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비가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위스에서 비가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글 사진 표현준(SeanPyp)
  • 승인 2018.04.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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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거닐기 유레일 편

당초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산의 여왕이라 불리는 리기산(Mt. Rigi)에서 종일 눈썰매를 탈 예정이었다. 썰매를 타기 위해 *스패츠도 구입했다. 런던, 파리에서 시작해서 밀라노, 베니스, 피렌체, 로마까지 2주간의 도시 일정 중 유일한 자연여행이기에 출발 전부터 기대가 큰 하루였다. 그런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언제 잠이 들었을까? 잠들기 직전까지 날씨 앱을 열었다 닫았다 했던 기억이 난다.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열어 하늘을 살폈다. 역시나 기적은 없었다. 흐린 하늘에 육안으로도 보이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루체른(Luzern)에 도착한 우리는 촉촉이 젖은 시내의 아스팔트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스위스 전 지역의 비 소식이었다. 스마트폰 날씨 앱, TV의 뉴스, 호텔 로비에 마련된 날씨정보 모두 한결같았다.

‘스위스에 아름다운 자연 말고 대체 뭐가 있지?’

‘베른(Bern)으로 가자!’

다행히 유레일 글로벌 패스를 가지고 있어 스위스의 기차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리기행 유람선에 있어야 할 시간, 우리는 베른으로 떠났다.



비를 피해 베른으로
베른을 택한 이유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베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구시가의 상점가는 건물 처마 밑으로 길게 나있어 비가 올 때 둘러보기 좋은 곳으로 이미 유명했다. 겸사해서 아름답다는 베른 구시가지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시 외곽에 위치한 장미공원(RosenGarten)도 일정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반나절은 아이가 좋아하는 베른 자연사 박물관에서 실내 활동을 즐기기로 했다. 물론 박물관으로 눈썰매를 대신할 수 없지만 종일 계속되는 비를 피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이었다.

몽골에 가면 별을, 볼리비아에 가면 하늘의 반영을 볼 수 있을 거라 믿고 떠나지만 인생이 그렇듯 여행 역시 각본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계획한 대로 경험하는 것도 좋은 여행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리기산으로 향하는 유람선이 아닌 베른행 유레일 기차가 오히려 특별한 여행을 위해 준비된 '마법의 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베른에 도착하면 비가 그칠까 내심 기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두꺼워져 도저히 우산을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나마 비를 가려주는 아케이드로 찾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허나 그런 생각도 잠시뿐, 조용한 베른의 구시가 거리는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축축한 내 마음 때문인지 스피커가 고장 난 TV처럼 어둡고 조용했다.



‘날씨가 좋았다면…’ 피하고 싶은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몇 개월 전부터 꿈꾸었던 리기산의 아름다운 풍경, 눈썰매와 대비되는 눈앞의 현실이 비에 젖어 마르지 않는 어깨와 마음을 지긋이 누르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장미공원으로 향했다. 소문대로 장미공원에서는 아름다운 구시가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의 모습 - 따듯한 빛깔의 지붕들과 뾰족한 첨탑, 굽이도는 베른 강의 풍경 - 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맑은 날 이곳에 앉아 식사를 했다면 더 좋았겠지?’ 떨쳐버리려 해도 피어오르는 잡념들은 이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을 걸어 내려가 구시가를 천천히 산책하며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비 때문에 포기했다. 다시 버스를 탔다. ‘이제 자연사박물관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자’ 창밖으로 보이는 다리의 풍경이 예뻐서 한 정거장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날씨가 내 잘못은 아니지만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가족의 뒷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미공원으로 가기 전 조용했던 도시의 구석구석 떠나오기 전과 다른 어색함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같은 길로 돌아왔는데 조용하고 무뚝뚝하던 거리에 네덜란드나 파리의 광장 같은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구시가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니 그곳에는 단 하루 스위스 여행, 반전의 드라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봄을 깨우는 베른의 축제
일 년 동안 손꼽아 이날을 기다려온 베른의 시민들은 내리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히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스위스에 머무는 단 하루, 흐리고 비가 내려 아쉬웠던 지금까지 내 모습과 상반된 그들의 움직임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내가 갖지 않은 즐거운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축제를 위한 분장을 입고 들뜬 마음으로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풍경들. 아이들은 잘라온 형형색색의 색종이를 사람들에게 뿌린다. 떨어진 색종이가 바닥에 수북이 쌓이고 빗물에 색이 번져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났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축제의 들뜬 기분 속에 존재감이 사라져버렸다. 끝나지 않는 긴 퍼레이드를 함께 즐기다 보니 리기산의 산악열차, 케이블카, 눈썰매 따위는 어느새 잊어버렸다. 베른 축제는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 같은 깜짝 이벤트였다. 축제를 즐기는 그들의 미소를 맞으며 날씨도 잊어버렸다. 날씨는 하늘이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미소를 배우고 나니 내내 우울하던 기분이 싹 사라져 버렸다.

‘축제는 날씨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 즐거운 여행 역시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그들에게 배웠다.



문득 오래전 친구와 함께 떠난 일본에서 우연히 만난 교토 마쯔리의 흥분과 감동이 생각났다. 기대 없이 떠난 첫 몽골여행에서 만난 밤하늘의 별도 그랬고, 아무런 정보 없이 올라간 고비사막 능선 너머의 풍경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지금껏 여행에서 만난 최고의 감동은 기대 없이 돌아선 모퉁이 뒤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종일 비가 내리던 스위스의 베른도, 끝나는 날까지 우산을 들고 다녔야 했던 유레일 여행도 계획되지 않은 즐거움을 선물하는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비 내리는 베른축제에서 깨달았다.

표현준 여행사진가
@seanpyo
홍익대학교 대학원 사진과 졸업. 사진, 자연여행, 캠핑을 테마로 신문·잡지 기고 및 개인미디어 운영으로 독자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매년 두근두근 몽골원정대를 인솔해 몽골의 자연을 여행합니다. 저서로는 <쨍한 사진을 위한 DSLR활용 테크닉>(2005), <아이와거닐기>(2017)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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