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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그리다
여행을 그리다
  • 이지혜 기자 | 양계탁 차장
  • 승인 2017.10.18 12: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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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여행

한가로운 캠핑장의 오후. 텐트 앞 잔디밭을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폭의 그림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말이 아닌 진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보자. 소소한 재미는 물론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공간을 기억하는 새로운 추억거리도 생긴다. 내게 주는 선물 같은 드로잉여행이다.

리모작가의 도구를 그린 사진

리모와 문화비축기지
닉네임 리모로 유명한 김현길 작가는 <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 <드로잉 제주>,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을 출간한 드로잉 여행 작가다. 대구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어릴 적부터 사랑하던 그림을 포기하지 못해 직장을 관두고 본격적인 드로잉여행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수원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회사생활을 했죠. 야근하고 집에 와선 곯아떨어지고, 간신히 얻은 휴일엔 그림을 그리러 떠났어요. 집 앞이든 뒷산이든 무작정 스케치북과 펜을 챙겨 나갔죠. 취미로 블로그를 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반응이 오더군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퇴직하고 1년간 취재한 뒤 첫 번째 책,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을 출간했어요.”

문화비축기지내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카페도 있다.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 맞은편 너른 부지에 자리한 마포문화비축기지. 오랜 시간 석유비축기지로 출입제한 구역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선 지름 15~38m, 높이 15m의 5개 비축탱크에 6907만 리터의 석유를 저장해왔다. 석유 안보를 위한 곳인 만큼 1급 보안시설로 분류돼 한국석유공사의 전문적인 관리에 있었으며 41년간 일반인들의 접근이 통제됐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위해 마포 상암동에 월드컵 경기장을 건설하면서 위험성이 제기되어 2000년 11월 폐쇄, 10여 년 남짓 방치되다 최근 문화비축기지로 새 단장을 마쳤다. 오픈식을 이틀 앞둔 10월 중순, 리모작가와 함께 문화비축기지에 발을 디뎠다.

공연장 뒷자석에 자리해 스케치를 시작하는 리모작가

발길을 멈추고 펜을 들다
솔린, 디젤, 벙커씨유 같은 여러 유종의 석유가 채워졌던 탱크는 현대적인 문화의 장으로 놀라운 변신을 마쳤다. 오픈을 앞둔 분주한 발걸음이 가득했다. 걷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곳이다. 하늘이 더 맑았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다. 아쉬움이 더해졌다.

1.3km의 산책로엔 상수리나무, 잣나무 숲 등 고운 숲과 정원이 이어지고 길 끝 매봉산 꼭대기는 한강까지 보이는 탁월한 전망이 펼쳐진다. 기존 비축 탱크를 비롯해 콘크리트 옹벽, 내외장재 등 석유비축을 위한 건물들을 활용해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경치가 펼쳐진다. 도심에 자리한 낡은 시설을 부수지 않고 원형을 남겨 건축물 고유의 역사적 의미를 살린 것은 물론, 다채로운 문화 활동 공간으로 새로운 역할도 부여했다.

T1~T6까지 일련번호로 불리는 문화탱크가 눈을 사로잡는다. 유리돔이 있는 T1, 실내 & 야외 공연장 T2, 기존 탱크 원형을 살려둔 T3, 복합문화공간 T4, 석유비축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이야기관 T5, 철거 탱크 자재로 새로 건축한 커뮤니티 센터 T6 등 하나하나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공연장 완성 그림

리모 작가는 T2 공연장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작은 가방을 열었다. 두께 다른 펜과 다양한 크기의 스케치북, 휴대용 물감과 붓펜까지.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가방에서 적당한 크기의 노트와 펜을 잡더니 쓱쓱 그리기 시작했다.

“구도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꼭짓점을 점으로 먼저 표시한 뒤 그것들을 이어가며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에요. 무엇보다 여행하며 그때그때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야 하니, 연필보다는 실패하더라도 펜으로 그리는 걸 권해요. 누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이 아닌, 내 기억을 남기기 위한 그림이잖아요. 화가처럼 잘 그릴 필요 없어요.”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조망할 수 있는 문화비축기지

서울 한가운데서, 예술
삼십 분 남짓, 눈으로는 황량한 연극무대가 스케치북으로 옮겨가니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인다. 마치 유럽의 어느 거리, 그림을 그리는 무명 화가의 솜씨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 놓고 보는 듯했다. 어느새 한 작품이 완성됐다.

“사진이 불필요한 것을 어떻게 빼야 할까, 고민하는 일이라면 그림은 그리기 싫은 것은 과감히 뺄 수 있어요. 그 대신 담고 싶은 걸 어떻게 잘 담을까 고민하면 되죠. 매우 편리하면서도 매력적이죠. 팁을 하나 더 드리자면, 형태를 잘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라인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라인에 자신이 없으면 그림이 거칠어지면서 표현력이 떨어지거든요.”

아이패드를 비롯한 디지털 드로잉 기계는 어떨까. 리모 작가는 사실 특별한 차이는 없다고 전했다.

T4와 T5사이를 그렸다. 시간은 약 40분 소요.

“오히려 매우 비슷한 느낌에 놀랐어요. 심지어 출력했을 때 느낌까지 비슷하더군요. 기술적으로 그만큼 발달했다는 증거겠죠. 하지만 전 추천하지 않아요. 배터리가 빨리 달아서 여행지에서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또 언제든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만큼 그림 앞에서 진중해지지 못한 것이 단점으로 느껴졌어요.”

가끔 채색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두 번째 작품은 기획전시장과 상설전시장이 붙어있는 T4, T5존에서 작업했다. 너른 산책길과 깨끗하고 넉넉한 벤치에 앉아 앞뒤로 탁 트인 경치를 보고 있노라니, 서울 한가운데서 느끼기 힘든 여유가 밀려왔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리모작가의 뒤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잘 그리시네요”, “멋지네요” 한마디씩 들려오는 칭찬에 작가는 익숙한 듯 감사를 표했다.

“유럽에서도 항상 사람들이 구경해요. 동양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더욱 신기한가 봐요. 가끔 즉석에서 그린 그림을 사고 싶어하는 현지인도 많아요. 덕분에 점심값을 벌기도 했죠. (웃음) 하지만 대부분 판매하진 않아요. 저를 위해 그린 그림이고, 제 추억을 위한 선물이니 파는 것보단 소장하는 데 의미를 둬요.”

석유 비축탱크가 최근 문화비축기지로 새단장을 마쳤다.

스케치북으로 실현하는 자유
석유탱크가 잘 보존된 T3 구역의 입구에 앉아 월드컵경기장 전경을 바라보며 채색작업에 돌입했다. 램브란트의 작고 귀여운 휴대용 팔레트와 스테들러의 휴대용 물감붓이 유용했다. 수건 하나만 있으면 거창하게 준비할 필요 없이 즉석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수첩에 담긴다.

“눈으로 보는 풍경과 그림은 참 달라요. 유명한 명소보다 평범한 풍경 그리는 것이 좋아요. 그냥 지나다니는 길 하나에 이야기가 입혀지거든요. 그러다 보면 그 여행이 더욱 의미 있어지죠.”

리모작가가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작은 물감세트와 팔레트

화가처럼 거창할 필요는 없다. 드로잉 여행은 그저 내가 간 길을 새롭게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정해진 정답도 당연히 없다. 다양한 재료를 복합적으로 써도 괜찮다. 룰이 없는 드로잉. 여행에서 더 풍족한 자유를 느끼고 싶다면, 작은 스케치북 하나로도 충분하다.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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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dnrbw 2017-10-20 00:56:11
와 현장에서 바로 그리는 드로잉이라니ㅎㅎㅎ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더 느낌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