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빛이여, 제 소원 하나 들어주소서!”
“태초의 빛이여, 제 소원 하나 들어주소서!”
  • 글·김경선 기자l사진·이소원 기자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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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마와 함께하는 KOREA TRAVEL 태백 ① 태백산 일출 트레킹

▲ 천제단에 오르자 시퍼런 하늘에서 하현달이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당골~천제단~정상~문수봉~산제당골~당골 원점회귀코스…12km 5~6시간 소요

영롱하게 빛나는 달빛과 별빛에 흠뻑 젖어 도착한 태백산 천제단. 동녘 하늘에선 태양의 산고가 진행되고 있었다. 새하얀 세상을 비추는 태초의 빛줄기, 그 아래 서니 온 세상의 기(氣)가 다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2010년 경인년(庚寅年) 첫 태양은 단군신화의 무대인 태백산에서 맞이하자.


▲ 천제단으로 오르는 길에 만난 단종비각.
새벽 4시30분, 달빛이 내려앉은 당골광장. ‘딸깍’, 헤드램프에 불을 밝히자 한민족의 시원을 장식한 태백산(太白山, 1567m)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조용한 당골 계곡에 접어들어 램프의 불빛에 화들짝 놀란 어둠을 가르고 천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이 새벽 공기는 매섭기보다 시원했다. 한껏 풀린 날씨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완만한 등산로를 뒤덮은 눈은 걸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새벽의 정적을 깼다. 워낙에 많은 이들이 오르내리는 산길이라 가야할 방향이 또렷이 드러난 등산로. 그렇지만 평일 새벽이라 그런지 취재팀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없었다.

취재팀이 굳이 어두운 새벽에 산행을 나선 이유는 태백산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사방으로 펼쳐진 첩첩 산그리메와 하늘과 소통하는 천제단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장관이 펼쳐지는 태백산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일출 명소다. 더구나 “태백산 천제단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말에 새해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것이다.

헤드램프의 빛줄기보다 더욱 그윽한 달빛과 별빛이 등산로에 내려앉았다. 하늘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의 빛을 비추고, 풍만한 하현달은 태백산을 감싸 안았다. 환한 대낮, 북적이는 인파 가운데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다. 달빛의 기운인지, 아니면 태백산의 신령한 기운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반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장군봉에 서자 동남쪽 산자락에 핏빛 띠가 내려앉았다. 이제 곧 산마루 위로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동녘 하늘 여명 따르는 신령한 산행길
출발한 지 1시간만에 반재에 도착했다. 정상은 ‘절반을 올랐다’는 의미의 반재에서 다시 1시간을 올라가야했다. 10분 정도 숨을 고르고 다시 길을 나섰다. 등산로는 천제단까지 능선을 따라 이어져 하늘의 달과 별이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헤드램프 없이도 어슴푸레 길이 드러날 정도다. 그때 동편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새벽을 깨우는 붉은 여명이 실눈처럼 가늘게 산마루에 내려앉은 것이다. 동틀 때까지 시간은 충분했지만 괜스레 마음이 급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반재를 떠난 지 40분 만에 망경사에 도착했다. 오르는 동안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망경사에 도착하자 몇몇 기도객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도량을 나서고 있었다. 이제 여명도 더욱 환해져 헤드램프 없이도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뚜렷이 드러났다.

망경사를 지나자 천제단으로 오르는 능선이 급해졌다. 출발한 후 줄곧 쉼 없이 걸은 터라 단종비각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종비각은 태백산 산신인 단종의 비석이 모셔진 곳으로,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구천을 떠돌던 단종의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찾은 장소다.

▲ 천제단 정상에 올랐다. 사방으로 펼쳐진 산군의 풍광이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이다.

천제단이 코앞인데 숨이 꼴딱꼴딱 넘어간다. 기도를 드리기 위해 천제단을 오르던 무속인도 가다 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르기를 잠시, 푸르스름한 정상에서 천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퍼런 하늘이 열리고 천제단에 한줄기 빛이 새어 들어왔다. 동쪽 하늘엔 핏빛 띠가 두터워졌고, 산줄기는 더욱 붉게 물들어 갔다.

취재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 무속인은 서둘러 천제단에 절을 올리고 태초의 빛을 향해 제를 지낸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풍백과 우사, 운사를 비롯한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으로 내려올 때도 이렇게 신령한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취재팀은 서둘러 장군봉으로 향했다. 천제단 지척에 위치한 장군봉까지는 5분도 채 안 걸린다. 장군봉 정상에 서자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 뒤로 드디어 태양이 정수리를 드러냈다. ‘두둥실’ 한순간 솟아 오른 태양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제압하고, 온 산하를 밝힌다. 그러자 사방의 산군이 발 아래 엎드렸다.

▲ 장군봉 정상에 서자 천년의 고목과 부드러운 산릉이 어우러진 장관이 펼쳐졌다.

신화의 태백산은 과연 어디일까?
한민족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태백산과 만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단군신화의 무대가 바로 태백산이다.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에 기록된 단군신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부쇠봉 안부에서 만난 주목.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멋스러운 주목의 자태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인간세계를 다스리기를 원하니, 아버지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며 인간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했다. 이에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비롯한 3천 명의 수하를 이끌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칭하며 다스린다. 이후 동굴에 사는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환웅은 이들에게 쑥 1자루와 마늘 20쪽만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고, 곰은 인내해 삼칠일(21일)만에 인간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하는 사람이 없자 신단수 아래서 환웅에게 아이 갖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환웅이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고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사실 단군신화에서 언급된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학계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태백의 태백산이 신령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일찍이 신라시대에 태백산은 토함산·지리산·계룡산·팔공산과 더불어 오악(五嶽)에 포함되었고, 그중 북악(北嶽)에 해당돼 산신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태백의 태백산은 예로부터 산신과 하늘에 제를 올리던 신성한 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에 이르러 민족이 수난을 겪으면서 태백산 제사의 대상이 하늘과 산신에서 단군으로 바뀌게 된다. 이후 지금까지 개천절이면 태백산 천제단에서 단군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 문수봉에서 바라보니 정면에 천제단과 장군봉이 한 눈에 조망됐다.

산그리메 조망되는 주능선길
일출의 비경에 마음을 뺏긴 사이 1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장군봉에서 되돌아 나와 천제단에서 부쇠봉(1547m)으로 향한 것이 오전 8시. 사방을 뒤덮은 눈밭 능선을 따라 잠시 내려서니 천제단보다 작은 하단(下壇)을 지난다. 부쇠봉 앞 안부를 지나 잠시 오르막을 걷자 등산로는 부쇠봉 정상을 거치지 않고 북서쪽 사면을 따라 문수봉(1517m)으로 이어졌다.

고운 아침 햇살이 등산로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많은 눈길 산행이지만 따사로운 햇살의 기운을 받으며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수봉 앞에서 산길이 가팔라지더니 제법 된비알이 이어졌다.

천제단을 출발한 지 1시간30분 만에 문수봉 정상에 도착했다. 태백산은 부드러운 육산이지만 문수봉 정상에는 신기하게도 커다란 돌무더기가 가득했다. 더구나 정교하게 쌓은 3기의 커다란 돌탑은 태백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 단단해보였다.

▲ 문수봉 남동쪽으로 보이는 중첩한 산군. 겹겹이 포개진 산줄기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웠다.

아이젠을 벗고 돌무더기 꼭대기에 서자 사방으로 막힘없는 조망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서쪽으로는 장군봉과 천제단의 부드러운 능선이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장산(1407m)·백운산(1426m)·함백산(1573m)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감동적인 풍광은 남동쪽으로 보이는 중첩한 산군이다. 겹겹이 포개진 산줄기 사이를 뿌연 구름이 흘러가는 몽환적인 풍광은 감동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 산제당골로 하산하는 길. 죽은 나무가 등산로를 막고 있다.
문수봉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지만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가 않았다. 태백산의 거룩한 품에서 빠져나오기 싫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다. 동쪽 소문수봉(1465m) 방향으로 내려섰다. 200여m를 걸어가니 삼거리 갈림길이다. 직진하면 소문수봉, 왼쪽길을 따르면 산제당골로 하산하는 길이다. 왼쪽 하산로로 내려섰다.
가파른 능선길을 30여 분 걸으니 등산로는 산제당골을 만났다. 졸졸 흐르는 계곡을 따르자 꽤 큰 공터가 나오고 아름드리 거목 두 그루가 보였다. 이곳은 산제를 지내던 장소로 산제당골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늘씬한 낙엽송 군락을 지나자 저 멀리 당골광장이 보인다. 이제 태백산의 포근한 품과 정말 작별할 시간이다. 성스러운 산의 기운을 품고 세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쉬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태백산은 아무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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