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울리는 전율
폐허에서 울리는 전율
  • 글 사진·진우석 출판팀장
  • 승인 201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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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산길 | ② 설악산 한계사지

▲ 덩그러니 남은 석탑과 그 너머 펼쳐진 가리봉 능선의 빼어남은 하염없이 그 자리를 지키게 한다.

설악산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리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눈이 소복이 덮인 한계사 절터. 설악산 한계령 아래 장수대에서 절터까지는 200m가 안 된다. 하지만 이 짧은 길은 시공을 초월해 눈부신 폐허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설악산은 전문 산꾼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겨 찾는 산이다. 설악산은 크게 외설악과 내설악, 남설악(점봉산 일대)과 가리봉 능선으로 나누어지고 이들은 제각기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외설악이 화려하다면 내설악은 고요하고, 남설악이 웅장하다면 가리봉 능선은 장쾌하다.

한계령 아래에 숨은 절터
한계령은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설악산의 대표적인 고개이고, 그 고갯마루는 설악산을 구성하는 세 줄기 산군들의 분수령이 된다. 한계령 북쪽으로는 장쾌한 설악산 서북능선이 흘러가고, 남쪽으로 부드러운 점봉산 능선이 시작되며, 서쪽으로는 필례령을 지나 가리봉 능선이 물결 친다.

“한계사지를 아십니까?”

설악산을 수백 번 가봤다는 설악산 도사들도 한계사지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계사지는 한계령 서쪽, 설악산 서북릉과 가리봉 능선의 가랑이 사이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 이곳은 변변한 안내판 하나도 없어 어쩌다가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직 입에서 입으로만 알려진 곳이다.

인제에서 한계리를 지나면 쇠리, 옥녀탕, 장수대가 차례대로 나타난다. 장수대는 불쑥 솟은 기둥같이 깎아지른 암벽이 마치 장군과도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설악산국립공원 장수대 관리사무소 옆으로 들어가면 갈림길이다. 여기서 왼쪽 길을 따라 좀 오르면 흉가처럼 남아 있는 옛 설악산관리사무소 건물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갑자기 양지바른 평지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바로 한계사지다.

절터를 찾았을 때 밤새 쏟아진 눈이 건물과 기단 흔적을 말끔히 덮어버렸다. 오직 흰 모자를 쓴 탑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이곳이 절터임을 증거하고 있었다. 절터는 폐허의 공간이다. 하지만 소복한 눈이 쌓인 폐허는 태초의 공간처럼 신성으로 빛났다.

석탑 너머 지금 막 땅에서 솟아난 듯한 가리봉과 삼형제봉의 수려한 자태에 입이 쩍 벌어졌다. 설악산의 가리봉 능선이 이처럼 힘차고 아름다운 줄 비로소 알았다. 그 풍경은 시신경을 통해 대뇌로 전달되었고, 놀란 뇌에서 울리는 찌잉~ 소리가 온몸으로 퍼지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추운 날 오줌을 눈 후에 몸이 떨리듯이. 그것은 전율이었다.

▲ 눈사람 하나를 올려놓았더니 탑에 생기가 돈다.
구산선문의 초발심이 담긴 풍경
전율은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미의 다른 표현이다. 이곳을 은근하게 일러준 책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의 저자 김봉렬 교수의 건축적 지식을 정리해서 듣는 것은 한계사지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건물은 지어지는 반대 순서로 허물어져 내린다. 나무로 이루어진 한국 건축의 폐허들은 기단과 초석 말고는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것들은 터를 닦았던 건축 당시의 근본적인 생각들만을 전한다. 껍데기는 사라지고 오직 가장 근원적인 것들만 남는다.”

그가 한계사지 폐허에서 본 것은 ‘모든 구속을 거부하면서 참다운 진리에 도달하려고 했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자유로운 조형 정신’이었다. 구산선문은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선을 공부하고 돌아온 승려들이 지방에 열었던 아홉 개의 선문(禪門)을 말한다.

김 교수는 한계사지가 구산선문 중 강릉 사굴산문의 일원으로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계사지에서 김봉렬 교수처럼 구산선문의 초발심을 읽어낼 능력은 없지만, 절터 앞으로 끌어들인 가리봉 산군의 빼어남에 전율할 줄 아는 내 몸을 고맙게 생각한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자리에서 저 풍경을 읽어내고, 이 자리에 절을 세우겠다고 다짐했을 스님의 희열과 초발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스님처럼 두 발이 눈에 묻힌 줄도 모르고 ‘하나의 사건’ 같은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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