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자기한 보물 천국, 순천 선암사
아기자기한 보물 천국, 순천 선암사
  • 박신영 기자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18.11.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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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 소개와 선암사 투어 가이드

지난 7월 1일 한국의 일곱 개 사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 해남 대흥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가 주인공이다. 본지는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일곱 개 사찰을 매달 한 곳씩 둘러본다. 이번호는 순천 선암사다. <편집자주>

불자의 길
진한 나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순천 조계산에 자리한 선암사로 향하는 길에는 고목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 그들은 반쯤 단풍이 든 채로 방문객을 반기는 중이다. 곳곳에서 자연이 만든 예술 작품을 만나기도 했다. 벼락을 맞아 속살이 다 보이거나, 조각조각 갈라져 아스팔트 도로에 너저분하게 놓인 나무들이다. 안타까운 생각도 잠시, 멋진 모습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무 숲길 사이로는 계곡이 흐른다.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맑은 물은 목마름을 해소하고 잠시 쉬어갈 장소를 내어 주기도 한다. 머리 위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지저귀고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가 머리를 맑게 한다. 1.5km의 완만한 산길을 오르자 선암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5년(542)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해 약 1500년간 원형이 변형되지 않은 사찰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7개 사찰 중 유일하게 태고종을 따르고, 경내 곳곳에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숨어 있어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유홍준 작가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 순례>에서 “선암사는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내가 답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도록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다녀온 남도답사 필수처다.…(중략)…따지고 보면 미술사적으로 뛰어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고, 가면 마음이 마냥 편해지는 절집이다”라고 언급했다. 다녀와서 보니 과장 없는 설명이었다. 선암사는 있는 그대로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매력을 지녔다.

태고종
선암사는 조계종과 함께 한국 불교의 양대 종단으로 꼽히는 태고종의 본산이다. 태고종은 고려 말 한국 불교를 통일한 보우국사의 사상을 따른다. 기본적으로 다른 종단과 비슷한 규칙을 지니지만, 사찰의 개인 소유, 승려의 결혼 허용, 출가를 하지 않아도 사찰 운영이 가능한 제도를 둔다.
태고종은 비교적 최근에 결성됐는데, 태고종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대처승을 빼놓을 수 없다. 대처승은 아내와 가정을 둔 승려로 일본식 불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의 일본화를 위한 수단으로 도입됐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내려 전국 주요 사찰 주지에 대처승을 임명하는 등 대처승이 급증했고, 해방 전까지 대처승이 한국 불교계를 주름잡았다.
광복 후,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는 일본 잔재를 뿌리 뽑는 과정에서 대처승을 제거하고 비구승(결혼 하지 않은 승려)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50~60년대 대처승과 비구승간 분규가 끊이질 않았다.
1962년 불교재건위원회에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통합을 시도했으나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1970년 법원의 판결에 의해 대처승이 패소하면서 강제로 종단에서 밀려났고, 그 해 대처승들은 선암사에서 태고종을 출범했다.

선암사 투어 가이드
일주문에 앞서, 보물 제400호인 무지개다리 승선교가 시선을 압도했다. 돌을 깎아 만든 인공 다리로 착각해 지나칠 뻔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각자 다른 모양의 돌이지만 신기하게도 빈틈없이 제자리를 찾아 정교한 짜임새를 갖췄다.

하이라이트는 승선교 아래에서 바라보는 2층 누각 강선루다. 승선교와 시냇물이 만든 반원형 공간에 강선루가 들어앉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때때로 잔잔한 시냇물에 비치는 승선교와 강선루는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선사한다. 이곳은 선암사 안내책과 팸플릿에 등장하는 장소로 유명한데 에디터가 방문한 평일에도 수많은 사람이 사진 찍고 있었다. 고즈넉한 장면을 찍기 위해서 평일 오전에 방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주문을 지나 왼쪽으로 향하니 ‘ᄭㅏㄴ 뒤’라는 요상한 현판을 단 건물이 보인다. T자형 목조 건물에 고풍스러운 지붕을 얹어 기념품 숍이나 중요한 건물로 추정했는데 들어가 보니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ᄭㅏㄴ 뒤’는 뒷간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 낯선 단어만큼 국내 사찰 화장실 중 가장 오래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됐다.

재래식에 낯선 세대는 선암사 뒷간을 이용하는 게 어려울 수 있겠다. 양쪽으로 남녀 화장실이 분리됐는데, 칸마다 달린 문이 어른 무릎 높이만 해 매우 낮다. 또한 깊이 뚫린 바닥과 적나라하게 보이는 오물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라 생각하면 그 또한 흥미롭다. 다행히도 뒷간과 지면 사이를 높이 띄웠고, 통풍이 잘되도록 창살을 두어 악취가 적다. 뒷간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퇴비로 쓰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가장 자연 친화적인 화장실이라고 알려졌다.

불가의 마을
뒷간 앞쪽에는 매화나무가 돌담을 따라 늘어져 있다. 봄마다 만발하는 붉은 매화 역시 선암사의 볼거리다. 겨울이라고 아쉬워할 것 없다. 365일 푸른 차밭이 방문객을 반긴다. 조계산 일대는 최상의 야생차 생육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약 1만 평에 이르는 선암사 뒤편 야생 차밭에서 스님이 직접 찻잎을 재배한다. 수확한 찻잎은 스님들 손에 의해 9번 볶아 전통차로 탄생한다. 차 특유의 떫은맛이 덜하고 고소해, 물처럼 마시기 좋다.

산사 둘러보는 재미에 푹 빠져 부처님께 인사드리는 것을 깜박했다. 얼른 대웅전 앞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좌우로 서 있는 삼층석탑 두 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두 탑은 쌍둥이처럼 모양이 똑같다. 소박하고 우아함이 느껴지는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양식을 고스란히 계승해 보물 제395호로 지정됐다.

이전에 가봤던 마곡사, 법주사, 부석사, 봉정사와 다른 풍경이 이어졌다. 홍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대웅전으로 입장한 것. 조계종을 따르는 사찰 스님이 밤색 가사를 입지만 태고종을 따르는 선암사 스님은 홍색 가사를 입는다. 그뿐만 아니다. 곳곳에서 법복을 입은 신도들이 마당을 쓸거나 차밭을 관리하는 등 활기찬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들은 깊은 조계산에 불가 마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다.

돌담 앞에 놓인 의자에 가만히 앉아 숨을 골랐다. 이곳엔 화려한 국보는 없지만 여행 좀 다닌다는 사람마다 최고로 꼽는 자연 환경이 있다. 거기에 아기자기한 보물, 수려한 조계산 능선, 차분한 예불 소리, 향긋한 찻잎 냄새가 오감을 깨웠다. 코끝에 찬바람이 도는 가을의 끝자락, 선암사의 겨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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