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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여행
일본 나가사키 여행
  • 글 사진 백종민
  • 승인 2019.03.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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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타고 있어요

* 이 원고는 실화에 바탕을 둔 여행 소설 입니다.

궤도 전차들을 수리, 보관하는 ‘우라카미 차고’의 풍경. 나가사키 시내를 운행하는 모든 형태의 전차를 볼 수 있다.

생에 집착하는 이의 도시
언니. 저는 지금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한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혼자 여기까지 오는데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길 잘 했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언덕을 따라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포근한 마음이 들게 해요.

처음 이틀 동안은 호텔방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어요. 방문을 똑똑 두드리면 일어나서 청소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침대로 돌아왔어요. 창문으로 긴 햇살이 들어오면 앉아서 오래도록 항구를 내려다보기도 했고요. 그 풍경이 익숙해지기 까지 꼬박 이틀이나 걸린 걸 보면 나란 사람은 참 어쩔 수 없구나 싶어요.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기 힘들겠죠.

이오 섬 안에 단 하나 뿐인 우동 가게의 주방 풍경.

‘그래, 여행을 해야겠어’라는 적극적인 마음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호텔방에 있는 동안 도시를 둘러볼 힘이 모아졌나 봐요. 가보고 싶은 곳들이 생겼거든요. 차이나타운이니 글로버 가든이니 스와신사니 가이드북에 나온 관광지 말고 마음을 끄는 곳은 ‘평화공원’이었어요. 여행 오기 전,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에 히로시마에서 일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어요. 죽음의 섬광을 기적처럼 피했고 죽기 살기로 고향 나가사키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요. 거기서 끝났어야 하는데 사흘 뒤, 고향 땅을 밟던 순간에 또다시 원자폭탄의 폭염을 마주한 그 사람의 기구한 사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믿을 수 없는 건 그는 두 번의 죽음을 피하고 천수를 다할 때까지 살았다고 해요. 참 이상하죠? 이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토록 생에 집착하는 주인공에게 끌린다는 사실이요. 어쩌면 제가 전쟁 같이 끔찍한 시련, 그러니까 진짜 죽음 앞에 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공처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지하철이 없는 나가사키에서 전차는 여행자에게 훌륭한 발이 되어 준다.

하루의 시작과 끝, 전차
언니가 했던 말처럼 나가사키는 따뜻한 곳이에요. 한편으로는 이 계절에도 이리 온화한데 여름에는 얼마나 더울까 궁금해졌어요.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방을 구해보면 어떨까?’ 하고 나답지 않은 생각도 잠깐 했어요. 언덕이라도 큰길에는 전차가 다니니까 거기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집이요. 언니도 나가사키 시내를 달리는 전차를 봤죠? 박물관 마당에서 마주할 것 같은 녹슨 전차도, 당장이라도 나를 미래로 데려다 줄 것 같은 최신형 전차도, 같은 궤도를 달리는 모습이 생경했어요. 그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하루는 가만히 앉아 전차만 바라 본 날도 있어요. 그 순간들은 평온했지만 해가 지고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려니 또 나만 모든 감각이 정지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걸까요? 내 마음 어딘가에서 그걸 용인해 주질 않아요.

17세기,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을 만들고 이 지역을 통해서만 서양과 교류를 허가했다.

전차에 올라타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전차는 시 외곽에 있는 ‘우라카미 차고’로 들어가기 전까지 멈추지 않고 움직였어요. 그 사이 몇 번 전차장이 바뀌는 모습도 봤고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에서 내렸어요. 며칠 동안 아침 출근길 직장인들과 함께 전차에 올라서 땅거미가 질 때까지 전차와 함께 했어요. 그 풍경 안에서 나만 방황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아니 전차에서 떠나지 못하는 유령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어요. 자신이 죽은 걸 인정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유령 말이에요.

그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어요. 어쩌면 전차장들의 운행일지에 ‘유령이 타고 있다’라고 적혀 있을 지도 몰라요. 나가사키 전차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500엔짜리 ‘전차일일승차권(電車一日乘車卷)’를 보여주고 내리는 것으로 보아 여행자임을 눈치 챘겠지만 생기라고는 없는 내 모습이 그들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언니, 이전에 나는 이렇지 않았어요.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온화한 기후 덕에 볕이 좋은 날이면 공원에서 책을 읽는 시민을 만날 수 있다.

여행자의 흔적
하루는 나가사키 근교에 이오라는 섬에 갔어요. 온천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싶어졌거든요. 언니. 그거 알아요? 일본은 몸에 타투가 있으면 온천에 들어갈 수 없데요. 가는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던 건 제 몸에 그려진 작은 새 때문이었어요. 언니가 도와줘서 겨우 의지할 마음을 몸에 새겼는데 그 작은 새를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쩌나 두려웠어요. 평소의 나라면 겁나서 온천욕은 꿈도 못 꿨을 거예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표를 샀고 다행히 나의 작은 새는 안전했어요.

외국과 문물 교류가 많았던 나가사키에는 일찌감치 중국 화교들이 자리를 잡고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이 거리 안에 나가사키 짬뽕의 원조가 있다.

온천에서 나온 뒤 자전거를 하나 빌렸어요. 500엔을 주니 두 시간 동안 탈 수 있었어요. 섬 안에 하나 있는 우동집에 들려 늦은 점심을 먹고 해변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니 용케 시간에 맞춰 반납할 수 있더라고요. 바람은 차갑고 햇살은 따사로운 해변 도로 위에서 앞뒤 따르는 사람도, 자동차도 없이 혼자 페달을 밟고 있으니 여기가 신이 내게 허락한 천국인가 싶었어요.

물에 비친 모습이 안경을 닮았다 하여 ‘안경다리’라고 불린다.

아, 시내에 ‘안경다리’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어요. 나가사키에서 처음 돌로 세워진 아치형 다리인데 물에 비친 모습이 안경과 닮아서 그렇게 부른대요. 나가사키로 수학여행을 온 일본 여학생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요. 언니, 왜 일본 학생들의 교복은 모두 검은색일까요? 저는 사람들 앞에서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 싫어 원색의 밝은 옷만 입고 다녀요. 늘 웃고 약간은 과장된 리액션을 보이다 보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밝은 옷과 그 거짓된 행동들 안에 있으면 내 마음을 들키지 않거든요. 저 학생들에게는 그런 조바심이 없을 테죠? 그래서 검은 교복을 입고도 저렇게 싱그러울 수 있는 거겠죠?

일본 신사에 방문하면 입구에 마련된 테즈미야(手水舎)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

학생들이 떠나간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 다리 아래 작은 천에 눈길이 닿았어요. 가만 보니 다리마다 사연이 쓰여 있네요. 대부분 오래 전 대홍수로 무너져 내리고 다시 세웠더라고요.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싶은 사연을 하나하나 읽으며 오르다 보니 ‘고려교’라는 다리가 나왔어요.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고려인이라고도 불렀다는데 그들의 집성촌이 이 근처에 있었나 봐요. 잊힌 사람들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 있어요. 누군가 나의 나가사키 여행도 기억해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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