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괜찮아, 22일간의 호주
힘들어도 괜찮아, 22일간의 호주
  • 이두용 기자
  • 승인 2017.11.27 0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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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울릉공~나루마~멜번~퍼스

긴 여행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가끔 어떤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른다. 동선대로 말하는 게 좋을지, 재미있는 얘기부터 해야 할지, 주제별로 정리해서 말할지. 보통은 그래도 두서를 정해놓고 말하는 편인데 오늘은 편하게 써보려고 한다. 사실 꼼꼼한 기획안을 들고 떠나온 여정인데 10%도 내용대로 한 게 없다. 우리가 인생을 계획한들 그대로 살았던 적이 있던가.

멜번 인근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241km로 길게 이어진 도로로 드라이브와 함께 트레킹·자전거 코스 등이 다양해 많은 이가 찾는다.

호주는 1년에 300일이 맑다면서?
올해는 유독 해외 일정이 많았다. 보통 한 달에 두 번 정도 해외에 나갔던 것 같다. 몇몇은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돼보지 않고는 속내를 모른다. 어느 순간 몸에 조금씩 이상 신호가 왔다. 오른쪽 어깨가 말을 듣지 않아 카메라를 멜 수 없기도 했고 무릎이 아파서 계단 오르는 일이 불편하기도 했다. 처방도 받고 물리치료, 도수치료 등 해봤지만 생각보다 낫지 않았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배로 지나는데 날이 흐리고 비가 내렸다. 일정 중반까지 날씨 때문에 힘들었다.
6년만의 퍼스. 도심으로 들어가 보면 많은 것이 변했는데 멀리서보니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좋다.

‘장기간의 해외 일정은 피해야지’ 다짐하고 있을 때쯤 방송 섭외가 왔다. 호주로 떠난다고 했다. 솔직히 처음엔 못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동일 프로그램에 몇 번 출연했는데 최소 20일 일정에 매일 짐을 꾸려 이동해야 했다. 더욱이 작년엔 사막에서 큰 사고도 한 번 당했던 터라 단번에 내키지 않았다.

며칠 고민하다가 ‘이런 기회가 아니면 가보기 힘든 코스’라는 생각에 OK 결정을 내렸다. 이번엔 시드니와 멜번, 퍼스 등 다녀왔던 도시들이 대부분이라 비교적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사실 호주는 동서남북 지도에도 없는 마을까지 거의 다녀봤다고 생각해서 조금 여유도 부렸다. 건방지게.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항상 많은 이가 찾지만 일몰의 순간 아름다운 찰나를 보기위해 더 많은 인파가 몰린다.
이번엔 그레이트 오션 로드 전 구간을 달렸다. 들머리인 토케이는 호주 서핑이 시작된 곳으로 세계적인 서핑 명소다.

호주는 300일이 맑다고 한다. 이건 처음 호주를 갈 때 담당자에게 들었던 말이다. 실제 대부분이 맑았지만 흐리거나 비가 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처음부터 비가 심하게 내렸다. 잠깐 그칠 때도 두꺼운 구름이 일행을 따라 다녔다.

우린 시드니로 입국해서 울릉공~나루마~멜번~퍼스~버셀톤~브룸~킴벌리 순으로 다닐 생각이었다. 아니 지금 17일째 그렇게 이동하고 있다. 다만 시드니에서 울릉공을 지나 나루마~멜번까지 1100km가 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비가 계속 따라오리라곤 생각 못했다.

이번엔 여정이 길고 다양한 곳을 다니기 때문에 스스로 사진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다. 도로를 달리다 만난 농장의 풍광.
헛리버 공국으로 향하는 길. 밀밭 한 가운데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작은 숲이 보였다.

추웠다. 심한 날은 대낮에도 6~7도. 한국에서 입고 간 얇은 패딩에 재킷까지 입어도 바람이 찼다. 재밌는 건 지금 킴벌리는 낮 기온이 40도에 이른다. 같은 나라인데 세계에서 가장 작은 대륙이자 가장 큰 섬인 호주여서 가능한 일이다. 한 나라에 다른 계절이 공존한다. 동에서 서까지 4시간 이상을 비행한다. 시차도 3시간.

비구름이 말끔하게 사라진 건 촬영 시작 후 10일 이후였다. 사진도 그렇지만 영상도 흐리거나 비가 오면 그림이 예쁘지 않다. 촬영팀도 나도 고민이 많았다. 비가 올 땐 비를 걱정하고 추울 땐 기온을 걱정했는데, 이젠 맑고 더우니 더위를 걱정한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호주 아웃백에 자라는 나무들은 건조한 기후 탓에 나무와 잎새에 수분이 적다. 생명의 신비가 느껴진다.

우측 핸들이 있는 차량을 타고 달리면 처음엔 역주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방향키와 와이퍼가 반대라 좌회전을 하려고 하다가 와이퍼를 켜는 일이 잦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이 빠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잘 몰고 다닌다. 다만 몸에 익숙해진 상태로 한국에 오면 원래 타던 자신의 차로 역주행을 하거나 이곳에서 했던 실수를 비슷하게 하기도 한다.

안 좋은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번엔 좀 특별한 사진작업을 하고 싶었다. 예전엔 해외에 나가면 새벽엔 스케줄에도 없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일출을 찍고 야간엔 야경이나 별을 찍곤 했다. 왜인지 요즘엔 의뢰 받은 작업만 마치면 개인적인 사진을 찍지 않았다.

카메라도 렌즈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한데 업체에 연락해서 평소 쓰고 싶던 렌즈와 카메라, 필터 등을 빌렸다. 평소 찍었던 범위 밖을 찍어본다거나 필터를 가지고 다른 느낌의 작업을 해볼 요량이었다. 렌즈 밝기를 어둡게 하는 ND필터를 2에서 1000까지 신청했고, 그라데이션 필터와 적외선 필터 등을 함께 받았다.

적외선 필터를 사용해 사진을 찍으면 적색보다 파장이 짧은 부분을 차단해서 표현해준다. 대낮에도 삼각대를 사용해서 20초 이상 장노출로 촬영해야 하는데 한 번에 성공도 어렵다.

평소 해외 일정처럼 카메라 장비와 노트북과 외장하드 등을 챙기고 나니 뿌듯했다. 다만 그게 며칠 가지는 못했다. 호주에 도착해서 3일째 되던 날 노트북이 고장 났다. 날씨가 안좋아서 걱정이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할 수 있는 처방을 전부 해봐도 안돼서 억지로 노트북 바닥을 뜯어 부품을 하나씩 해체했다가 재조립 해봤다. 역시 사망.

멜번으로 이동한 날 급하게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를 검색해서 노트북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3일째 되는 날 극적으로 이곳에 사는 여성분에게 중고로 노트북을 구매했다. 거래하기로 한 지하철 역 앞에 서 있는데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비가 오든 춥든 웃으면서 촬영에 임했다. 큰 고민 하나가 해결되니 작은 문제들은 생각보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결국 인생에서 만나는 고민은 어느 정도 마음가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란 걸 새삼 느꼈다.

멜번에선 ‘멜번 컵’에 다녀왔다. 호주의 봄을 여는 축제인데 경마 행사다. 세계에서 우승 상금이 가장 큰 대회라고 한다. 1등이 640만 달러(호주 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멜번 컵은 이름과는 달리 멜번만의 축제가 아닌 호주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큰 행사다. 결승 경기가 열리는 시간에는 전국의 모든 라디오와 TV 방송이 멜번 컵에 집중한다고 한다. 그래서 멜번 컵 결승이 열리는 순간은 ‘호주가 멈추는 날’이라고 부른다고. 멜번 컵 결승이 있는 날은 국가 공휴일로 정할 정도니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흐린 날씨는 마른 땅과 컬러 대비가 좋고, 빛 내림이라도 만나면 묘한 느낌을 만든다.
하얀 모래사막 너머에 10m 정도 높이의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마치 고독한 섬처럼 느껴졌다.

이날은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경기를 관람하러 간다. 수만 명이 모인 경기장은 마치 무도회장을 방불케 한다. 곳곳에서 공연과 이벤트가 열려 대회와 함께 부대행사를 즐기러 오는 사람도 많다.

멜번 컵이 끝나고 며칠 간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달렸다. 호주 동남부에 연결된 해안 도로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와 함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등에 선정된 명소다. 241km 길게 이어진 구간엔 걷기 좋은 트레킹 코스와 자전거 길, 캠핑 시설 등이 다양해 세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최근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세련되고 품위가 있었던 웬디 부인. 그의 노력이 만든 시크릿 가든은 정말 가볼만 하다.
멜번 컵은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 싶을 만큼 유쾌하고 멋진 행사였다. 경마 경주가 오히려 부록 같은 기분.

예전에 왔을 땐 캠핑장이 있는 숙소에 머물며 며칠간 다양한 트레킹 코스를 걸었다. 이번엔 241km 전 구간을 드라이브 코스로 달리며 스폿마다 사진을 찍고 방송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호주는 땅이 넓어서 대도시를 벗어나면 마을에서도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이 많다. 이곳 통신사 유심칩을 모두 샀는데 사막에 들어가는 순간 전부 불통이 된 적도 있다. 세계적 명소라지만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서도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는 구간이 많았다.

호주에 온다면 스마트폰이 아니어도 GPS와 지도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서 오는 게 좋다. ‘설마’하고 왔다가 ‘헐!’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땅이 생각보다 정말 크다.

경마 결승전이 열리는 순간, 호주 전역이 멈춘다고 한다. 정말 모두가 숨죽이며 봤다.

일생에 한 번 만나기 힘든 사람들
시드니엔 ‘웬디스 시크릿 가든’이란 곳이 있다. 웬디스라는 여성이 혼자서 가꾼 정원인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1992년 남편이 사망했는데 슬픔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쓰레기와 잡초로 가득한 땅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며 지금의 정원을 일궜다. 나중엔 딸이 도와서 함께 했는데 딸도 사망했다.

두 번 찾아갔는데 정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곳에 그런 스토리가 있는 걸 잘 몰랐다. ‘시드니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검색하면 추천 스폿으로 나온다고. 두 번 째 갔던 날 정원 청소하는 분께 부탁해 어렵게 웬디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메일도 보내고 호주에서 전화도 했었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분이었다.

그녀는 예술가였다. 집도 정말 아뜰리에처럼 꾸며놓고 사셨다. 호주의 유명 화가였던 남편과 딸이 이야기, 정원을 가꾸며 있었던 일들을 듣는데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정원을 가꾸기 위해 전 세계에서 식물들을 공수해 왔고 수백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놀라운 건 이 정원은 공공에게 무료로 개방된 곳이다. 이곳에선 매주 결혼식도 열리고 연일 많은 이에게 데이트 코스로도 사용된다.

시드니 웬디스 가든도 놀랍지만 ‘헛 리버 공국’에 비하면 아기자기한 수준이다. 서호주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헛리버 공국이 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90%는 넘을 것 같다. 실제로 나라로 인정받은 곳으로 퍼스에서 500km 정도 떨어진 시골에 있다.

헛리버 공국은 영국은 물론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인정한다. 건립자인 캐슬리는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그는 수학천재(?)이기도 하다.

처음엔 가볍게 생각하고 찾아갔다. 밀농사를 하는 농장이 나라라니. 6시간 넘게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나 듣고 와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의 신념과 자존심에 어느 순간 응원하고 있었다.

헛리버 공국의 탄생은 이렇다. 1970년 밀 농사를 하던 레너드 캐슬리(Leonard Casley)가 밀 생산량을 제한하는 서호주 정부와 분쟁하게 된다. 당시 전국이 밀 풍년이라 판매에 제한을 하게 되었는데 캐슬리는 자신이 수확한 밀의 500분의 1 정도만 판매하도록 허가받은 것이다.

농사를 위해 나라에 큰 빚을 졌던 캐슬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시정을 요구했지만 ‘호주 사람이면 호주법을 따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호주 사람이 아니면 호주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땅에 나라를 세워 호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자신을 레너드 1세 공(公)임을 선언했다고 한다.

호주 정부는 당연히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였던 캐슬리는 호주가 영국 연방 국가라는 사실을 이용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게 헛리버 공국이 영국 연방에 속한 국가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영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한 호주정부가 1972년 어쩔 수 없이 헛리버 공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됐다.

방송과 여러 매체 기사에는 이곳이 관광지로 유명하다고 전한다. 나 역시 신기한 마음이 먼저였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생각보다 고요했고 92세인 캐슬리는 여전히 자신들의 자존심과 신념을 지키고 있었다. 헛리버 공국엔 여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비싼 입장료나 기념품 판매점, 놀이기구 등이 없다. 보란 듯 우스꽝스런 의상을 입고 나라를 대표하는 성 같은 곳에서 허세를 떠는 사람도 없었다.

이 입구를 보고 누가 관광지라고 기사를 써놨을까. 48년이나 된 곳인데 2층짜리 건물 하나가 없다.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헛리버 공국이다.

“우리는 그저 정부가 개인의 소리를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여전히 개인의 형평성을 배제하고 탁상공론에서 나온 정책만 가진 정치인이 많아요. 헛리버 공국을 통해서 정부의 무책임에 자신의 소리를 내는 커뮤니티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여전히 힘이 있는 그의 메시지가 좋았다. 그는 수학천재(?)이기도 한데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사랑’을 수학공식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여자와 남자의 차이, 공기와 바람 등 수많은 것을 수학공식화 시켰다. 최근엔 나사의 기록을 토대로 목성이 태양계에서 갖는 위치와 힘 등에 대해 수학적으로 풀어냈다며 열심히 설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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