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성’처럼 솟구친 백록담 화구벽 장관
‘악마의 성’처럼 솟구친 백록담 화구벽 장관
  • 글 사진·진우석 출판팀장
  • 승인 2011.01.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TREKKING | 걷고 싶은 산길 ① 한라산 어리목~윗세오름~영실

▲ 만세동산의 구상나무숲. 한라산의 풍만한 허리를 따라 도는 윗세오름 코스는 부드러운 눈길을 걸으며 겨울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제주도 한라산은 강원도 대관령과 울릉도 나리분지 못지않은 다설 지역이다. 11월 중순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이듬해 3월까지 내리면서 쌓인다. 그래서 제주 어느 곳에서나 눈을 머리에 인 한라산을 볼 수 있고, 그 품에서 설국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제주의 겨울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몇 번 없을 정도로 따뜻하지만, 1950m 높이의 한라산은 툭하면 폭설이 쏟아진다. 2005년 12월과 이듬해 1월 사이에는 무려 220㎝의 기록적인 적설량을 보이기도 했다. 폭설이 내린 뒤 맑게 갠 한라산 풍광은 히말라야와 알프스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드넓은 설원 위로 솟은 백록담 화구벽
한라산의 등산 코스는 크게 두 가지. 성판악~백록담~관음사 코스와 어리목~윗세오름~영실 코스가 그것이다. 그 중 눈길을 걷기에는 백록담 정상 코스보다 한라산의 풍만한 허리를 따라 도는 윗세오름 코스가 좋다. 이 길은 전체적으로 완만해 산행 부담이 없고, 온통 하얀 눈나라 속에서 악마의 성처럼 솟구친 백록담 화구벽의 경이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등산로 들머리인 어리목 광장(970m)은 겨울철이면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한다.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는 모습은 언제나 흐뭇하다. ‘세계자연유산'이라고 쓰인 거대한 간판 뒤에서 산길이 시작된다. 한라산의 가장 큰 가치는 다양하면서 독특한 생태계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4,000여 종의 식물 가운데 1,800여 종이 한라산 자락에서 자란다. 게다가 한라산 특산 식물만 무려 70여 종이니 그야말로 희귀식물 자원의 보고다.

▲ 어리목 입구에서 사제비동산으로 가는 길의 눈꽃터널.
숲이 우거진 산길로 들어서면 눈꽃 터널이 시작된다. 이 터널은 사제비동산까지 1시간가량 이어진다. 앞에 가던 사람들이 스틱으로 눈 쌓인 나뭇가지를 건드리자 머리 위로 눈폭탄이 떨어진다. 깔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눈밭을 구른다.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유독 특이하게 생긴 나무가 나타나는데, 나이가 500살이 넘은 송덕수(頌德樹)다. 제주에 흉년이 들면 이 물참나무가 열매를 떨어뜨려 백성들이 굶어 죽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송덕수 아래서 잠시 한숨을 돌리고 조금 더 다리품을 팔면 갑자기 나무들이 사라지고 시야가 뻥 뚫린다. 사제비동산(1428m)이다.

사제비동산에 들어서면 한라산은 수고했다는 듯 사제비약수를 내놓는다. 달콤하게 목을 축이고 다시 30분가량 평탄한 길을 따르다 보면 눈 덮인 구상나무숲이 나타난다.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특히 윗세오름 아래 1500~ 1600m 고지의 만세동산 구상나무숲이 유명해 서양 관광객들은 일부러 제주를 찾기도 한다. 눈과 바람을 온몸으로 두들겨 맞은 구상나무에는 한라산의 야성이 새겨져 있다. 지난밤 몰아친 혹독한 눈보라를 이겨내고 의연하게 서 있는 구상나무들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 뒤로 백록담 화구벽의 웅장한 풍경이 드러나면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풍경이 제주 10경 가운데 7경인 녹담만설(鹿潭晩雪)이다. 백록담에 눈이 덮여 장관을 이루는 경치는 이곳 만세동산(1606m)에서 보는 것이 으뜸이다.

한라산을 깔고 앉아 빨래하는 설문대할망
만세동산부터 윗세오름대피소(1700m)까지는 평지와 다름없다. 백록담 옆으로 저마다 독특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민대가리오름, 장구목, 어슬렁오름, 윗세오름 등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윗세오름대피소에 도착한다. 이곳 대피소가 어리목 코스의 종점이다.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은 영실 방향으로 잡는다.

윗세오름을 오른쪽으로 끼고 크게 돌면 샘터가 나온다. 이른 아침에 노루들이 목을 축인다고 해서 노루샘이다. 노루샘부터 병풍바위까지는 만세동산처럼 시원한 설원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선작지왓이다. 봄여름으로 털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으로 펼쳐지는 곳이다. 이 길은 걷다 보면 부드러운 눈 언덕에 드러눕고 싶다. 누워보면 시퍼런 하늘이 유감없이 펼쳐지며 알 수 없는 희열이 솟구친다.

▲ 폭설이 내린 후의 어리목 광장은 아이들의 눈사람 만들기로 부산하다.
다시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면 풍만하게 살찐 윗세오름과 방애오름이 보기에 좋다. 두 봉우리의 빵빵한 곡선을 보고 있자니, 그 옛날 한라산을 깔고 앉아 한 발은 제주도 앞바다의 관탈섬에, 다른 발은 마라도에 얹고 빨래를 했다는 설문대할망의 엉덩이가 떠오른다. 설문대할망이 소변을 보자 땅이 파이면서 우도가 만들어졌다니, 제주 옛 사람들의 상상력은 참으로 해학적이며 호탕하다.

병풍바위에서 급경사를 내려오면서 눈을 뒤집어쓴 영실기암을 구경하고, 분위기 그윽한 아름드리 적송 지대를 통과하면 산길은 끝이 난다. 한라산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토록 부드러운 눈길을 걸을 수 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