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당산에서 만난 도사
중국 무당산에서 만난 도사
  • 글 사진·안광태 여행작가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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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웃음 가득한 촌부가 건네준 불로장생 열매

▲ 낡은 짚신을 신고 초가삼간에서 세월을 낚는 촌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목젖을 태우며 기승을 부리는 더위를 피해 붉은 대련(對聯, 대문이나 기둥 등에 써 붙이는 글귀)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문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서자, 흙바닥의 거실 안쪽에서 촌부가 손수 만든 탁자며 의자들이 이방인 뜨내기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쯧쯧, 몰골에 꼬락서니 하고는. 그래 이 뙤약볕에 그렇게 바랑을 버겁게 짊어지고는 복날 개 마냥 축 처져서 누구를 만나러 가시겠다고?”

꽤나 알아듣기 힘든 촌부의 발음이었지만, 그래도 절반은 알아들어 웃음이 나왔다. 물 동냥을 하는 뜨내기의 초라한 꼴에 의기양양해진 촌부의 핀잔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뜨내기의 타들어가는 목젖이 걱정되었는지 낡을 대로 낡은 보온병 하나를 들고 나와, 큼지막한 막사발이 찰랑거리도록 물을 따랐다.

“도사를 만나 불로장생하는 금단(金丹,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선약)을 얻어먹으러 가신다고. 아직도 이런 정신 나간 젊은이가 있었나! 그러다가는 평생 사발농사 하나 제대로 못 지시지. 쓸데없는 소리 마시고 어서 물이나 먹고 정신 차리시게.”

촌부가 얹어놓은 찻잎이 우러나기를 채 기다리지 못하고 후후 불어 단숨에 물을 들이켜자, 그는 철없는 손자 어르듯 또 다시 물을 한 사발 따라주며 말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바쁠 것 하나 없는 ‘쩌우지앙후(走江湖, 세상을 떠돈다는 말로 뜨내기를 뜻하는 중국어)’이시구먼. 어쨌든 더위에 바람까지 말라버렸으니, 적적한 늙은이 말벗이나 할 겸, 들어온 김에 잠시 쉬었다가 가시게나. 허허!”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는 어디를 가든 중국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그들만의 독특한 신체 단련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슨 느릿한 체조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부드러운 무용 같기도 한 것이다. 중국인 대다수가 즐기는 태극권을 말하는 것이다.

그 태극권의 고향은 물 많은 후베이성(湖北省)에 있다. 무당산(武當山)이 바로 그곳이다. 중국에서는 북종소림 남존무당(北宗少林 南尊武堂)이라는 말을 쓴다. 중국 무술의 양대 산맥으로 중원 숭산(崇山)의 소림(少林) 무술과 무당산의 무당(武當) 무술을 꼽는 말이다. 소림이니 무당이니 하는 것들은 중국 무술에 관심이 있든 없든 영화나 책자 하다못해 어릴 적 보았을 만화를 통해서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 금정(무당산의 주봉 천주봉을 말함)에서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 금전은 말 그대로 금으로 만든 도교 최고의 전각이다. 금전 안에는 무당산의 주신 진무대제가 자리하고 있다.
▲ 태화궁은 명실상부한 절벽 위의 작은 자금성이다. 생김새도 그러하거니와, 놀랍게도 담장의 기와까지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소림 무술은 불교 집안의 무술이고, 무당 무술은 도교 집안의 무술이다. 소림 무술이 다소 직선적이고 역동적이라 표현될 수 있다면, 무당 무술은 보다 곡선적이며 정적이라 말할 수 있다. 무당 무술의 한 갈래로 인정되는 태극권은 우주 삼라만상의 생성과 변화의 근본 원리인 도교의 태극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태극의 원리에 따라 우주의 기운과 합일하여 끊어질 듯 이어지며 물과 같이 부드럽게 동작을 이어나간다. 약지승강 유지승강(弱之勝强 柔之勝剛), 중국의 고대 철학자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은 것을 이긴다는 뜻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는 또한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라 말했다. 그것이 무당 무술의 근본 철학이자 방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숭산에서 승려들의 강인하고 현란한 몸동작에 놀라고, 무당산에서 도사들의 우아하고 섬세한 몸놀림에 매료된다. 무당 무술의 발원지 무당산은 본래 도교의 총 본산지다. 인도 문화를 배경으로 싹튼 불교와는 달리, 도교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양 사회에 뿌리내린 중국의 토착 종교다.

촌부를 만난 곳은 무당산의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였다. 길은 끊어진 지 오래되어 흔적조차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나아가자니 숲이 우거져 오도 가도 못하겠고, 그런 처지에서 무당산의 첫날을 보냈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산들이 으레 그렇듯이 무당산 또한 매표소에서부터 산정 가까이 의무적으로 타야 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그리고 셔틀버스에서 내리면 곧바로 정상으로 이어지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신발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산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중국산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관광객들의 편리를 위한 것이든, 아니면 돈벌이를 위한 것이든, 아무튼 그것은 걸어서 산행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히 탐탁지 않은 일이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는 산은 산이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도보 산행이 금지된 곳도 많다. 그런저런 이유로 촌부들에게 물어물어 옛날 도사들이나 다녔다는 무당산 산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 길을 찾아 산정으로 오르기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티베트 불교의 어느 고승이 쐐기풀만 먹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더니, 무당산의 도사들도 쐐기풀만 먹고 수행을 하는지 원, 온통 쐐기풀 투성이에 길은 보이지 않고, 날씨는 무덥고, 물은 떨어지고….

첩첩산중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외진 골짜기에서 죽다 살아난 심정으로 촌부와 그의 집을 발견했다.
“무당산도 많이 변했지. 한 때는 도를 수행합네, 무예를 수련합네 하고, 산기슭이며 골짜기며 사람들로 들썩였는데 말이야. 산속을 헤매면서 보셨겠지? 군데군데 돌로 쌓아올린 집터들 말이야. 예전에는 그곳 모두 초가삼간이나마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고. 그래서 그때는 그나마 사람구경 좀 하고 살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북적거렸던 도사들은 문화혁명 때 모두가 환속을 당했어. 그래서 혁명 이후에는 이곳이 적막강산이 되어버린 게지.”

▲ 비록 지금은 폐허나 다름없이 허물어졌으나,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흥성 오룡궁이다.
촌부는 전날이 생각나는지 문밖으로 보이는 무당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는 종교는 아편이네 뭐네 하며 수백 년 내려오던 도교의 사원들을 마구잡이로 때려 부수었어. 그러다가 잠시 주춤하더군. 그 틈을 타 또다시 도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지. 그런데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번에는 문화적 관광 상품 개발인가 뭔가를 한답시고, 어이없게도 자기들 손으로 부숴놓은 도관들을 다시 짓기 시작하는 거야.

이제는 물론 시대가 변해서 이런 외진 산골에서 떨어져 살려는 사람들도 없지만, 이 산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통에 마음대로 집을 짓고 살 수도 없지. 그래서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된 도관에서나 도포 입고 상투 지른 겉으로만 도사인, 도사 아닌 도사들, 월급쟁이 도사들만 만날 수 있는 게야.”

무당산은 중국의 중부 내륙 지역인 호북성의 서북부, 양번(襄樊, 샹판)과 십언(十堰, 스이옌)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 큰 산이다. 해발 1612m의 천주봉(天柱峰)을 주봉으로 하고,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70여 개의 봉우리들이 열두 폭 병풍처럼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무당산은 유명세에 비하여 교통이 그리 수월한 편은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길목은 구성통구(九省通衢, 주변 아홉 개의 성으로 통하는 길목이란 뜻)라 불리는 무한(武漢, 우한)을 출발점으로 하고, 그곳에서 무당산행 직통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당산은 본래 태화산(太和山)이라 불렸다. 그런데 도교의 호법신, 즉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과 함께 도교를 수호하는 사방사신(四方四神), 북현무(玄武)가 이 태화산에서 오랫동안 수행하여 우화등선(羽化登仙) 하였고, 거기에서 ‘현무가 아니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非玄武不足以當之)’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무(武)’자와 ‘당(當)’자가 무당산의 새 이름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무당산의 최고신은 현무 즉 진무대제(眞武大帝)가 맡는다. 중국의 명나라는 진무대제의 도움을 듬뿍 받았다. 명을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과 조카의 지위를 찬탈한 3대 영락제가 그 대표적인 수혜자다. 진무대제를 앞세워 황권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영락제는 무당산에 대규모 도관들을 짓기 시작한다.

1412년부터 영락제는 북경에 자금성을 지었던 기술자들을 포함 30여만 명의 장인들을 동원하여 십여 년의 세월에 걸쳐 팔궁(八宮)으로 대표되는 도교 건축물 30여 개를 짓는다. 비록 지금은 폐허나 다름없이 허물어졌으나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현천 옥허궁(玄天 玉虛宮)과 흥성 오룡궁(興聖 五龍宮),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대성 남암궁(大聖 南巖宮), 세계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드는 세계 도교의 총본영, 화려한 도교 건축물의 극치 태현 자소궁(太玄 紫燒宮) 등이 그들 중의 일부이다.

거기에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 금정(金頂, 무당산의 주봉 천주봉을 말함)에 자리한 태화궁(太和宮)과 금전(金殿)이다. 태화궁은 명실상부한 ‘절벽 위의 작은 자금성’이다. 생김새도 그러하거니와 놀랍게도 담장의 기와까지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금정에서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 금전은 말 그대로 금으로 만든 도교 최고의 전각이다.

동 주조물에 황금 도금을 하였는데, 정교하기가 이를 데가 없고 6백 년이 지난 지금도 황금빛에 눈이 부시다. 금전 안에는 영락제를 본떴다는 진무대제가 좌우로 금동(金童) 옥녀(玉女)의 시중을 받으며 자리하고 있다. 무당산에 명대의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당산의 고 건축물들은 당, 송, 원, 명, 청대에 이르는 건축 양식과 조형들을 두루 아우르고 있다.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난 촌부는 여전히 낡은 짚신을 신고 초가삼간에서 세월을 낚고 있었다. “그래 불로장생하는 금단은 구하셨는가? 구하지 못했다면 이것이라도 한 번 먹어보는 것이 어떠하신가? 금단이 따로 있나, 아무것이나 먹고 고단한 한마음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다면 그것이 금단이지.”

촌부는 골 주름진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마당 한편에서 세월에 밀려 노랗게 익어가던 비파(枇杷) 열매 하나를 따서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껍질을 벗기고 한입 베어 물자, 알싸한 향기와 함께 시금털털한 맛이 아찔하게 머릿속을 찔러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무당산 꼭대기에 그처럼 신비롭게 퍼져 있던 푸른 기운이 노랗게 눈앞으로 쏟아져 내려 자꾸만 눈을 비벼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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