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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려도, 비가와도 좋아. 휘바!핀란드 기행
  • 글 사진 이두용
  • 승인 2017.10.04 06:57
  • 호수 149
  • 댓글 0

흐렸다. 북유럽의 청명한 하늘을 기대했는데. 가끔 비도 내렸다. 내심 해가 뜨기를 바랐는데. 날씨 욕심을 버리니 운무가 잔잔히 깔린 자연이 좋았다. 비가 내리는 도시가 더 아름답다. 말로만 듣던 북유럽 감성. 따라 한다고 될 리 없는 이들의 생활이 부러웠다. 올 때마다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핀란드의 매력. 도대체 뭘까.

핀란드는 어느 곳이든 지척에 청정자연이 있다. 그들의 자연사랑은 칭찬할만하다.

비행기가 좋으면 여정도 즐거워
7년 만의 핀란드. 첫 여정이 실패라고 생각했지만 늘 다시 가고 싶은 나라에 손꼽았다. 실패인 이유도 내가 수집한 정보의 부족 때문. 10월의 핀란드를 우습게보고 얇은 옷만 챙겼다가 가져간 옷을 모두 껴입고 다니는 우스운 꼴을 연출했다.

이번엔 단단히 준비했다. 8월 말인데 방수가 되는 두툼한 외투까지 챙겼으니 비바람 몰아쳐도 끄떡없었다. 다만 계절이 다른 곳으로의 장거리 여정이라 짐이 많고 무거웠다. 언제부턴가 카메라도 세 대씩 챙기는 터라 분명히 내게 필요한 장비인데 말 그대로 짐이 됐다.

고민하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항공이 비즈니스 클래스로 배정됐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핀란드 여정이니 항공사는 당연히 핀에어Finnair. 지난해부터 핀란드 관광청, 핀란드 여행업체Primera Holidays와 스톱오버 핀란드StopOver Finland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헬싱키를 경유할 때 5시간부터 5일까지 다양한 구성으로 선택해서 이용할 수 있다. 핀란드 국적기라 편하기도 하지만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항공사 20에 올랐을 만큼 믿음직하다. 최근 8년간 북유럽 최고 항공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핀에어 덕분에 두 다리 쭉 펴고 여행할 수 있었다. 비행이 여정의 처음을 좌우한다.

오랜만의 비즈니스 클래스. 짐도 세 개나 부칠 수 있고 다른 것보다 장시간 비행에 두 다리 쭉 뻗고 누워서 갈 수 있으니 좋았다. 핀에어 A350 기종에는 비즈니스석이 총 46석이라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가족을 동반하고도 편히 갈 수 있겠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일단 누웠다. 요즘 들어 해외 일정이 생기면 이상스레 전날은 밤샘을 하게 됐다. 머리를 대자마자 어김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비즈니스석은 식사와 음료 클래스도 다른데,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냥 잤다. 비행기에서 누울 수 있다는 게 내겐 보약보다 감사한 일이었다. 핀란드 여정으로 향하는 첫 단추. 비행기가 좋은 덕에 단꿈을 꾸었다. 어떤 일에서든 처음이 중요한 이유다.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품격이 남다른 북유럽 디자인

마치 중세 영화의 세트장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든 테르티 장원의 가옥.

헬싱키는 그대로였다. 유럽이 좋은 이유를 꼽으라면 양손으로도 부족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고유함이 좋다. 한두 달만 지나도 새로운 건물과 거리가 생겨나는 요즘 유럽의 도시는 고전과 세련을 오롯하게 지니고 있어 올 때마다 감동한다.

변하지 않은 듯한 헬싱키지만 2005년부터 북유럽 감성으로 디자인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매년 8번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헬싱키 디자인 디스트릭트Design District Helsinki 라벨을 부여하는데 업종도 다양하다. 보석 세공, 디자인 및 골동품 가게, 패션 상점, 박물관, 미술관, 레스토랑, 호텔 등을 포함해 25개 거리에 180여 개의 업체로 구성돼있다. 모두 디자인 도시 헬싱키의 명성을 높이려는 방안이라고.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가게 앞에 라벨이 붙여진 한 패션 매장에 들어갔다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달랐다. 옷감을 만드는 손길이 달랐고, 옷감에 수놓아 있는 패턴과 디자인이 달랐고, 옷의 라인이나 태가 달랐다. 패션에 문외한인 내가 이 정도라면 옷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곳은 천국이 아닐까.

화단을 장식한 소품에서도 핀란드 사람들의 센스와 자연사랑이 느껴진다.

매장 가운데 전시된 신발에 눈이 갔다. 나무를 얇게 잘라내 곡선으로 신발의 뒷굽을 연출한 슬리퍼였다. ‘설마 진짜 신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싶어서 물어봤는데 이 매장에서 잘 팔리는 아이템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바닥과 닿는 아웃솔까지 고무로 덧대어 꼼꼼하게 만들었다. 역시는 역시였다.

헬싱키는 디자인 도시를 지향하면서 매주 금요일 헬싱키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둘러볼 수 있는 가이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동선별로 디자이너를 직접 만나 그들의 아이디어와 방향성 등을 들으며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선진국은 그러고 보면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뭔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거기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당연한 나라. 부러웠다.

모든 것은 자연에서 비롯된다

올라빌린나 성은 왕이나 군주의 주거가 아니라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핀란드는 대자연이 펼쳐진 나라도 아닌데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자연’이었다. 자연을 헤치지 않고 건물을 짓고, 천연재료로 옷을 만들거나 생활 도구를 만들고, 유기농으로 식사를 하고, 자연을 찾아 쉼을 얻는. 그들에겐 일상이고 삶이었다.

헬싱키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라띠Lahti에 갔을 때 시벨리우스 홀을 보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의회 및 콘서트홀로 이용하는 곳인데 처음 폐공장을 이용해 지었다가 증축할 때는 자연에서 얻은 목조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난 100년간 핀란드에서 나무로 지은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이기도 하다. 내부를 구경하는데 의자 모서리 하나도 장인의 손길이 거쳐 간 듯 보였다. 건물 전체가 명품처럼 느껴졌다.

시벨리우스홀은 핀란드에서 지난 100년간 지은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자연주의가 느껴진다.

인근에는 라티 스포츠 센터가 있다. 핀란드는 겨울 스포츠로 유명한 곳이라 스키점프 타워와 아이스하키 경기장, 스키 박물관, 야외 수영장 등이 마련돼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스키점프 타워에 오르니 고층 건물이나 산에 올라온 것처럼 아찔하다. 주변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시즌에는 경기장을 중심으로 하이킹 코스로 활용한다고 한다. 나지막한 산이 경기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여유가 있다면 산으로 향하고 싶었다.

미켈리에선 테르티 장원Tertti Manor에 들렀다. 장원莊園은 봉건적 토지 소유의 형태로 과거 귀족·영주의 독점적 특권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마치 유럽을 미화하는 중세를 무대로 한 영화에 등장할 법한 세트장 같았다. 흐리고 빗방울까지 떨어지고 있었지만,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뻤다.

잘 가꿔진 정원에 집을 얹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1540년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이곳은 1894년에 현재의 건물이 지어졌고 몇 번의 개축이 있었지만.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을 열고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 말아 올린 콧수염에 턱시도를 입은 주인장이 반길 것 같은 인테리어에 놀란다. 내부 공간마다 수백 년의 추억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있었다.

핀란드 정서에 잔잔히 스며들다

성벽 총기를 거치하던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데 마치 사진 액자를 보는 기분이다.

여정 내내 밤엔 사우나를 했다. 사실 사우나라는 말도 핀란드에서 왔다. 자일리톨만 온 게 아니다. 핀란드의 사우나는 몸이 뜨거워지면 지척에 있는 강이나 호수에 들어가 식히는 게 특징이다. 덕분에 깜깜한 밤, 호수와 강에 들어가 수영을 했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작은 조명도 없는 자연에서 발이 닿지 않는 물에 들어가 있는 거 약간의 공포와 함께 큰 판타지를 느끼게 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핀란드 사이마 호수Lake Saimaa엔 민물 물범도 산다. 희귀종이라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핀란드의 청정 자연을 잘 설명해주는 듯 했다.

사보린나Savonlinna에 도착하니 멀리 호수 한 가운데 성이 우뚝 서 있다. 올라빌린나 성Olavinlinna Castle이다. 그러고 보니 가는 곳마다 잘 보존된 호수가 많다. 이 성은 왕이나 군주의 주거용이 아니라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도 사방을 담장처럼 튼튼하게 지어 올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올라빈린나 성은 현재 저층부를 개조해 큰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

내부 공간도 역시 주거보다는 방어를 위해 짜임새 있게 나눠 있었다. 이 성이 특별한 건 공연장으로 활용된다는 것. 저층부를 개조해서 큰 공연장으로 만들었고 오페라나 클래식 공연은 물론 메탈이나 팝 같은 다양한 공연을 개최한다고 한다.

다시 헬싱키로 올라왔다. 조용한 아침 숲속을 걷고 나온 기분이다. 여전히 흐린 헬싱키였지만 적당히 색이 빠진 건물과 거리, 하늘과 바다가 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바다를 눈앞에 두고 부둣가에 마련한 알라스 수영장은 날씨만 좋았다면 뛰어들고 싶을 만큼 좋았다. 역시 시설 대부분은 목조를 이용했다.

이딸라 & 아라비아 디자인 센터Iittala & Arabia Design Centre는 헬싱키 디자인 디스트릭트보다 상업적이지만 핀란드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줬다. 우리가 왜 핀란드와 북유럽 디자인에 열광하는지 속내를 들여다본 기분이다.

미켈리 시장 광장은 1838년 시가 수립된 이후 꾸준히 도시의 중심 기능을 해왔다.

마지막 여정은 헬싱키 증류 회사Helsinki Distilling Company. 말 그대로 헬싱키 감성을 담아 술을 만드는 곳이다. 위스키와 진처럼 도수 높은 술을 위주로 만드는데 칵테일로 마시면 맛이 끝내준다. 솜씨 좋은 바텐더가 만들어준 예쁜 칵테일을 들이켜니 알딸딸한 기분과 함께 며칠간 핀란드 일정이 더 아름답게 떠올랐다.

글 사진 이두용  skysuny@outdo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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