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영향력으로 소통하는 강병무 작가
선한 영향력으로 소통하는 강병무 작가
  • 이지혜 기자 | 사진제공 강병무
  • 승인 2018.10.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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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으로 소통하고 싶어요
크리에이터 강병무

여행가인줄 알았지만 얘길 나눠보니 봉사활동가였고, 사진가라고 생각했는데 강사이기도 했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그를 크리에이터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게 인생, 예측 불가능한 그의 인생 얘기로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반갑습니다. 여행가들 사이에서 유명하시던데.
안녕하세요. 강병무입니다. 여행하며 사진 찍고 영상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여행대학’의 창립 멤버로서, 젊은 청춘들의 고민 상담을 주로 하거나 그와 관련된 강의를 나가기도 합니다. 유명하다기보단, 재능기부 형식으로 수백 명 가까이 만나 얘길 나누다 보니, 기억해주는 분이 많은가 봅니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여행을 떠났다고 들었어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요.
20대 중후반, 아프리카 여행을 위한 선택이었어요. 전자계열을 전공해 전자과 학생이라면 꿈의 직장이라는 곳에 입사할 수 있었어요. 가정환경이 부유하진 않아 학교생활을 하며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정규직이 된 케이스였어요. 운이 좋았죠. 4년간 그곳에 다니다가 돌연 퇴사했어요. 어느 순간 시계 안에 갇혀있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았고, 회사에 다니며 사는 것이 저에게 좋은 영향이 아니란 생각도 들더군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행복은 무엇인가를 여행을 통해 얻길 원했고, 무작정 아프리카로 떠났죠.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셨죠?
여행 경비를 줄여서 모은 돈이나 떠나기 전 기부 받은 돈으로 현지에서 모기장을 구입해 기증하는 ‘모기장 후원 프로젝트’를 했어요. 남아공, 보츠와나,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를 다니며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봉사와 나눔을 통해 나를 찾고 싶었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은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말라리아에 노출되어 사는데도 가는 곳마다 해맑게 웃고 있었어요. 더 안전한 한국의 아이들보다 순수하게 느껴졌죠. 자연스레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도 하게 됐어요.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유럽의 자연 속에서 힐링 하는 여행을 2년간 계획했어요.

하지만 4개월 만에 돌아오게 됐죠?
네. 사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어요. 좋은 직장을 그만둔 아들이 위험해 보이는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못 했어요. 호주로 유학 간다고 했죠. 하지만 제가 떠난 이틀 뒤, 신문에 제 이야기가 실렸어요. 당시 여행 메이트가 두 명 더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인터뷰를 했거든요. 부모님이 난리가 났어요. 4개월 만에 어머니가 아프시단 연락을 받았어요. 한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없었죠. 집으로 가보니 어머니가 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계셨어요. 아들이 힘든 곳으로 떠난 것에 대한 충격을 받고 마음의 병이 든 거였죠. 물론 제가 돌아와서 다 나으셨고요.

내적 갈등이 있었을 것 같아요.
많았죠. 부모님이 원하는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렇게 했어요. 다시 떠나는 일도 두려웠고요. 전혀 다른 금융업 회사에서 사회생활은 4년간 했어요. 하지만 결국 떠나는 것을 선택했어요. 보통 첫 장기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두 번째 여행은 더 쉽게 떠났다고 하는데, 전 반대였어요. 첫 번째 여행이 계획된 대로 끝나지 않고 중간에 멈춰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 컸어요. 떠나기가 너무 힘들었죠. 오롯이 혼자 있고 싶었어요.

독일로 떠나셨죠?
독일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9개월간 체류했어요. 첫 번째 여행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며 떠났다면, 두 번째 여행은 완전히 비우기 위한 여행이었어요. 원하던 여행을 못 했고, 직장생활을 하며 억눌려 있거나 제 안에 쌓여있던 부정적인 기운이 너무 커서 그것을 비우는 데만 집중했어요. 돌아가서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어요. 운동하거나 산책하고 책을 읽는 등 원하는 것만 하기로 했어요. 이 순간에 집중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죠. 일해서 번 돈으로 스쿠터 한 대를 샀고, 남은 시간은 유럽을 여행했어요.

그래서 많이 비우셨나요?
그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순간이었어요. 매우 좋은 영향을 받고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해요. 이후 여행대학에서 청춘들을 만나 고민 상담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그릇이 생겼다고 할까요. 듣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더라고요. 독일에서의 시간이 없었다면, 전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고민을 상담해주는 그릇을 못 가졌을 거예요. 그때의 시간이 저에겐 꼭 필요했던 것이죠.

최근 본격적인 여행가로 변신하셨죠?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오더군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퇴사와 여행을 반복하는 인생을 살지, 여행가로서의 인생을 살지 말이죠. 그래서 결정했어요. 서른다섯이란 어쩌면 늦은 걸지도 모르는 나이에 결정했어요. 다행히 현재까진 후회 없이 살아요. (웃음)

사진을 빼놓을 수 없어요.
사진을 배운 적 없어요. 첫 여행에서 사진을 독학했고, 여행이 끝나면 카메라를 팔았어요. 회사 생활을 하다 여행을 떠나야 하면 또다시 카메라를 샀죠. 조금 웃기게 사진을 시작했죠? 아직 사진으로 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행이 제 사진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늘어나서 행복해요. 요즘은 ‘버닝’이란 팀을 만들어 영상도 업데이트해요. 액티비티한 영상 위주로 업데이트 하는데, 어릴 적부터 수영을 해온 게 도움이 되더군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볼 수 있어요.

봉사 모임을 10년간 운영하고 있다고요?
20대 중반, 회사 생활을 하며 봉사카페를 만든 게 어느덧 10년이 지났네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베풀며 사시는 모습을 본 게 봉사활동 단체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노약자, 아동, 유기견, 미혼모 등 다양한 단체에 봉사활동 해왔어요.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세월호 사건 때 팽목항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쌍용차 사태에도 현장으로 달려갔죠. 백남기 농민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함께 시위했고 4대강 반대 운동을 하는 등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어요. 이런 것들이 저에겐 봉사와 다르지 않아요.

소통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 같아요.
사실 어릴 적 소통 장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애정 결핍에서 시작된 착한아이 콤플렉스도 겪었고요. 여행을 멈추고 퇴사를 하고 다시 여행을 떠나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를 비우고 나를 찾았어요. 지금은 단단한 사람이 됐어요. 관계와 진로, 삶에 대한 고민에 공감하며 살고 싶어요. 나라는 사람을 분명히 알고, 내 이야길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찾고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을 위해 지금 이런 일들을 계속 해나가는 거고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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