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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의 성스러운 땅
마오리의 성스러운 땅
  • 글 박재희 사진 박진희
  • 승인 2019.04.22 14: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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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통가리로 노던 서킷

평생 잊지 못할 꿈의 트랙. 신성하고 성스러운 마오리의 땅은 우리를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했다. 고대 용암류와 유황 연기를 내뿜고 있는 지열지대, 이 보고도 믿기지 않는 진기한 전망과 에메랄드빛 호수는 황량하면서도 신비했다.

평생 잊히지 않을 트레킹 코스를 하나 말해보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뉴질랜드의 통가리로 노던 서킷Tongariro Northern Circuit을 꼽겠다. 트램핑깨나 하는 사람들이 최고라고 입을 모으는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에 비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네팔의 히말라야나 페루의 잉카 트레킹, 혹은 알프스를 최고로 꼽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뉴질랜드의 그레이트 웍스Great Walks를 앞에 세우고 싶다. 그레이트 웍스 아홉 개 트랙 가운데 밀포드는 ‘죽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 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길’이라고도 한다. 과연 수십 만 종의 이끼로 덮인 숲과 산 정상의 빙하 호수, 폭포로 이어지는 길은 발걸음마다 탄성을 뱉게 했었다. 하지만 그 선연한 신비와 아름다움, 장엄함마저도 통가리로를 걷고 난 후에는 슬며시 흐려졌음을 고백한다.

통가리로는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 언어로 ‘신성하다’는 뜻이다. 통가리로, 루아페후Ruapehu, 나우루호에Ngauruhoe 세 개의 화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폴리네시아인 마오리가 처음으로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에 정착한 이래 거룩한 땅으로 여겨왔다. 1887년 마오리의 지도자 테 헤우헤우 투키노Te heuheu Tukino 4세는 마오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신적 토대이자 성스러운 영지로 지켜온 이 지역을 정부에 헌납하고 보호를 요청했다. 이주 유럽인들의 무자비한 토지분할과 개발로부터 자신들의 영적인 성소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는데 이것이 국립공원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통가리로는 뉴질랜드가 최초로 지정한 국립공원이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의 루아페후산(2797m), 통가리로산(1968m), 나우루호에산(2291m) 일대는 지금도 화산활동이 활발해 연기를 내뿜고 있는 지열지대가 많다. 특히 ‘폭발하는 구멍’이라는 뜻의 이름에 걸맞게 루아페후산은 1953년 151명이 사망했던 대폭발 이후로 최근 2007년까지도 다섯 차례나 폭발했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은 상시적으로 분화구 호수의 온도를 체크하고 화산 조기 경보 시스템을 운영한다. 이렇게 위험한 지역인데도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끊임없이 통가리로를 찾는다. 이곳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자연 유산인 동시에 귀한 마오리 유적이 많아 세계 인류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세계 복합 유산 지역이다.

통가리로 지역은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였다. 영화에서 절대반지가 만들어지고 파괴되기도 했던 운명의 산(Mount Doom)으로 등장했던 나루호에산을 루아페후산과 통가리로산 사이로 한 바퀴 돌아 일주하는 여정이 바로 통가리로 노던 서킷이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 트레킹을 하는 동안 코를 찌르는 화산 연기 속에서 활화산의 표면을 오르내리게 된다. 고대 용암류와 유황 연기를 내뿜고 있는 지열지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진기한 화산전망과 분출 와지를 메운 청색과 에메랄드 색의 호수는 황량하면서도 신비했다. 걷는 내내 우리는 별세계에 와있다는 느낌에 압도당했다. 마치 다른 행성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소리를 빨아들인 듯 막막했던 진공의 고요, 그런가하면 갑자기 존재를 휘잡아 던져버릴 듯 몰아치던 바람, 가늠하기조차 벅찬 자연의 신비를 향해 발걸음을 떼어보자.

첫째 날은 화카파파 마을에서 망가테포포 산장까지 8.5km를 걷는 가벼운 몸풀기의 날이다. 바닥을 살피며 보드워크를 걷다가 나지막한 화산을 양 옆으로 거느린 루아페후산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위용에 잠시 넋을 잃는 듯 했다. 한 여름이지만 루아페후는 허리까지 눈을 입고 있었다. 고대 용암류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진기한 풍경에 이어졌다. 과거에 용암을 쏟아냈던 분기공을 지나면 망가테포포 계곡 트랙에 이르고 산장에 도착한다. 비교적 평평하고 길지 않은 거리지만 언제나 첫날은 등에 짊어진 무게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다. 산장 근처 개울까지 내려가서 발을 담그고 쉬면서 첫날의 피로를 풀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하늘은 구름을 빠르게 몰아댔다. 황급히 달아나듯 구름이 걷히더니 노을이 물든 평원에 후지산을 닮은 타라나키산이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일은 맑은 날이 되리라는 선언이었다.

하루에도 백번 일기가 변한다는 통가리로답게 두번째 날 아침에는 안개가 두터웠다. 산장에 함께 묵은 사람들 대부분 오늘은 사우스 크레이터, 레드 크레이터를 지나며 에메랄드 호수들을 만나고 오투레레 산장까지 12.8km를 걷는다고 했다. 우리는 일정상 오투레레 산장을 지나 와이호호누 산장까지 7.5km를 더 가야했다.

망가테포포 산장에서 소다스프링Soda Springs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무거울 만큼 진한 안개가 깔려 마치 꿈속에서 강 위를 걷는 것처럼 바닥도 풍경도 잘 보이지 않았다. 뉴질랜드 그레이트 웍스 트랙은 국립공원에서 철저히 등반객 인원을 제한하고 허가제로 운영하기 때문에 산장을 제외하면 걷는 동안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오늘은 인산인해, 흡사 한국에서 단풍 산행을 위해 몰려든 설악산 국립공원을 연상시킨다. 알고 보니 오늘 전반부는 하루 코스로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 루트를 걷는 사람들과 겹쳐지는 구역이다.

본격적인 등산 오르막이 시작되면 화산재가 뒤덮인 험한 돌길이다. 오르기 쉽도록 나무 계단을 설치해 둔 덕분에 미끄러지지 않고 오로지 숨에만 의지하며 명상을 하듯 발을 옮겼다. 해발 1600m 높이의 고지에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화산폭발로 생겨난 분화구, 축구장의 5배가 넘는다는 어마어마하게 큰 분화구를 걷는 상상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사우스 크레이터는 안개로 가득하다. 드라이아이스를 백만 톤 쯤 풀어놓으면 이런 풍경이 되려나? 광활한 고원의 평야에 들어서니 많던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안개에 파묻혀버린 것이다. 서있는 공간은 넓이나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앞서 걷던 친구들은 차례로 안개가 흡수해 버렸다. 팔을 뻗어 손끝이 닿는 거리만큼만 존재하는 기묘한 세상,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SF영화 속의 다른 우주에 도착한 느낌이다.

사우스 크레이터를 지나면 길이 험해진다. 가파른 경사에 바람은 당장이라도 몸을 번쩍 들어 던져버릴 기세다. 발은 미끄럽고 온몸으로 바람을 밀면서 산을 오르다 보면 거대한 화석지대에 도착한다. 붉은 빛의 분화구라해서 붙인 이름 레드 크레이터Red Crater. 진한 연기와 함께 유황냄새가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아직도 화산활동이 활발한 산이라 맑은 날에는 바라보기조차 공포스럽다는데 오늘은 안개로 차라리 평화롭다. 아찔한 레드 크레이터의 능선을 따라 정상을 넘는 순간 드디어 기다렸던 보상이 찾아왔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빛을 발하며 숨겨진 보석, 마오리 신의 정령이 깃들었다는 세 개의 에메랄드 호수였다.

호수에 닿으면 전설보다 더 비현실적인 풍광에 숨을 멈추게 된다. 사진으로 수 만 번 봤던 바로 그 골짜기를 덮고 있던 안개가 서둘러 흐르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에서 빛이 바삭거린다. 탄성을 지르며 우리는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음은 가볍고 빠르게 에메랄드 호수 위를 날았는데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직벽처럼 가파른 내리막으로 화산석이 뒹굴며 흘러내렸다. 등산스틱에 의지하고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도 속절없이 미끄러졌다. 과감한 젊은이들은 설원에서 스키보드를 타듯 미끄럼을 타며 내려오기도 했는데 그편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우리가 진짜 여기 왔네!” “심지어 여기서 점심을 먹을 거라고. 믿어져?”

초현실적인 풍경에 자리를 잡고 점심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주변 지대에서 흘러 들어간 광물질로 호수는 에메랄드빛 초록, 사파이어 블루, 미세한 연두가 섞여 신비한 색이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빛의 호수와 설산에 둘러싸인 어마어마하게 넓은 센트럴 크레이터를 바라보며 우리는 거기가 통가리로의 하이라이트일거라고 믿었다. 언제까지나 머물고 싶었지만 갈 길이 길다. 아쉬움을 억지로 접어 넣고 일어나야했다.

에메랄드 호수를 뒤로하고 언덕을 돌아섰을 때, 그리하여 오투레레 계곡을 마주했을 때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말로 설명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인간의 언어로는 이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그 광대함을 말하지 못하겠다. 외계의 혹성 표면처럼 울긋불긋한 화산석과 식생의 계곡은 공상 영화 속에서 스타 게이트를 넘어 도착한 낯선 행성의 분화구처럼 아득했다. 이럴 때 언어는 초라하고 째째하게 느껴진다. 우리 입에서는 한참동안 신음소리 혹은 몸부림치는 고함소리만 재생된 것 같다. 진정하고 인간의 말을 되찾았건만 그조차 신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해. 너무 멋있다.” 정도였으니까. 말이 되지 않는데 말할 필요가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지만 무언가 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그 풍광에 ‘멋있다’는 말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고요하고 깊은 바닷속을 연상시키는 화산 지형을 지나 오투레레 산장에 도착했다. 꿈같은 오후의 산장에서 루아페후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따스한 햇살에 바람을 타고 물결치는 터석풀(Tussock grass), 눈부신 만년설을 덮고 서있는 산,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라도 되고 싶지만 더 가야하는 처지였다. 아쉬움은 등산화를 뚫고 뿌리내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내며 길을 나섰다. 당연히, 그때 우린 상상하지 못했다. 거기에서 와이호호누까지, 통가리로가 다시 한 번 우리를 완벽하게 다른 차원의 경지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것을.

잔설이 쌓인 완벽한 원뿔모양의 ‘운명의 산’ 나우루호에와 만년설에 뒤덮인 루아페후가 이끄는 길,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고 믿을 수 없는 고원의 들판을 걸었다. “여기는 화성 같지 않아?” “달 표면 같기도 해.” 달에도 화성에도 가보지 못한 우리는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너도밤나무 숲이 우거진 계곡을 통과하면 와이호호누 산장이 나타난다. 이른 아침부터 가파르고 긴 트랙을 지나온 하루 동안 완전히 에너지가 방전된 듯도 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차 터질 것 같았던 그런 날이기도 했다.

마지막 날은 화카파파 마을까지 돌아가는 날이다. 마지막 남은 14.3km의 시작은 비교적 완만한 비탈길이었다. 트랙 중간에 1904년에 세워진 와이호호누 옛 산장에 들러 볼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산장은 남자와 여자의 구역을 나눈 두 개의 작은 방으로 이뤄져있다. 1968년 은퇴하고 지금은 산악 역사박물관 역할을 맡고 있다. 타마 호수와 두 분화구로 가는 멋진 샛길을 지나고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고원을 지났다. 바람과 터석풀, 하늘을 달리는 구름 그리고 나, 떠나고 싶지 않았는지 누군가 배낭을 자꾸만 뒤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드디어 타라나키 폭포가 보이면 트랙의 끝이다. 마을까지 개울을 따라 걸으며 지난 며칠을 돌아봤다. 43km의 트랙을 걸었던 기억이 마치 43년 세월이라도 되는 듯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외계로 떠났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쉬우면서도 뿌듯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걸음을 뗄 떼마다 초록불이 들어오는 걸 보면 무엇인지 통가리로에서 신비한 에너지를 가득 수혈 받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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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팃 2019-04-22 14:47:00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