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진 선장의 적도 표류기
김승진 선장의 적도 표류기
  • 글 사진 김승진
  • 승인 2018.07.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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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노아호와 남태평양

“흰 돛과 바람만 있으면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를 현실이라 확신하는 이상주의자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 태평양 한복판에 떠있다.

수와로우를 향해
파아란 바다에 하얀 요트 타노아호가 따가운 아침햇살을 등지고 느리게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누쿠히바 섬을 출항한지 12일째. 침로 260도 남위 13도 서경 161도 적도 바로 아래 남태평양 한복판이다. 간혹 폭우를 동반한 돌풍의 기습을 받기는 하지만 비교적 온화한 무역풍을 뒤로 받으며 부드럽게 항해 중이다.

부스스한 얼굴로 선실에서 나온 주현식 씨가 한 손으로 잡기 버거울 만큼 커다란 자몽의 껍질을 벗긴다. 전 기항지인 누쿠히바 섬에서 친절한 주민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단맛이 강한 자몽의 알갱이를 입안 가득 물고 섞여 있는 씨를 바다를 향해 힘차게 뱉는다.

“내일 아침에는 수와로우에 도착할 것 같아.”

“와 다 왔네요?”

아직 하루가 남았는데도 우리는 벌써 도착의 설렘에 기분이 부풀기 시작한다. 나는 두 번째 방문인 데도 설렌다. 함께 항해하고 있는 팀원들은 12일 만에 처음 보는 육지에 오를 기대감에 벅차 있는 듯하다.

“선장님, 수와로우우엔 사람이 사나요?”

“무인도야. 근데 일 년에 6개월간 라로통아에서 파견된 관리인 두 명이 상주하지.”

“연료는 살 수 있나요?”

“아니.”

“물은요?”

“없어…. 정 급하면 빗물 받아.”

“상점은요?… 없겠죠….”

팀원들은 이 정도 대화에 별 충격이 없다. 이미 34일 이상 섬이 없는 태평양을 횡단한 경험이 있는 터라 물탱크의 민물을 아껴 쓰고 바닷물로 샤워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무인도를 만나다
“섬이 보인다!”

다음 날 아침 수평선 위로 열흘 이상 보지 못했던 녹색띠가 떠오른다. 항해가들의 오아시스 야자섬이다. 선실에 있던 모두가 콕핏으로 달려 나와 긴 항해의 끝을 즐긴다. 돛을 모두 접고 산호 바위에 꺾여 부서지는 큰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섬에 다가선다. 수심이 낮은 산호 리프를 조심스럽게 피해가며 섬 뒤편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멀리 4년 전 방문 했을 때 보았던 젯티(소형보트접안부두)가 보인다. 그런데 관리인이 사용하는 작은 알루미늄 보트는 보이지 않는다. 순간 머릿속에 섬광 같은 희열이 스치고 지나간다.

‘혹시… 이 섬에 우리뿐?’

아무도 없는 무인도라니….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섬을 만끽할 수 있다. 점점 다가오는 섬, 우리들 만의 공화국일 수 있다는 직감에 아이처럼 신난다. 오늘부터 5일간 이곳은 대한민국 영토다.

“야호~!”

앵커리지 아일랜드

이곳 스와로우Suwarrow 아일랜드는 적도 바로 아래 남태평양의 쿡아일랜드의 섬 중에 하나로 사각형 모양의 환 초위에 스무 개가 넘는 섬이 있다. 한국에서 동남쪽으로 약 1만km 정도 떨어진 태평양 중심부에 있다. 기본적으로 무인도이며 일 년에 태풍 시즌이 아닌 6월에서 11월까지 주도인 라로통아에서 파견된 관리인 두 명이 이곳을 찾는 요트를 관리한다. 공항도 없고 정기 선편도 없다. 요트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그래서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고무보트로 관리인의 숙소와 요트클럽이 있는 앵커리지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바다와 다르게 육지에 오르자 더운 공기가 느껴진다. 요트클럽이라고 해야 스무 평 정도의 작고 소박한 개방형 목조건물이다. 한쪽 벽면만 막아 부엌이 자리해있고 나머지는 벽이 없는 시원한 구조다. 4년 전 이 섬을 방문했을 때 다른 나라 세일러들처럼 태극기에 서명해 벽에 걸어 두었다. 그 흔적에 기대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지만, 벽면과 기둥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이해는 되지만 조금 서운하다.

흔한 메뉴, 코코넛크랩
“오늘 저녁 메뉴는 코코넛크랩으로 합시다.”

“그런데 코코넛크랩 어디 있습니까?”

허태완 팀장이 부산억양의 서울말로 묻는다.

“숲속 어두운 나무 밑을 잘 살펴보면 보여.”

코코넛크랩은 주로 야행성이다. 하지만 낮에도 그늘져 어두운 숲속 야자수 밑에서 먹이활동을 하기도 한다. 가까이 사람이 지나치면 인기척에 놀라 움직이기 때문에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글도를 한 손에 들고 숲을 헤치며 야자수로 빼곡한 숲으로 들어갔다. 온몸에 감기는 거미줄과 땀이 뒤엉키고 그 틈을 모기가 공격하기 시작한다. 6개월 만에 모기들의 만찬이 펼쳐진다. 굶주린 그들에게 나의피를 듬뿍 제공하며 웅크리고 앉아 어두운 야자수 밑동을 응시한다. 그때 바스락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커다란 코코넛크랩이 보인다. 조심스레 다가가 등껍질을 잡아 포획에 성공했다.

“와아, 크다!”

“굉장하네요!”

처음 대하는 괴물 같은 게를 보자 뒤따라오던 일행들이 탄성을 지른다. 몸집이 큰 것으로 몇 마리 잡아 요트로 돌아왔다. 푹 쪄진 게의 반짝이는 붉은색 껍질이 식욕을 자극한다. 내장은 즙을 짜 소스로 활용하여 다리 살을 찍어 먹는데 코코넛 향과 게 내장의 향이 혼합된 묘한 맛이 매력적이다. 입안 가득 코코넛 향을 채우며 즐거운 대화에 행복해하는 우리를 아름다운 노을이 감싼다. 특별한 체험에 벅찬 표정들, 훗날 이들은 지금의 풍경을 각기 다른 기억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함께 오길 잘했다!’

갈매기섬을 찾아 나서다

다음날 또 다른 섬의 탐험에 나섰다. 갈매기섬에서는 이 시기(6월 초)에 산란 행동을 하는 군함새의 무리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섬에서 멀리 요트의 닻을 내리고 고무보트로 암초를 피해 어렵게 상륙에 성공했다. 예전처럼 수많은 군함새들이 알을 품고 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군함새 떼와 그들이 지르는 괴성으로 섬이 시끄럽다.

알을 품고 있는 새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느린 동작으로 조심스럽게 둥지로 다가간다. 둥지 모양은 그다지 정교하지 않다.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마른풀과 가는 나뭇가지를 물어다 나지막한 풀 나무 위에 둥글게 쌓아 만들고 한 개의 알을 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번에 많은 알을 낳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서식지의 면적이 넓지 않고 주변에 천적이 없어서 많은 새끼를 낳을 필요가 없으리라 추측해본다.

오늘도 어김없이 돌풍이 휘몰아친다. 요트 위에 설치한 빗물받이가 제구실을 못 한다. 강풍에 물 받을 통이 쓰러져 허사다. 고무줄로 다시 묶어 보았지만 견디지 못한다. 조금만 튼튼하게 고정하면 잘 받을 수 있겠지만 민물을 구해야 하겠다는 절실함이 없는지라 모두가 물 받는 일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식수는 다음 기항지인 사모아까지 사용할 양이 생수로 준비되어 있고 생활용수는 바닷물 활용이 몸에 배어있어 물에 대한 위기감이 없다. 매일 소나기가 내리기 때문에 정 급하면 쉽게 민물을 구하는 방법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유럽을 출항해 6개월째 기나긴 항해를 통해 모두 능숙한 뱃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흰 돛과 바람 한 줌

해가 저물며 해변에 모닥불을 지폈다. 어김없이 허태완 팀장의 기타가 등장한다. 기타실력이 출중한 사람은 없지만, 분위기를 상승시키기에는 충분하다.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노래하고 이야기한다. 요트는 세대를 아우르는 마력이 있다. 요트를 통해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떻게 평생을 살며 이런 세상을 몰랐을까?”

“바닷가에서 바라보던 바다와 물에 떠서 생활하며 느끼는 바다는 완전히 다르네요.”

“새로운 영감을 얻었어요.”

“요트와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습니다.”

“요트를 만난 덕분에 은퇴 이후의 삶에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요트를 떠나 있어도 늘 생각나고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집에 가기 싫어요.”

처음 요트에 올랐을 때 멀미를 호소하며 괴로워하던 사람들, 긴 항해를 통해 어느새 바다에 적응하고 바다를 즐긴다. 그리고 바다를 이야기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젊은이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짓는다.

흰 돛을 올리고 우리는 또다시 다음 섬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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