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엽송이 우거진 중미산 캠프장은 마치 북반구의 숲 속에 들어선 느낌이다.
다산유적지~두물머리~중미산자연휴양림~중미산천문대~사나사
초겨울이 되면 산은 늘 아침 안개에 둘러싸인다. 그건 바로 찬바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공공연한 한설(寒雪)의 메시지다. 이 무렵이면 잎은 완전히 땅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긴 대지의 호흡 속에 양분이 되고 다시 잎이 된다. 캠핑은 일상의 긴 호흡 속에 얻는 삶의 양분이며 각박한 세상을 정화시켜 주는 잎이다.
장비 협찬·스타런, 코베아
▲ 캠핑에서 아이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은 아마도 고기를 구울 때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말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라고 하지 않던가. |
다산의 유적지로 가는 길은 팔당댐을 지나 젊은이들에게 제법 인기 있는 몇몇 음식점들을 통과해야 한다. 유적지 맞은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산이 만든 거중기를 둘러보고 ‘여유당’으로 향했다. 마당엔 수북이 쌓인 낙엽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춘다. 주말을 맞아 유적지를 찾은 가족들은 늦가을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는가 하면, 서로에게 떨어진 낙엽을 뿌려주며 마지막 가을의 축제에 빠져 든다.
정약용 선생의 문집과 유품들을 정리한 박물관을 둘러본 후, 그의 묘소로 향했다. 묘소에서는 여유당 건물과 한강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조선시대 마지막 개혁을 주창했던 인물이다. 물론 그의 사상과 개혁은 정조의 사망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가 저술한 책이나 거중기·배다리 등은 책이나 읽은 학자가 아니라 실생활로 나아가 학문을 적용하려고 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사람들은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新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그의 사회개혁론을 다산학이라 칭하는지 모른다. 서민으로 살아가기 점점 힘들어가는 요즘 늘 백성들을 위해 고민하던 위대한 인물이 그립다.
다산 유적지를 빠져 나와 아이들과 함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합수 지점인 마현리 강변으로 나아갔다. 마현리 강변은 두물머리가 주는 여유로운 풍경과 다산 유적지 등의 볼거리가 산재해 예전 서울·경기 인근의 캠퍼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하지만 가평이나 춘천 등에 시설 좋은 캠프장이 문을 열면서 최근에는 다시 뜸해졌다.
▲ 한편의 그림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아름다운 강변 풍경.
비처럼 떨어지는 두물머리의 은행나무 잎
강변으로 나아가 아이들과 한 차례 물수제비를 뜨다 또 다른 볼거리를 찾아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능내리에서 양수리로 빠져나와 두물머리 주차장으로 향했다. 양수리(兩水里)란 지명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두물머리’의 한자식 표기다. 두 강은 이곳에서 만나 한강을 이뤄 서울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간다.
주차장에서 두물머리로 가는 길은 은행나무 단풍과 낙엽에 젖어 온통 노란색 물결이다. 그 물결 속으로 들어서 한참이나 ‘낙엽 비’를 맞았다. 긴 여름 강렬한 녹색의 화원을 이루던 잎들은 하나, 둘 침묵의 대지로 잠들어 가는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자니 1970년대 영국의 프로그레시브락 그룹인 ‘스트롭스’의 명곡 ‘AUTUMN’이 떠올랐다. 장장 8분에 달하는 노래는 늦가을 북풍이 일기 시작한 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으로 인해 두물머리로 가는 길은 온통 노란 물결이다. |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는 연인들에게 몇 컷을 찍어주고는 주차장으로 돌아와 6번 국도를 타고 중미산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옥천 삼거리에서 37번 국도로 접어들어 농다치고개로 올라 98번 지방도를 이용해 중미산자연휴양림에 들어서니 마치 노르웨이의 고요하고 은은한 겨울 숲 속에 들어선 느낌이다. 온통 진노랑으로 물들어버린 낙엽송들이 북유럽의 이국적인 겨울 풍경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하얀 눈이라도 내린다면 아마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설국의 나라가 될 것이다.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2야영장의 제일 위쪽에 자리를 잡았다. 도심과 달리 산 속이라 기운이 급격히 떨어진 탓에 아이들의 입에선 입김이 나기 시작한다. 야영데크 위에 코베아 빅돔 텐트를 설치하려니 데크가 작아 플라이와 텐트를 고정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데크를 포기하고 맨 땅에 자리를 잡았다.
▲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강변 풍경이 아름다워 추억을 만들려는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자연을 통해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라’
문명의 때를 벗어나 다소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겪어가며 자연에 동화돼 가는 것이 캠핑의 진정한 목적이다. 된장찌개에 김밥과 김치로 이른 저녁을 해결하고 화로에 불을 피웠다. 이 순간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닭꼬치를 굽듯이 고기를 끼워 불에 굽는 일, 올 봄 춘천에서 꼬챙이에 새우를 끼워 익혀 먹어 본 뒤로는 하나의 행사가 되어 버렸다.
▲ 여유당 뒤뜰에 있는 옛 우물터. |
조용한 정적만이 흐르는 캠프장에 있다 보니 자연이 주는 한가로운 휴식과 함께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뒤돌아보는 삶, 사실 우린 뒤돌아볼 겨를 없이 앞으로만 내쳐 달린다. 남을 이기기 위해, 또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달려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주변을 보지 못하고 숲을 보지 못한 채 나무만 보는 삶을 살아간다. 밤안개 사이를 뚫고 달과 대화를 나누던 화로의 숯불이 스르륵 잠이 들기 시작했다. 추위를 피해 텐트 안으로 들어서니 두 놈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후드득, 후드득, 빗줄기가 플라이 천을 때리기 시작했다. 겨울비에 기온이 내려가다 보니 텐트 안에서도 입김이 보일 정도다. 비를 피해 밥과 김치찌개, 김으로 배를 채우고 보슬비를 뚫고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다행스럽게도 짐을 정리하는 동안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또 다른 장난감을 찾아냈다. 다람쥐가 버린 빈 잣송이를 가지고 축구를 하는 데 빠졌다. 가는 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밀고 밀치며 경기에 몰입한다.
집에 가자는 말에도 아이들은 경기에 열중이다. 아이들은 잣송이를 빼앗기고 나서야 겨우 차에 올랐다. 중미산자연휴양림에서 농다치고개로 오르다 중미산천문대를 찾았다. 하지만 궂은 날씨 탓인지 천문대 정문은 굳게 닫혀 열릴 줄을 모른다. 결국 98번 지방도를 따라 농다치고개에서 옥천으로 향했다. 냉면으로 유명한 옥천에서 점심을 해결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기에 용문산 백운봉 아래 자리한 고찰 사나사(舍那寺)를 찾았다. 사나사는 신라 말에 창건된 사찰로 원증국사 부도와 석종비가 유명한 곳이다.
물 맑은 계곡을 따라 올라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찰 순례에 나섰다. 사찰로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이름 모를 사람들이 쌓은 수백 개의 작은 돌탑들이 눈에 띈다. 작은 돌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쌓아올린 이 탑에는 아직도 그들의 소망과 기원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범종각을 둘러보고 곧장 경기도 유형문화재 21호인 삼층석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려시대 탑의 양식을 보여주는 3층 석탑은 상륜부가 사라진 기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 고찰 사나사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작은 돌탑들이다. |
작은 돌탑이 눈길을 끄는 고찰 사나사
▲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21호인 용천리 삼층석탑. 상륜부가 사라져 버려 원형을 알 수 없다. |
대웅전을 둘러본 후, 고려 초 왕건에 귀의했다는 함규 장군을 모신 함씨각을 찾았다. 사나사는 어쩌면 이곳의 호족세력이었던 함씨들이 세운 씨족 사찰일지 모른다. 더욱이 사나사계곡 아래 있다는 함왕혈이나 함왕성 등의 유적지들은 이런 추측이 가능하게 만든다. 함씨각과 삼성각을 둘러본 후,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절을 나섰다.
비가 내린 탓에 서울로 오는 길은 일찍 귀가하려는 차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량 행진이 이어진다. 추운 잠자리에 피곤도 하련만 아이들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댄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저 이야기할 뿐이다. 그것은 무조건 외운 것이 아니라 그저 오감으로 깨달은 것이다.
▲ 단풍과 낙엽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나사 뒤뜰. |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찾아가 아이들을 가르쳐 보라. 자유스러움이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이 자유의 시간 속에서 아이들이 자연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라! 발걸음을 멈추면 새들이 지저귀고, 잎사귀 위에서 속삭이는 풀벌레들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저 새와 곤충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아이들을 인도하라.’
-페스탈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