난 풍경

#이스탄불에 사는 갈매기
나는 갈매기다. 아직 이름은 없다. 이천 년이나 살았는데 이름 하나 짓지 못했다.

터키의 대표 이미지, 탁심광장을 달리는 빨간색 트램.
터키의 대표 이미지, 탁심광장을 달리는 빨간색 트램.

이스탄불 카디쿄이Kadıköy 항구 한구석이 내 영역이다. 여긴 아시아의 끝이다. 아니 시작인가? 그런 건 이름도 없는 갈매기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먹이만 구할 수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항구는 꽤 괜찮은 서식지이다. 갈매기 에게도, 물고기 에게도. 연락선의 물길을 따라 모여든 물고기 수가 적지 않다. 하늘을 날다가 수면 가까이 머리를 내민 물고기 한 마리만 낚아채면 된다. 하지만 이천 년 동안 이 짓을 하다 보니 사냥도 귀찮아 진다. 그럴 때는 광장을 어슬렁거린다. 날개 짓을 할 필요도 없다. 고양이 마냥 어슬렁거리면 한갓지게 연락선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내 끼니를 채워준다. 주로 씨밋Simit 이라고 불리는 터키식 참깨 빵이다. 꽤 괜찮은 간식거리다. 이렇게 살면 배 굶을 일이 없는데 한 가지 조심할 게 있다. 놀이감을 찾는 고양이들에게 잡히면 불사조라도 해도 그날이 제삿날이 될 테니까.

이스탄불의 길거리 동물들은 사람과 함께 산다.

#이오니아 사람들의 비잔티움
카디쿄이 항에 터를 잡은 건 오백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전에는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에 살았다. 항구에서 연락선을 따라 가면 유럽 대륙이 나온다. 바람 좋은 날에는 날개 짓 두어 번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사람들이 ‘골든혼Golden horn’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터키 사람들의 간식, 씨밋. 밀가루 위에 참깨를 묻혀 구워낸다.

나는 이 땅에 도시가 세워진 해에 태어났다. 알을 깨고 처음 만난 건 이오니아 사람들이다. 날기 시작하면서 물고기 사냥을 배웠다. 불사조 갈매기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수면 가까이 올라오는 물고기를 찾으면 형제자매들이 먼저 낚아챘다. 좀처럼 내게 사냥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동물의 세계는 매정 했고 제대로 먹질 못하니 나는 점점 야위어 갔다. 사는 게 힘들었다. 이럴 바에 왜 태어났나 싶은 마음에 신세 한탄이 늘어갔다. 사냥은 남의 일이 되어 버렸다. 해변가를 배회하는 야윈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이오니아 사람들은 빵 조각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사냥보다 이편이 나았다. 그들이 사는 곳을 기웃거리는 시간이 늘었고 나름의 생존 방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인간이 먹는 음식을 탐하기 시작했다.

모스크에 들어가 전 세정소에서 몸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

이 시절에 나를 살찌운 건 8할이 빵과 채소였다. 건강한 식단이었다. 하지만 자주 취했다. 포도로 만든 술이 지천에 깔렸으니까. 마시다 버리는 술도 많아서 갈매기도 비틀거릴 정도였다. 요즘 자주 피곤을 느끼는 건 그때 과음으로 간이 나빠진 탓이다.

하기야 소피야 성당은 성당으로 시작해 모스크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시대부터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갈라타 타워.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내가 취해 있는 사이, 동로마 제국이 골든혼으로 수도를 옮기고 콘스탄티노플로 도시 이름을 바꿨다. 제국 사람들은 노예들에게 농사를 맡기고 따듯한 계절에 들판에서 개와 매를 데리고사냥을 즐겼다. 몇 번 구경갔는데 어느 날, 매 녀석들이 달려들어서 다리를 하나 잃었다. 지금도 내 심장이 안 좋은 건 그때 심히 놀랬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화와 이슬람 코란이 함께 하는 하기야 소피야 성당 내부.

이 시절에 고기 맛을, 정확히 말하자면 돼지고기란 녀석을 알아 버렸다. 기독교를 믿는 동로마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소는 밭을 가꿔야 하니 먹지 않았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돼지를 잡아서 소시지도 만들고 염장을 해 겨울 내내 먹었다. 몇 번 훔쳐 먹은 적이 있는데 갈매기가 먹기에는 많이 짰다. 내가 고혈압으로 죽으면 그때 먹은 염장 돼지고기 때문이리라. 돼지를 잡는 날에는 숯불에 구운 고기도 몇 점 먹을 수 있었다. 소시지도, 염장 한 돼지도 맛있지만 역시 돼지는 숯불에 구운 맛이 일품이다.

갈매기와 달리 노예들은 고기를 먹기 힘든 시기였다. 그들은 단백질을 보충하려고 덫을 놓아 새를 잡고는 했는데 여기 기웃거리다가 명을 달리한 친구들이 많다. 쯧쯧.

터키 전통 간식인 로쿰Lokum은 오스만 제국 시대인 170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1453년은 내게 중요한 해이다. 그 해 봄,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무너트렸다. 한 달 반 동안 이어진 길고 긴 공성전의 결과였다. 골든혼은 살육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참혹한 현장에는 먹을 것마저 씨가 말랐다. 카디쿄이로 옮긴 건 이 때다.

카디쿄이 항구 앞에는 신선한 해산물을 다루는 시장이 있다.

도시의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뀐 날부터 오백 년 동안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대신 양고기가 넘쳐났다. 어디서나 숯불에 양고기를 굽고 있었다. 이슬람 사람들은 갈매기 에게도 친절했다. 기웃거리는 내게 늘 한 점을 던져 주었다. 요즘 광장에서 사람들이 주는 고기를 받아 먹다 보면 이 때 생각이 많이 난다. 참, 살 만했는데. 카디쿄이로 옮겨오기 전까지만 해도 양고기는 귀족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맛 볼 기회가 없었다. 처음에는 낯선 맛과 쾌쾌한 냄새가 힘겨웠다.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익숙했던 돼지고기 탓이었을 게다. 갈매기 따위가 음식을 가릴 형편이 되냐 묻겠지만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던져 준다고 다 먹는 건 아니다.

터키 음식 중 가장 유명한 되네르 케밥. 되네르Döner는 돌아간다는 뜻의 터키어다.

#새우 맛 과자를 찾아서
이제는 양고기 맛에 익숙해 졌지만 문득 돼지고기의 기름진 맛이 내 노란 주둥이를 훑고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맛을 잊기 위해 다양한 음식을 찾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최근에는 동양에서 온 과자에 흠뻑 빠졌다. 긴 막대 모양으로 생겼는데 새우 맛이 난다. 비잔티움의 포도로 만든 술도, 콘스탄티노플의 돼지고기도, 이스탄불의 양고기 맛도 비교할 수 없는, 내 이천 년 생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맛이었다. 그토록 잡기 힘든 새우를 이렇게 편하게 과자로도 먹을 수 있다니! 요즘 우리 갈매기들 사이에서는 극동아시아의 한 나라가 화제이다. 그곳에 가면 갈매기에게 새우 맛 과자를 먹이로 주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 땅 이야말로 갈매기 천국이다.

슬픈 전설은 담은 채 보스포루스 해협 가운데 떠 있는 ‘마이덴 타워Maiden's Tower’.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천 년을 살았다. 내게 음식을 주던 인간들의 피부색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 너무 오래동안 한 곳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이젠 극동아시아로 향하는 긴 날개 짓을 해 볼까 한다. 새우 맛 과자가 물과 꿀처럼 흐르는 땅으로.

오스만 제국은 골든혼에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담아 톱카프 궁전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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