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숨은 보석 탐방기
영주 부석사 숨은 보석 탐방기
  • 박신영 기자 | 양계탁 사진기자
  • 승인 2018.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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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袈裟)를 비추는 소백의 일출

지난 7월 1일 한국의 일곱 개 사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 해남 대흥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가 주인공이다. 본지는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일곱 개 사찰을 매달 한 곳씩 둘러본다. 이번호는 영주 부석사다. <편집자주>

새벽을 알리는 목탁 소리 따라 무량수전으로 나섰다. 새벽안개가 자욱이 깔린 소백산맥 품 속 부석사에는 신비로운 불심 감돌았다. 676년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들어 창건한 부석사. 1300여 년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곳에는 국보 다섯 점이 보관돼 있다.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이자 국보 제18호 무량수전, 부처의 진리를 널리 퍼뜨리는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 무량수전 주존인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 의상대사의 초상화가 안치된 국보 제19호 조사당, 부석사의 수호신이 그려진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다.

무량수전의 아름다움
부석사를 소개할 때는 무량수전을 빼놓을 수 없다. 무량수전은 고려 우왕 때 중수해 고려시대의 건축미가 물씬 느껴진다. 먼저 주심포 양식이 눈에 띈다. 지붕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기둥 위에 한 개의 공포를 넣은 양식이다. 공포란 처마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에 짜 맞춘 나무쪽이다. 건축의 규모가 작은 고려 건축은 유독 주심포 양식이 돋보인다. 반면 건축 규모가 큰 조선시대에는 두 개 이상의 공포를 넣은 다포 양식이 유행했다.

배흘림기둥도 무량수전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이다. 배흘림기둥은 위 아래로 갈수록 직경이 좁아지는 구조다.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머리, 배, 다리의 인체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고, 사람의 배처럼 흘러내리는 모양이라 배흘림기둥이라 불린다고 전했다. 배흘림기둥도 주심포 양식처럼 규모가 작은 건축물에 많이 사용됐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건축 중 배흘림기둥이 나타는 건축은 총 여섯 점인데, 그 중 두 점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이다.

무량수전 내부에는 끊임없는 생명력과 지혜를 주는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이 있고, 외부에는 국보 제17호 석등이 네 개의 창을 통해 부처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
뜬 돌이 있는 사찰로 유명한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는 6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문무왕이 화엄학으로 민심을 보듬고자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를 당나라로 유학 보냈다. 이들은 유학길 중 큰비를 만나 동굴에 머물게 되는데, 원효대사는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냄)를 깨달아 신라로 돌아간다.

한편 의상대사는 당나라 지장산의 있는 지엄선사를 만나러 가던 중 선묘낭자 집에 머문다. 의상대사는 선묘낭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문무왕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선묘낭자를 떠난다. 남은 선묘낭자는 의상을 그리워하며 불교에 귀의한다.

7년 뒤, 의상대사는 당나라의 신라 침공 이야기를 듣고 급히 귀국길에 오른다. 허름한 법복에 조각배로 서해를 건너는 의상대사. 선묘낭자는 의상대사를 위해 법복을 지어 바다로 띄워 보낸 후 바다에 몸을 바친다.

선묘낭자의 희생으로 의상대사는 무사히 신라에 도착해 당나라의 침략을 막는다. 문무왕은 의상대사의 공을 치하, 소백산맥에 부석사를 지어준다. 천 명의 신도가 모인 어느 날, 무량수전 좌측의 큰 돌이 하늘로 떠오른다. 선묘낭자가 용이 돼 대반석을 떠올린 것. 죽어서도 의상 대사를 생각하는 선묘낭자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설화를 들은 노산 이은상 시인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시 <선묘정>을 지어 받쳤다.

부석사의 숨은 볼거리

공포불
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는 종무소, 오른쪽에는 문화해설사의 집이 있다. 문화해설사의 집을 등지고 소백산맥을 바라보면 무량수전에 안긴 안양루가 보인다. 안양루의 공포와 기둥 사이로 해가 비추면 주황색 가사를 입은 부처가 나타나는데, 이를 공포불이라 한다. 안양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졌는데, 당시 이 현상을 의도하고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신비의 부처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사진제공 문화재청

조사당 벽화
조사당이란 의상대사의 초상화를 모시는 곳으로 고려 우왕이 세웠다. 주심포 양식이 들어가 소박하고 간결한 미가 돋보인다. 본래 조사당 내부 흙벽에는 불교의 수호신 사천왕, 제석천, 범천을 그린 화폭 여섯 점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해체 분리돼 훼손됐으며 지금은 부석사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조사당 벽화는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남은 채색 벽화 중 가장 오래됐고, 회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선비화
조사당 선비화에는 설화가 전해진다. 선비화란 조사당 추녀 아래 있는 골담초 한 그루다. 의상대사가 불교 공부를 위해 천축국(인도)으로 떠나면서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조사당 추녀 아래 꽂는다.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나면 내가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며 떠났는데, 지금까지 지팡이에서 잎과 꽃이 자란다. 항간에 잎을 달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어 사람들이 마구 따, 현재는 철책으로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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