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떠나 만난 파라다이스
일상을 떠나 만난 파라다이스
  • 글 사진제공 박재희
  • 승인 2019.02.15 13:3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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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케플러 트랙

태고적 청량함을 간직한 원시의 숲길을 잊을 수 없었다. 만년설을 이마까지 내려쓴 고산준령에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과 호수를 품고 있는 곳.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에 눌려 다시 좀비가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믿을 수 없이 맑고 푸른 이끼향이 덮인 숲과 숨 막힐 듯 촘촘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던 은하수, 별이 쏟아지던 뉴질랜드의 피오르드 랜드를 떠올렸다. 찌들어버린 삶을 리셋하자고 의기투합해서 남반구를 트래킹했던 친구들과 함께 다시 배낭을 꾸렸다.

뉴질랜드에는 3000미터급 높은 산이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반가를 많이 배출했고 등산애호가도 많지만, 정상을 향한 등산뿐만 아니라 산 주변을 산책하듯 자연을 향유하며 걷는 트램핑Tramping으로 유명하다. 케플러Kepler 트랙은 그레이트 워크Great Walk 가운데 밀포드Milford, 루트번Routeburn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3대 트램핑 코스이다. 밀포드가 피오르드의 대표 경관을 보여주는 숲길이 특징이라면 루트번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대표하고 케플러는 밀포드와 루트번의 특징이 결합한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뉴질랜드의 장거리 하이킹 트랙은 대부분 원주민이 금보다 귀하게 여겼던 녹옥, 그린스톤Green stone을 채취하던 루트 혹은 초기 개척자들의 탐사길을 따라 걷는 형태지만 케플러는 온전히 트래킹만을 위해 1988년에 조성된 코스이다. 터석Tussock으로 덮인 고원지대와 거대한 산줄기, 빙하가 깎아 낸 계곡과 호수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넋을 잃게 한다. 우리는 출발하기 전부터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테아나우 타운 DOC(자연보호국) 방문자 센터에서 레인보우리치Rainbow Reach까지 도는 60km의 순환 루트가 일반적인데 우리는 거꾸로 걷기로 했다. 아이리스 번Iris Burn 산장에서 럭스모어Luxmore 산을 지나는 길까지 펼쳐질 하이라이트를 아껴두고 싶었다. 우리의 하이킹 아니 손터링Sauntering이 시작되었다. 한가롭게 산책하듯 걷는다는 뜻으로 중세시대 성스러운(Sainte) 땅(terre)을 향해 걷던 순례에서 유래한 말이다. 현대 트램핑의 시조격인 19세기 미국의 자연주의자 존 뮤어는 산으로 들어가 걷는 것을 손터링으로 규정했다. 단순히 온 힘을 다해 걷고 오르는 육체적 행위만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결합되는 순례와 같은 것이라고. 우리도 이번 걷기 여행을 트래킹이나 하이킹이 아니라 손터링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의 거룩함을 존중하고 땅의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 걷기로 다짐한 셈이다.

레인보우리치에서 출렁다리를 지나면 파르스름한 향기가 밀려오는 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기습적으로 청량한 입자가 몽글몽글 피부에 와서 닿는다. 와이라우Wairau 강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형 지형을 걷는 동안 피오르드 랜드 숲길의 전령인 이끼와 너도밤나무(Beech)를 만나게 된다. 깊은 숲길의 나무 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조각 햇살이 빼곡하게 자라는 이끼식물을 비추었고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폭신한 고사리 숲을 지났다. 첫 날은 6km 가량의 평탄한 여정이다. 오늘은 나뭇잎이 덮어 푹신하게 느껴지는 친절한 트랙을 따라 걸으며 모두 배낭의 무게에 적응하는 날이다. 모투라우Moturau 산장으로 가는 길에서 방문자에게 처음 나타난 뷰포인트는 케플러 습지이다. 아름다운 나무데크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앞으로 펼쳐질 겹겹의 산봉우리와 빙하가 녹아내린 호수가 우리를 맞았다.

모투라우 산장은 마나포우리Manapouri 산중 호숫가에 있다. 우리는 짐을 풀고 호수로 나가 바위가 만들어진 자연 수영장을 발견했다. 알몸 수영을 시작으로 앞으로 나흘간 전기도 와이파이도 샤워도 할 수 없는 야생의 생활에 신고식을 치렀다. 10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남반구의 여름밤이 시작되는 일몰을 실감하며 우리는 샌드플라이(흡혈파리)를 피해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갈색 키위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잠시 깨었다. 하늘에는 오리온 별자리가 시리도록 파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나포우리 호수를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야생 트램핑의 가장 중대한 과업은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준비해 온 누룽지와 오트밀로 식사를 마치고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완만하다고는 해도 두 번의 오르막을 넘어 16.2km 산길을 가야하는 날이다. 두툼한 피타브레드에 초콜릿과 꿀 치즈와 살라미에 잼까지 우리가 태워야할 연료를 채워 넣었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저지대 숲길은 온전히 고사리 세계였다. 어른 어깨 높이까지 자라는 고사리와 커튼처럼 이끼를 매달고 있는 너도밤나무가 빼곡한 오르막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숲을 울리는 새소리에 턱에 차오르는 숨소리가 섞이는 것을 들으며 꾸준히 올랐다. 햇살마저 어깨를 좁혀야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깊은 숲에서 나뭇등걸에 앉아 쉬면서 땀을 닦으니 덕지덕지 붙어있던 일상의 번뇌가 함께 떨어졌다.

아이리스번 산장까지 6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우리가 6시간을 허덕이며 올라왔을 때 빅슬립Big Slip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산맥의 절개지를 만났다. 1984년 폭우로 산사태가 만들어낸 빌슬립 주변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까마득한 산봉우리가 이어진다. 발목까지 자라는 민들레 꽃밭에 앉아 우리는 뒤쳐진 원정대 막내를 기다렸다.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었고 누구와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12월의 남반구 여름날, 만년설을 눈썹까지 덮은 어마어마한 산을 마주보며 다시 숲으로 들어서 두 시간 여를 소풍처럼 걸어 아이리스번 산장에 도착했다.

잭슨피크Jackson Peas와 케플러 산 가운데 깊은 계곡이 시작되는 위치에 있는 산장 앞 너른 벌판은 금빛 햇살이 물결치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서 고원지대의 터석Tussock이 빛을 가득 품고 일렁이며 바람을 타고 춤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찔끔. 완전하게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슬리퍼가 사라졌다. 뉴질랜드 남섬의 높은 삼림지대에 사는 앵무새의 일종인 키아Kea 짓이었다. 키아는 호기심이 많고 머리가 좋은 새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진을 찍으려 다가오는 사람을 조금씩 움직이며 유인해 낸 후에 배낭을 열어 먹을 것을 가져가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등산화나 등산스틱을 물어가기도 한다. 터석에 넋을 잃은 동안 톡톡히 신고식을 치렀다. 나를 비롯해 신발이나 옷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웃음 반 절박함 반으로 산장주변을 살폈다. 키아에게 신발이 별 쓸모가 없어보였는지 터석 사이에 버려둔 슬리퍼를 찾았다.

드디어 케플러 트랙의 하이라이트의 날이라는데 난 아이리스번 산장을 떠나기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터석이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가장 멋진 풍광이 펼쳐지는 날이지만 해발고도 1000미터 차가 나는 봉우리를 두개씩이나 넘어 14.6km를 걸어야 하는 날이라 아침 채비를 단단히 했다. 산장을 출발하면 고사리가 나무처럼 자라는 숲이다. 고사리와 너도밤나무 이끼풀까지 울창한 숲 위로 가끔씩 빼꼼하게 하늘까지 솟아있는 산이 보였다.

힘에 부친 세 시간의 오르막 후 믿을 수 없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마음을 빼앗은 터석이 굽이굽이 이어진 산등성이로 이어져 펼쳐졌고 빙하호수는 까마득하게 발밑에 있었다. 빅슬립에서 아득해 올려다보기도 힘들던 산봉우리에 눈을 맞추며 우리는 “좋다, 너무 멋있다”를 반복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말은 딱 두 가지였다. “좋다. 너무 좋다.” 그리고 “멋있다. 너무 멋있다.”

럭스모어Luxmore 산장에서 시작하면 내려오는 길일 텐데 우리는 하늘을 향한 계단처럼 아찔한 절벽위로 솟은 뾰족한 산등을 타고 올라갔다. 행잉밸리 대피소(Hanging Valley Shelter)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우리는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테아나우 호수를 따라 내달리는 산줄기, 자연이 연출하는 위대한 장면 앞에서 우리는 그나마 두 가지 말조차 잃고 터져 나오는 탄성을 지를 뿐이었다. 그 날은 마주치는 모든 곳이 최고의 경관이었고 계속 다시 더 멋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케플러에는 10일중 9일이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우리가 걷는 나흘간 내내 일기가 믿을 수 없이 좋았다. 아찔한 포리스트번Forest Burn 고개로 최고를 갱신했는데 테아나우 호수 건너편 거대한 멀치슨Murchison 산맥의 웅장한 자태는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다. 오후를 가득 채워 받은 경이의 풍경이 1472m의 럭스모어산 정상의 등성이를 지날 때까지 이어진다. 쏟아지는 따스한 저녁 햇살을 흡수하며 럭스모어 산장에 도착했다.

마지막은 언제나 아쉽다. 클라이막스를 경험한 다음날이기도 하고 배낭과 피로마저 친숙해졌지만 케플러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럭스모어 산장을 뒤로하고 타키티무 산맥과 스노든 산, 얼 산을 아우르는 전망을 걸어 나오는 발걸음은 아쉬우면서도 벅차다. 수목한계선을 넘으면 석회암 벼랑으로 내리막을 지나게 된다. 현지 주민들이 가볍게 산책을 하고 물놀이를 하는 브로드베이Brod Bay를 통과해서 너도밤나무의 일종인 레드비치 군락을 통과하는 총14km의 하산길을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에 집중한 나흘간의 60km 케플러 손터링을 마쳤다.

박재희

27년 간 치열하게 회사를 다니며 성공한 여성 기업인이 됐다. 그러나 ‘이게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일까?’라는 의문에 직면한 후 ‘여행가’라는 제2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세계의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즐거운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를 출간하며 여행가로서의 삶에 완전히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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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포 2019-03-12 21:25:45
뉴질랜드 가고싶네요. 손터링! 인상적입니다~

토트라 2019-02-21 09:58:52
으앙 너무 멋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