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부를 가다, 호찌민·붕따우
베트남 남부를 가다, 호찌민·붕따우
  • 글 사진 이두용 기자
  • 승인 2018.02.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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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픔과 닮은 나라

베트남이란 이름을 들으면 여전히 ‘전쟁’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난 영락없는 아재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태어났고, 자라면서는 반공방첩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휴양지가 많다고. 따뜻하게 돌아보기 좋다고. 주변에서 추천을 했지만 이상스레 갈 일은 없었다. 그래서 기대가 컸고, 더 낭만적으로 보였다. 따뜻한 꿈을 꾼 듯한 베트남 남부 이야기다.

붕따우의 바다다. 그림 같은, 아니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베트남을 가보고 싶다면 붕따우를 추천한다.


호찌민이 사이공이란 걸 알아?
“정말? 호찌민시가 과거에 사이공이었다고?” 베트남에 두 번 갔을 때 알았다. 그것도 호찌민만 두 번째 방문에서. 호찌민은 사람 이름이라고 알고 있어서 도시 이름으로는 생소할 수도 있지만, 사이공은 누구나 들어봤을 것 같다. ‘베트남’ 하면 한국 사람은 하노이나 다낭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호찌민이 베트남 도시 중 가장 크다. 서울의 3.5배다. 게다가 경제도시이기 때문에 곳곳에서 높은 건물과 말끔한 거리를 만날 수 있다.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시절 지어진 유럽식 건물이 묘하게 현대 건축물과 어울리며 지금의 호찌민을 만들었다. ‘베트남에 뭐가 있겠어?’ 하는 사람도 휴양지에 가면 아름다운 자연에 놀라고 도시에 들어오면 번화한 빌딩 숲과 세련된 사람들에 놀란다. 나처럼 무식이 부끄러울 뿐이다.

동상이 바라보는 정면엔 광장이 있다.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과 매우 닮았다.


호찌민은 사람 이름이 맞다. 베트남의 최고 혁명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고 과거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응웬 닷 탕Nguyen Tat Thanh이다. 어릴 적엔 응웬 싱 콘이라고도 불렀다. 식민시대에 혁명과 정치 활동을 하며 필요 때문에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다. 그의 가명과 필명이 160여 개나 된다고 하니 호찌민은 몇 번째 이름일지 궁금하다. 프랑스의 지배에 항거하기 위해 베르사유회의에 출석해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우리로 따지면 독립운동가다. 이후 혁명운동을 계속하며 베트남의 독립 총봉기를 주도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호찌민 시내를 다니다 보면 한국 사람 열에 아홉은 놀란다. 한국에 있는 크고 작은 기업은 물론, 유명한 음식 브랜드와 빵집, 커피숍, 마트, 극장, 패스트푸드 등 많은 한국 업체가 이곳에 투자하고 국내와 똑같은 디자인으로 매장을 열었다. 물가가 싼 덕분에 우리나라와 똑같은 메뉴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어서 신기하고 좋다. 베트남 음식은 쌀국수가 아니어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데, 그래도 안 맞으면 한국 음식점을 찾으면 된다. 외국에서 먹는 것 치고 저렴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장난감 집을 촘촘히 붙인 것 같은 마을이 그림처럼 예쁘다.


호찌민은 인민위원회 청사에서 시작
호찌민은 명소가 도심 한가운데 모여 있어서 여유만 있다면 걸어서 볼 수도 있다. 시작은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가 좋다. 이 건물은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사이공 시청 건물로 쓰였다. 프랑스 점령 당시 지어져 건축양식도 프랑스의 전통 양식을 따랐다. 레몬색 벽면에 흰 대리석 기둥을 사용해 외관이 고급스럽다. 덕분에 이곳을 중심으로 일대를 동양의 파리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프랑스 양식 건물이 관광객에게는 큰 호응이지만 베트남 사람에겐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 서울 광화문 일대를 ‘동양의 도쿄’라고 부르는 느낌이라면 씁쓸하다.

프랑스 양식을 잘 보존해 베트남의 오늘로 만든 시민극장 오페라 하우스.

그런 감성을 칼로 자르기라도 하듯 1990년 호찌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건물 정면 공원에 소녀와 함께 앉아 있는 호찌민 청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2015년 지금 모습의 당당히 서 있는 호찌민 동상을 다시 세웠다. 광장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번쩍 든 호찌민의 모습이 등 뒤의 청사와 묘한 어울림을 갖게 한다.
동상이 바라보는 정면엔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은 정말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을 닮았다. 낮보다는 저녁 무렵에 데이트와 쉼을 위해 찾는 이가 많다. 저녁과 주말엔 다양한 모임과 행사, 공연이 열린다. 시끌시끌 흥이 난다. 광장이 제법 길어서 중심으로 걷다가 거리 곳곳으로 빠져 다른 명소로 가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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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번쩍 든 호찌민의
모습이 등 뒤의 청사와 묘한 어울림을 갖게 한다.
전쟁유물박물관 마당에는 전쟁 당시 쓰였던 비행기와 탱크, 헬기 등이 늘어서 있다.


호찌민엔 전쟁유물박물관이 있다. 입구를 지나면 마당에 다양한 비행기와 탱크, 헬기 등이 늘어서 있다. 모두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하던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서울 용산에 있는 우리나라 전쟁기념관과 오버랩됐다. 총 3층의 건물엔 전쟁의 아픔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 적나라하게 촬영된 전쟁 당시의 모습들에 관람하는 누구 하나 장난치는 사람이 없다. 놀라는 소리나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사진 중에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한 장에 멈췄다.
1972년 6월 네이팜탄 폭격 당시 AP통신 사진기자가 촬영해 퓰리처상을 받은 <네이팜탄 소녀>라는 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화상을 입고 벌거벗은 채 울면서 도망치는 소녀의 모습이 담겨있다. 주위 군인들의 여유와 사뭇 다르다. 가슴 한편이 아렸다. 내가 전쟁을 직접 겪은 것도 아닌데. 지구상에 다시 전쟁이 없기를 기도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난 특별한 휴양지
호찌민에 식민과 전쟁의 잔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양식을 잘 보존해 베트남의 오늘로 만든 시민극장 오페라 하우스와 노트르담 성당이 대표적이다. 베트남 특유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벤탄 시장을 구경하고 골목 곳곳을 걸어 봐도 좋다. 물건을 살 땐 흥정 필수다.
휴양을 원한다면 단연 붕따우를 추천한다. 눈이 즐겁고 몸과 마음은 따뜻해지는 휴양지라고 할까. 다만 호찌민에서 150km 정도를 3시간 달려서 가야 한다. 여전히 도시를 벗어나면 좋지 못한 도로 사정 때문이다.

파도가 제법 있었지만, 물속에 뛰어든 사람이 많았다. 누구 하나 찡그리지 않고 즐거워했다.


이곳은 거대 예수상이 가장 유명하다. 더운 날씨에도 811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지만 걷는 동안도 볼거리가 꾸준히 이어져 지루하지 않다. 대부분 예수와 성경의 이야기를 그림과 석상 등으로 전시해 놓은 것이다. 드디어 도착한 예수상. 높이 32m, 양팔 길이 18.4m로 거대하다. 브라질을 제외하곤 세계에서 두 번째,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예수상이라고 한다. 상 안으로 들어가면 좁아터진 원형 계단이 ‘811계단은 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정말 아름답다.
근처 호마이산에 있는 호마이파크도 필수코스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금방인데 마치 우리나라 1970~1980년대로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입구에서 타는 증기기관 자동차는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곳에는 베트남의 설화를 조각해 놓거나 이 나라 역사적인 인물의 동상을 모아놓은 곳이 많아 교육에도 좋다.

붕따우로 떠나는 아침, 안개가 묘한 느낌을 선사했다. 사실 베트남은 오토바이의 나라다.


전망대에서 붕따우 전경을 내려다보면 이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날씨만큼이나 사방이 포근했다. 장난감 집을 촘촘히 붙인 것 같은 마을이 그림처럼 예쁘다. 자세히 보면 집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개성을 가졌다. 답답해 보이기도 했지만, 내려가서 보니 골목마다 정취가 남달랐다.
바다는 쿠바를 닮았다. 신기한 건 쿠바를 가보지 않았는데 사진과 영상으로 여러 번 봤던 아바나의 말레콘 해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파도가 제법 있었지만, 물속에 뛰어든 사람이 많았다. 누구하나 찡그리지 않고 즐거워했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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